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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공격목표는 총독부·동양척식... 일제 수탈기관들
의열단 창단과 구국투쟁 <2>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Jul 28 2022 09:41 AM
제1차 암살파괴 계획
약산이 영도하는 의열단 제1차 암살파괴 운동은 1920년 3월부터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선택한 목표는 적(일제)의 정치기관인 조선총독부, 적의 경제적 약탈기관인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은행, 적의 선전기관인 매일신보 등 파괴공작이고 암살의 대상은 조선총독 이하 여러 고관이다.
▲ 조선 총독부(왼쪽)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일제의 약탈기관들은 의열단의 주요 파괴 타깃이 되었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10일 만주 길림에서 창단하여 1929 년 12월 2일 상해에서 해체선언을 할 때까지 만 10년, 결코 길지 않은 기간 동안이지만 우리 독립운동사상 유례없는 찬연한 공적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1925년 12월까지의 만 6년간이 전성기였다.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의열단은 군대 조직이 아니니 만큼 많은 인원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다만 가장 필요한 것은 무기였는데 그 중에서도 폭탄과 권총이 제일 필요했다. 그러나 이렇게 폭탄이 귀한 터에 왜적에게 던진 폭탄이 불발일 경우가 많아 참으로 애석한 때가 많았다.
▲ 1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왼쪽)와 2대 하세가와 요시미치.
1919년 12월 하순 김원봉은 이종암·곽재기·이성우 등 과 함께 상해로 가서 무기를 구해오기로 하고 길림을 떠났다. 상해로 간 그들은 프랑스 조계로 임시정부를 찾아 가 백방으로 활동한 끝에 폭탄 세 개와 탄피제조기 및 약품 등을 입수해 다음해 3월초 길림으로 돌아왔다.
우선 입수한 폭탄은 국내에 들여보내기로 하고 중국우편국을 통해 안동현 중국세관에 있는 영국인 포인 앞으로 소포우편으로 탁송했다. 그리고 곽재기가 뒤따라 상해에서 기선으로 대련(大連)에 상륙, 기차로 안동현에 와서 상해에서 가지고 온 임시정부 외교차장 장건상(張建相)의 서한을 포인에게 보이고 문제의 소포를 찾았다. 그리하여 의열단의 연락기관으로 미리 정해 둔 안동현 원보상회 이병철을 통해 밀양의 김병환(金鉼煥)에게로 보냈다. 김병환은 밀양청년회 회장이며 또 미곡상을 하고 있는 동지였다. 그는 폭탄을 수수 20가마니 속에 갈라 넣어서 안동현 역전에 있는 운송점신의 공사로 하여금 보내도록 했다. 그러는 한편 두 달 동안 김원봉과 이종암은 임정 별동대 ‘구국모험단’ 단장 김성근(金聲近)의 집에 유숙하면서 김성근한테서 폭탄제조법을 배우기도 했다. 그때 김성근은 한창 폭탄을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김성근을 대동하고 이성우와 함께 탄피제조기와 약품 등도 가지고 모두 만주 길림으로 돌아왔다.
의열단 전단원은 길림성 밖에서 실탄장치법 및 제약법 등을 2주간에 걸쳐 김성근한테서 배웠다. 그리고 단원들이 직접 만든 것을 폭발시험까지 해보았다. 그래서 자신이 생긴 단원들은 의기충천해서 일거에 서울로 들어가 총독부를 비롯해 왜적의 각종 기관들을 무찔러버릴 기세였다. 그들은 이미 죽음을 초월하여 두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큰 일은 한때의 혈기로만 되는 것이 아니었다. 큰 일일수록 신중한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 미숙한 기술로 만든 몇 개의 폭탄을 가지고서 큰 일을 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 많은 무기가 있어야만 했다.
우선 부서를 정해서 연구를 하고 준비도 하며 한편 더 많은 무기도 사들여야만 했다. 모든 일을 치밀하게 그리 고 침착하게 작전을 꾸며야 했다.
단원들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한 끝에 무기 구입을 위해서 김원봉·곽재기·이성우가 다시 상해로 가고 그후 다른 단원들을 뒤따라 입국하기로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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