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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자 국치일
강신봉 온주한인시니어대학장
-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editorial@koreatimes.net)
- Aug 31 2022 04:49 PM
참, 이상하다! 지금 대한민국은 참 잘 살고 똑똑하고 멋쟁이 나라가 되었다고 입이 닳도록 자화자찬하는 시대가 되였는데, 역사를 지켜 나가는 모양새를 보면 어딘가 엉성한 건지 좀 모자라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면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엇이 이상한가? 한 번 따져보자. 우선 8월의 역사를 더듬어보자. 8월에는 3번 역사적인 날이 있다. 모두 대단히 중요한 날이다.
(1) 1945년 8월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된 광복절이다. 기쁜 날이라고 야단법석 기념을 하고 각종 행사를 한다. 그렇다. 기쁜 것은 맞다. 그런데 그 날은 기쁘기는 하지만 우리 민족이 수고해서 얻어진 날은 아니다. 미국의 원자탄 두 방을 맞고 일본이 무조건 항복해서, 어쩌면 날벼락으로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기쁜 날이다. 역사적인 차원에서 뭘 그리 뻑적지근하게 기념해야 할 가치가 있단 말인가? 좀 웃기는 일 같다.
(2)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된 날이다. 일컬으면 건국절이다. 그런데 이날은 새카맣게 까먹은 건지, 아니면 대한민국을 보기 싫어하고 북쪽 김씨 족속을 추종하는 자들의 농간에 놀아나서 그리 된 것인지 알 수 없이 완전히 망각되어 버린 날이다. 분명, 이날은 대한민국의 생일인데 미역국 한 그릇 대접하는 이가 없으니 참 이상하지 아니한가? 왜정 36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당하였고, 얼마나 많은 동포들이 반만년 살아온 고향을 버리고 만주로, 연해주로 유랑생활을 했으며, 얼마나 많은 애국지사들이 자기 목숨 내던지고 조국을 찾으려 희생의 제물이 되었나! 그 아픔과 눈물을 이기고 일으킨 대한민국, 얼마나 가치가 있는 역사인가? 그런데 왜 대한민국의 생일, 그날을 기념하지 않는가? 그런 국민들이 지금 대한민국은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고, 소리 높여 자화자찬하면서 자랑스럽게 살아가는 세상인데 지금 나라 꼴은 '생일 없는 소년'이 되어 있지 아니한가? 이것이 이상하지 아니한가? 이 세상에 생일 없는 나라가 어디 있는가? 캐나다는 7월1일, 미국은 7월4일, 하물며 북한은 9월9일…대한민국의 생일은 분명, 1948년 8월15일인데 아무도 기념하지 않는 이유가 과연 무었인가? 묻고 물어도 대답이 없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에는 이런 것을 생각해보지도 아니하였다.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쳤을 뿐이다. 그런데 캐나다에 이민와서 살다 보니 내 나라 내 조국의 생일은 왜 이렇게 불쌍하게 증발되었는가? 두고 두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직도 왜? 인가를 생각하고 있다. 누구에게 물어야 이 답을 얻을 수 있을까? 자기의 자랑스런 역사를 스스로 버리는 민족, 그런 나라가 오늘의 대한민국 아닌가?
(3) 1910년 8월29일, 일컬어 우리가 국치일이라고 말하는 날이다. 일본에게 나라를 넘겨준 날이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너무 억울하다고 발버둥 한 번도 치지 않고, 반만년 역사를 고스란히 종식하고, 통째로 나라를 넘겨준 날이다. 국권을 빼앗겼지만 뭐 그리 크게 반항하지도, 통곡하지도 않았다. 그저 역사가 부끄러운 정도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 부끄러움마저도 다 잊어 버렸다. 대한민국 국민 중 이 부끄러운 날을 기억하는 국민이 몇이나 될까? 참으로 이상하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했는데 과연 이렇게 역사를 잊어버려도 되는 것인가? 역사를 잊어버리니 우리 민족에게 미래가 없을 것이란 뜻이 된다. 그저 똑똑한 체하고 입바른 소리는 잘하면서 지킬 줄은 모른다.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그 '잊어버림'이 이상하다. 세계에서 IQ 일등이라는 민족이 왜 그리 쉽게 자기의 거룩한 역사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일가? 그것이 이상한 일 아닌가? 절대로, 절대로 안될 일이다.
