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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19세 소년 최수봉, 판사에게 일갈
약산 김원봉의 의열단 창단과 구국투쟁 <10>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Sep 22 2022 09:11 AM
밀양경찰서 폭탄사건 <하> 이종암 등 탈출 단원들 서울로 이동 서울지법 선고공판에 방청자로 참석
부산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재판장 아오야마는 최수봉 열 사를 보고, “부산사건의 박재혁이나 남대문사건의 강우규를 너는 알고 있겠지? 모두 사형선고를 받지 않았느냐. 너는 죽 을 줄 알면서 왜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고 물었다. 최수봉 열사는 “내 그때 목적을 달성치 못했기 때문에 죽으려고 하지 않았느냐? 너희들의 그 꼬락서니를 보지 않으려고 죽으 려 했는데 왜 죽지도 못하게 하고 이 야단이냐?” 고 대들었다. 최수봉은 20세 즉 만 19세 나이에 사형이 선고되었는데 결혼도 하지 않은 미혼청년이었다.
▲ 국가보훈처의 최수봉 의사 설명 포스터.
사건은 최수봉에 그치지 않았다. 밀양경찰서 폭파사건의 관련자 수는 10여 명이 넘었지만 밀양경찰서 폭파사건 관련자 중에는 체포되지 않은 단원도 있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이종암(양건호)이 었다. 이종암이 일찌기 김해 어느 곳에 잠복해 있을 때의 이야기다. 산밑에 있는 외딴집에 동지 몇 사람이 같이 숨어 있었다. 조반을 먹고 앉아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종암이 일어나 두루마기를 입었다. (이때는 양복은 드물었고 모두 한복을 입고 다닐 때다.) 같이 있던 동지 두 사람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이 사람 어디 갈 텐가? 두루마 기는 왜 입어?” 했다. 그때 종암은 “뒷간에 가려고 한 다”고 대답했다. “이 사람아 뒷간에 가는데 두루마기는 왜 입어?”
“사람의 일을 알 수 있어?” 하면서 천연스럽게 두루마기 를 입고 모자까지 쓰고 나갔다. 두 동지는 소리내어 웃었 다. 종암은 뒷간 문밖에 두루마기와 모자를 벗어 두고 뒤 를 보고 있었다. 그때 마침 왜경이 냄새를 맡고 수색중에 그 집을 습격해 왔다. 다른 두 동지는 꼼짝 못하고 잡혔 다. 종암은 뒷간에서 왁자지껄하는 소리를 듣고 기미를 챘다. 얼른 두루마기를 입고 모자를 쓰고 반대방향을 향 해서 천천히 걸어갔다.
촌농가의 뒷간이라는 것은 대개가 그렇지만 이 집의 뒷간도 멀리 뚝 떨어진 밭 가운데 나무더미를 산같이 쌓아 놓고 그 뒤에 거적대기를 둘러 만든 것이었다. 그런 곳에 뒷간이 있을 줄은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두루마기에 모자까지 쓰고 저편을 향해 걸어가고 있으니 왜경이 그 뒷모습을 보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이종암인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에 두루마기와 모자가 방안에 있었더라면 저것은 누구의 것이냐고 물었을 것이고 이종암은 결국 붙잡혔을 것이다. 독립투사들은 언 제나 조심을 해야 했다. 앉았다 일어설 때에도 담배꽁초 하나 종이쪽지 하나도 떨어뜨리지 않는 것이 생활의 신조로 되어 있었다. 언제나 뒷자리는 흔적도 없이 깨끗이 했다. 밀양에서 도피한 이종암 등 의열단원들은 은신처를 서울로 옮겼다. 지난해 검거 당한 첫번째 총공격 때의 동지들 재판이 서울지방법원에서 있을 것이라는 보도가 있어 이종암·김상윤·서상락 등 단원들은 서울로 은신처를 옮긴 것이다.
6월 22일 (21년) 선고 날이었다. 의열단원들은 일찌기 법정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이윽고 용수를 쓴 동지들이 퍼런 죄수복을 입고 차례로 들어왔다. 본래 파렴 치범들과는 달리 이런 사람들은 의기양양해서 사방을 둘 러보며 아는 사람의 얼굴을 찾는 것이 보통이었다. 단원들은 태연히 앉아 용수를 벗은 동지들과 일일이 눈인 사를 했다. 모두가 놀랐다. 그 당시 피고인으로 출정한 신철휴옹은 후일 이렇게 말하였다. “대담무쌍하지요. 우리 일행이 재판받을 때 방청석에 태연히 앉아 일일이 목례를 하지 않겠소.”
의열단원이 얼마나 대담하고 용감했던가의 일면을 보여 주는 예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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