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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의 일화(逸話)
소설가 김외숙
-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editorial@koreatimes.net)
- Jun 13 2022 12:03 PM
우편물을 가지러 나간 그가 현관문 앞에서 날 불렀다, ‘외숙, 나와 봐!’ 하고.
“왜?”
컴퓨터 앞에서 한창 드라마에 마음을 빼앗긴 내가 내심 귀찮아하며 물었더니 ‘새가 있어.’ 라는 것이었다.
새가 뭐 한 두마린가, 하며 발딱 일어서지 않고 미적댔다. 정말 새가 어디 한두 마린가? 뜰에 새 모이통이 두 개나 있고, 새들은 제집인 듯 날아오고, 나는 아침마다 새소리에 잠을 깬다.
그는 여태 새를 보고 있는지 날 불러놓고 고요하기에 이번엔 내가 궁금해 보던 드라마를 정지시켜놓고 나갔다, ‘새, 첨 보나?’ 하면서.
“봐라, 저 새. 아무래도 병든 것 같아.”
그가 가리키는 뜰에는 털이 헝클어진 어린 새 한 마리가 뒤뚱뒤뚱 걷고 있었고 내 눈에 걸음이 몹시 불안정해 보였다. 헝클어진 털 모양새가 몸이 아파 만사 귀찮아하는 사람의 몰골을 연상하게 했다.
“이제 걸음마를 배우는 새 아닐까?”
뒤뚱거리는 새를 물끄러미 보며 내가 말했다. 털이 가지런하지 못한 이유가 병이 들어서가 아니라 이제 막 알을 깨고 나왔기 때문일 것이라는, 조금은 긍정적인 쪽으로 나는 생각을 하기로 했다. 내가 그렇게 생각을 하기로 한 것은 그를 의식했기 때문이다, 갈수록 복용하는 약의 가짓수를 늘이고 있는 그였다.
“아니야, 그게 아니고 병든 것 같아.”
그러나 내 말의 의미를 짐작하지 못하는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만 말했다.
“아이구, 이게 뭐야?”
그때 내가 조금 호들갑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현관문 바로 내 발 앞에 쌓인 것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것은 하얀 새 똥이었다.
한 마리가 배설했다기엔 너무나 많은 분량의 새 똥이 쌓여 있었다. 그러니까 뒤뚱거리며 걷는 저 새가 눈 똥일 텐데 작은 새 한 마리가 저 많은 분량을 배설했다면 그것은 사람으로 치면 분명 비정상적인 배뇨작용일 것이었다, 그러니까 배설 조절기능을 이미 잃었다는 의미였고 그의 말처럼 병이 든 것이 분명했다.
그가 집안에 들어올 생각도 않은 채 새에게 정신을 쏟고 있는 동안 나는 뜰에서 물뿌리개에다 물을 채워 현관 앞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물을 부어 씻어내면서도 새 한 마리가 쏟은 분량으로는 너무나 많은 배설물과 헝클어진 털 모양새며 균형 잃은 걸음걸이로 새가 큰 병에 걸렸음이 분명한데 새는 어떤 병에 걸리면 저런 증상을 보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넋을 놓고 지켜보던 그가 우편물도 잊은 채 집안으로 들어오더니 뜰로 난 문의 블라인드를 걷고 새가 걸어갔음 직한 곳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외숙, 저기 봐!”
“왜 또?”
현관문을 물을 부어 씻어냈으니 나는 이제부터 정지시켜둔 드라마를 봐야 하는데 그가 또 불렀다.
“저 새가 이젠 걷지도 못하네.”
‘아프니까 못 걷겠지?’
나는 컴퓨터 앞에 앉지도 못하고 혼자 속으로 중얼대면서도 눈길은 그가 바라보는 뜰의 그곳으로 주고 있었다.
새는 잔디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정말 못 걷네!”
“저 새, 동물 병원에 데려가야겠다.”
“동물 병원? 새도 동물 병원에 가나?”
아주 작은, 우리로 하면 참새 같은 새 한 마리가 아프다고 동물 병원이라니, 내 상식의 동물 병원은 강아지나 고양이 정도 크기의 반려동물이 아플 때 가는 곳이었다.
“당연하지, 아프면 개미도 데리고 가야지.”
“...!”
말 대신 내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럼, 생명인데.”
툭 터진 내 웃음에 그가 정색했다.
그는 자꾸 진지하고 나는 자꾸 웃고 싶었다.
그렇다고 눈치 없이 자꾸 웃을 수 없던 내가 입을 비틀고 있던 사이에 그가 뜰로 내려섰다. 새를 데리고 병원에 갈 모양이었다. 그를 따라 나도 뜰에 나섰다.
그런데 새는 헝클어진 털 모양새를 한 채 잔디에 엎드려 있었다.
“잠들었나?”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눈으로만 바라보는데 그가 손으로 엎드린 새의 머리를 들었다. 얇은 눈까풀이 동그란 눈을 덮고 있었다. 어쩐지 그 얇은 눈까풀이 다시는 뜨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의 다른 한 손이 헝클어진 새털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일어나라, 새야. 살아나야지!’라며 말없이 하는 기도 같았다.
‘죽었나 봐!’
너무나 진지한 그 모습에 차마 큰소리를 낼 수 없던 나는 그가 알아듣지 못하는 우리 말로 나지막이 소리쳤다. 그래서, 저 작은 몸속의 배설물도 감당할 수 없어 그렇게 다 쏟아내었던가 보았다.
그가 새의 머리를 들었다가 살며시 놓았다. 새는, 다시 고개를 들 줄 몰랐다.
“오, 노!”
신음하며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의 푸른 눈동자는 이미 물에 잠겨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여전히 헝클어진 새털을 쓰다듬고 있었다.
나는 새를 보다가 또 그를 바라보기를 되풀이했다. 행여 그가 죽은 새와 약의 가짓수를 늘이고 있는 자신을 동일시할까 몹시 두려웠다.
그와 나는 잠시 죽은 새 앞에서 말없이 앉아 있었다.
“어렸을 때, 죽은 새를 뜰에다 묻은 적 있어.”
망각의 병을 앓고 있는 그가 여태 속에다 묻어 두었을 오랜 기억 한 자락을 끄집어 올렸다.
“누나는 설교하고 나는 바이올린 연주하며 예배드렸지. 묻어주자.”
예수님 때문에 평생 혼자 사셨고, 예수님 때문에 평생 설교한 남매였다.
그가 죽은 새를 뜰의 소나무 아래로 들고 갈 동안 나는 부삽을 찾았다.
그는 땅을 파고 마른 솔잎을 깔아 새를 뉜 후 다시 마른 솔잎을 덮고 흙을 얹었다. 그리고 흙을 꼭꼭 눌러주었다.
그가 몸 아픈 자신과 새를 동일시하고 있는 것만 같아 자꾸만 내 마음이 아렸다.
꼭꼭 흙을 눌러주는 그의 손가락을 바라보며 생각을 바꿨다, 새 곁에 그와 내가 있어 다행이고 그의 곁에는 내가 있어 다행이라고.
그러니까 모두가 다행인 셈이었다.
나도 그의 곁에서 꼭꼭 흙을 눌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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