8.29 경술국치를 조금만 공부해 보자.
한일병합조약
1910년 8월22일에 조인되어 8월29일 발효된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이루어진 조약이다.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합법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켰으며, 조약의 공포는 8월29일에 이루어져 이날 일본의 천황이 한국의 국호를 고쳐 조선이라 칭하는 건과 한국 병합에 관한 조서를 공포함으로써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국권피탈國權被奪, 경술국치庚戌國恥 등으로 호칭하기도 한다.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일본에 양도하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고, 정미7조약으로 군대 해산을 당하고, 기유각서로 사법권과 감옥사무까지 잃은 대한제국은 결국 일본 제국에 강제 병합되었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다.
일본의 한일병탄 방침
일본 제국은 병탄의 방침을 1909년 7월6일 내각회의에서 이미 확정해 놓고 있던 상태였다. 다만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국제적 명분을 얻는 일만 남겨두었다. 일본 제국은 일진회 고문 스기야마 시게마루에게 ‘병합청원’의 시나리오를 준비시키고 있었다. 조선의 송병준은 이에 앞서 1909년 2월 일본 제국으로 건너가 매국흥정을 벌였다. 여러 차례 이토 히로부미에게 ‘합병’을 역설한 바 있었으나 일본 제국 측의 병탄 계획 때문에 일이 늦어지게 되자 직접 일본 제국으로 건너가서 가쓰라 다로 총리 등 일본 제국의 조야 정객들을 상대로 ‘합병’을 흥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편 이완용은 송병준의 이런 활동을 눈치채고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와 조선 병탄 문제의 교섭에 나섰다. 이완용은 일본어를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일본 제국에 유학했던 이인직을 심복 비서로 삼아 미도리와 교섭에 나서도록 했다. 이 무렵 통감부에서는 이완용 내각을 와해시키고 그와 대립 관계에 있던 송병준으로 하여금 내각을 구성하도록 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일본 충성 경쟁을 부추기는 전술이었다.
송병준 내각이 성립된다면 보복당할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합방의 주역을 빼앗길 것을 두려워한 이완용은 “현 내각이 붕괴되어도 그보다 더 친일적인 내각이 나올 수 없다”면서 자기 휘하의 내각이 조선 합방 조약을 맺을 수 있음을 자진해서 통감부에 알렸다.
이런 시나리오를 연출하면서 일본 제국은 점차 ‘병탄’의 시기가 무르익어가고 있다고 판단, 시게마루를 내세우고 이용구·송병준 등을 이용하여 ‘합방청원서’를 만들도록 부추겼다.
또한 일본 제국은 조약이 누출되어 조약에 반대하는 소요 등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나남·청진·함흥·대구 등에 주둔한 일본군을 밤을 틈타 서울로 이동시켰다. 조약 체결일인 8월22일 응원병력과 용산에 주둔한 제2사단이 경비를 섰다.
창덕궁 흥복헌으로 불려온 대신들 중 학부대신 이용직은 조약을 반대하다 쫓겨났고, 이후 이른바 경술국적이라고 불리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시종원경 윤덕영, 궁내부대신 민병석, 탁지부대신 고영희,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이병무, 승녕부총관 조민희 8명 친일파 대신은 조약 체결에 찬성, 협조하였다. 이 8명은 한일 병탄 조약 체결 이후 공을 인정받아 조선귀족 작위를 수여받았다.
한일병합조약 전문
한국 황제 폐하와 일본국 황제 폐하는 두 나라 사이의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시키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자고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면 한국을 일본국에 병합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확신하고 이에 두 나라 사이에 합병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하여 한국 황제 폐하는 내각 총리 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을, 일본 황제 폐하는 통감(統監)인 자작(子爵) 사내정의(寺內正毅,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각각 그 전권 위원(全權委員)으로 임명하는 동시에 위의 전권 위원들이 공동으로 협의하여 아래에 적은 모든 조항들을 협정하게 한다.
