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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만나듯
소설가 김외숙
- 캐나다 한국일보 (editorial@koreatimes.net)
- Jul 11 2022 02:19 PM
더위에 약한 나는 긴 여름이 늘 부담스럽다. 여름을 맞기도 전에 어서 벗어날 궁리부터 하는데 아무리 궁리해봐야 다 겪지 않고는 결코 벗어날 방법은 없다.
그런데 올여름만큼은 어서 가라고 재촉할 수 없다. 재촉은커녕 가을이 더디게 오도록 여름을 붙잡아 앉히고 싶은 심정이다. 돌아서려는 연인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 같은 이 얄궂은 심정의 이유는 이 여름이 바로 내 인생 육십 대의 마지막 여름이기 때문이다.
내가 언제, 가는 세월의 자락을 잡고 애달파 한 적이 있었던가?
마침내 시간을 금쪽같이 여길 줄 알게 되었으니, 이것 하나 깨닫는데 근 일흔 해가 걸린 셈이다.
나는 요즘 부쩍 나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어쩌다, 뭐하느라, 벌써 이 나이를 먹었는지 도무지 남의 것만 같은 이 나이가 솔직히 몹시 낯설고 두렵다. 세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을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 지금도 이미 늙었는데 이것이 남은 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모습이라 여겨야 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고, 억울하다고 대들 데도 없다.
내가 십 년마다 바뀌는 나이 대를 잘 넘어오다가 유독 올해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에 카톡이 한 몫을 한다고 할 수 있다. 하루에도 열 손가락이 모자라도록 카톡을 보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연령이다 보니 그들이 보내는 정보나 좋은 글, 동영상 등도 대부분 나이를 의식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카톡의 글귀는 말한다, 예습도 복습도 없는 단 한 번의 삶이 초라하지 않으려면 대인관계를 잘해야 한다고. 편하다고 함부로 대하지 말고, 져 준다고 만만히 보지 말고, 장점에 반했으면 단점에 돌아서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또 재갈을 물려 삶의 속도를 조절하라고도 한다.
친절한 카톡은 또, 건강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이며, 노년의 경제는 어떻게 할 것이며, 마음은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도 자상하게 알려준다. 그래놓고는, 한 번 지나가면 다시 살아볼 수 없는 시간, 순간의 시간을 뜨겁게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며 시간의 관리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하나 같이 잠언 같은 문장들이 감미로운 음악에 실려 눈앞에 펼쳐 지면 다분히 감성적인 나는 가끔 눈물 몇 방울을 흘리기도 한다. 그렇지 않아도 낯설어하고 두려워하던 내가 외롭고 고독한 노년이 되지 말라는 카톡의 잠언에 감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을 사로잡는 글에 감동했다가 늘 생각하는 것이, 이토록 일일이 옳고 소중한 사실을 사람들은 왜 이 나이가 되어서야 깨닫는 것이며 이 많은 훈계가 될 말들은 또 어떻게 다 지키며 살아란 말인가 하는 것이다.
옳은 말임에도 공연히 가탈을 부리고 싶은 것이다. 이 나이가 되기까지도 눈만 뜨면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이었는데 아직도 부족하냐는 트집이다. 그러해야 노년이 평안하고 외롭지 않다고 훈계하기보다 두렵고 외로울 때는 이런저런 방법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일흔도 살아볼 만한 나이라며 등을 토닥거리듯 주는 용기 같은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더러 미숙했고 더러는 넘쳤었고 더러는 보기 좋았던, 내가 살아온 예순아홉 해였다. 사람답게 사는 일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쓴 세월이었지만 삶의 갈피마다 묻힌 흠결은 때로 발 앞에 불거진 돌부리처럼 날 난감하게 한다. 그러했음에도 이러하거늘 지금부터 또 이러이러하게 살아라고 가르치니, 그래야지 내 노년이 외롭지 않고 평안하다니 따라 살 일이 걱정인 것이다.
나는 그냥, 부족한 대로 넘치면 넘치는 대로 이대로 살란다, 남에게 폐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리고 내 마음이 무엇에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무엇에 사로잡히면 사로잡히는 대로, 내가 하고 싶은 것 있으면 하고, 싫으면 하지 않으면서 너무나 자명할 사실, 더 늙을까 두려워도 하며 그렇게 사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이미 내 인생에게 너무 많이 재갈을 물렸었고 너무 많이 훈계했었고 너무 많은 잣대를 들이댔었고 너무 많은 타박을 했었다.
나는 이제 내 인생이 알아서 하도록, 평생 듣고 배우고 경험한 것 적용해 알아서 살아보도록 물린 재갈을 적당히 풀어주고 싶다. 주어진 시간을 즐기고 누릴 기회를 주고 싶은 것이다. 이는 어쩌면 내가 다가가기를 두려워하는 그 나이, 그리고 그 이후의 나이를 그러함에도 믿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평화로웠고 때로는 가혹했고 때로는 울게 했고 때로는 웃게 한 근 칠십 평생의 시간이 장난으로 내 삶을 지나갔겠는가? 내 삶을 가로지른 온갖 것을 나는 허투루 경험했겠는가? 그렇다면, 내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지금까지 보고 듣고 배운 것을 적용하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날 믿고 맡겨보고 싶은 것이다, 어떻게 펼쳐질지 몰라서 더 두려운 노년의 내 삶의 무게를. 내가 날 믿지 못하면 누가 믿어 주겠는가? 아무려면 앞으로의 삶에서 이전 삶에서 만든 만큼의 오류야 범하겠는가?
다만 나의 육십 대와는 잘 헤어지고 싶다, 만져 보고 안아도 보고 쓰다듬어도 보며 매일 이별의 식을 치르며.
그리고 칠십 대, 조금 겁먹게 하고 낯설기도 할 그 일흔은 내게 와 주어 고마우므로 정중히 맞은 후 잘 사귀려고 한다, 내 인생에 만날 마지막 연인이듯이.
매일 연인 만나듯 일흔의 하루하루를 맞는다면 그 나이도 살아볼 만하지 않겠는가?
사실 살아볼 만하지 않은 삶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반갑게 맞아 다정하게 살아보려고 한다.
카톡의 잠언처럼
순간의 시간을 뜨겁게 사랑하며 살아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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