1.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함.
2.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조항에 기재된 양여를 수락하고,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락함.
3. 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들의 황후, 황비 및 후손들로 하여금 각기 지위를 응하여 적당한 존칭, 위신과 명예를 누리게 하는 동시에 이것을 유지하는데 충분한 세비를 공급함을 약속함.
4.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 조항 이외에 한국황족 및 후손에 대해 상당한 명예와 대우를 누리게 하고, 또 이를 유지하기에 필요한 자금을 공여함을 약속함.
5. 일본국 황제 폐하는 공로가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별히 표창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대하여 영예 작위를 주는 동시에 은금(恩金)을 줌.
6. 일본국 정부는 앞에 기록된 병합의 결과로 완전히 한국의 시정을 위임하여 해당 지역에 시행할 법규를 준수하는 한국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하여 전적인 보호를 제공하고 또 그 복리의 증진을 도모함.
7. 일본국 정부는 성의충실히 새 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 적당한 자금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 관리에 등용함.
본 조약은 한국 황제 폐하와 일본 황제 폐하의 재가를 받은 것이므로 공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함.
위 증거로 삼아 양 전권위원은 본 조약에 기명 조인함.
융희 4년 8월22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메이지 43년 8월22일 통감 자작 데라우치 마사타케
오늘 공부는 이만하겠습니다. 이렇게 확실하게, 부끄럽게, 아니 멍청하게 나라를 넘겨준 일, 그걸 잊어야 합니까? 어찌 잊을 수가 있습니까?
강신봉 온주한인시니어대학장
www.koreatimes.net/오피니언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editorial@koreatimes.net)
전체 댓글
JaeYoo ( yoojbum**@gmail.com )
Sep, 02, 04:52 PM대한민국 건국은 상해임시정부때부터 입니다. 그래서 1948년에 건국한게 아니지요.1948을 건국일로 하면 상해임시정부를 부정하는것이 되는데 애국지사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상해임시정부는 부정하는 모순은 뭡니까? 대중앞에 글을 쓸려면 좀 알아보고 현대사도 좀 공부해보고 글을 쓰십쇼. 역사를 카톡으로 배우시니 이런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brown sugar ( klee4**@hotmail.com )
Sep, 02, 06:01 PM임시정부는 미래에 세워질 진정한 정부에 앞서 임시로 세운 정부란 뜻이다. 당시 임정 요인들도 그런 뜻을 담아 임시정부라는 이름을 쓴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임시'라는 명칭을 붙일 이유가 어디 있는가? 게다가 당시 임시정부는 상해 보다 조금 먼저 블라디보스톡에서 세워졌고 한성임시정부 등 여러 개가 존재했다. 시기적으로 조금 앞당기려고 임시정부 수립일을 건국일로 해야 할 필요는 없다. 임시는 어디까지나 임시일 뿐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대한민국 건국일은 1948년 8월 15일이지만 우리 한민족 국가의 건국일은 10월3일 개천절이다. 4355년 전에 건국된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국가라는 자부심을 갖자.
꼰대졸라시러 ( cathie.che**@gmail.com )
Sep, 07, 11:14 PM국뽕 같은 소리 하시고 있네. 거, 되도 않는 4355년 같은 소리 맙시다. 객관적 증거도 없는 기원전 2333년 개국설을 진짜 처럼 믿는 아직도 있는거요? 자유당 시절에 초등학교를 들어가셨나? 그리고 세계에서 오래되긴 뭐가 제일 오래되었다는 말인지. 인터넷에서 흔하게 사진으로 볼 수 있는 기자 대피라미드 만들어진게 기원전 2480년대요. 어디 북조선 빨갱이들이 말하는 평양 단군유적을 믿으란 말인지. 고고학적으로 인증된 유적도 없는 전설을 가지고 뻥 좀 그만 치자. 국뽕도 자주맞으면 뽕이다. 뽕! 마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