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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

소설가 김외숙


  • 캐나다 한국일보 (editorial@koreatimes.net)
  • Sep 26 2022 09:45 AM


지난주에 반가운 이메일 하나를 받았다.

내 모교가 120주년 기념행사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모교는 미국에서 간 선교사에 의해 일제 시대에 설립된 중고등학교로,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교육하는 여학교이다.

시골서 초등학교를 마친 후 대구 청라언덕 위의 그 학교로 유학을 가는 것은 내가 초등학교에 들기 전부터 이미 부모님에 의해 정해진 사실이었는데, 눈만 뜨면 동생들과 어울려 노느라 숙제도 제대로 해 본 적 없던 나는, 입학시험에서 떨어졌다.

부모님께서는 재수를 시켜 맏딸인 나를 기어코 그 학교에 보내셨다.

양조장을 운영하시던 무종교의 부모님이 철저히 기독교 교육을 시키는 그 학교에 재수를 시켜가면서까지 날 보내신 이유는 종교 때문은 분명 아니었을 같고, 아마도 일제 때 대구에서 학교에 다니신 아버지가 당시의 내 선배들의 모습을 좋게 여기신 때문이 아닐까 미루어 짐작한다.

이번 모교의 방문은 내가 첫 책을 출간한 후 책과 함께 한 이후 처음인데

그사이에 11권의 책을 더 출간하였으니 모교도 나도 그만큼 나이의 무게를 더한 것이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갑자기 정하고 갑자기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 나니 마음은 더 앞질러 이미 청라언덕을 오르고, 느릿느릿 그 언덕을 오르면서 나는, 모교가 알게 모르게 내 인생길에 개입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중고등학교 6년의 학교생활에서 나는 ‘예수’라는 분을 만나면서 종교란 것을 갖게 되었다. 재수를 시켜가면서까지 맏딸을 그 학교에서 공부하게 하신 부모님의 뜻은 결코 아니었겠지만 평생 목회의 길밖에 모른 외국인 짝을 만나기도 했으니 그것은 내가 ‘예수’란 분을 알았기에 가능했던, 실로 파격적인 인생길의 변화이다.

지금에야 생각해 보니 작가가 된 동기 또한 내가 그 학교에서 공부한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중학생이었던 어느 해에 학교에서는 전교생을 대상으로 한 표어 응모를 한 적 있었다. 표어는 주의나 주장을 간결하게 나타낸 어구로, 그즈음 우리나라에서는 도시나 지방 곳곳 전신주 또는 벽에 ‘자나 깨나 불조심’이라던가 ‘슬그머니 버린 휴지 슬그머니 버린 양심’ 같은 표어들을 쉽게 볼 수 있었는데 나의 응모작품은 “아름다운 우리 말 고운 말로 표현하자”였다.

그 응모에서 나는 상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진부한 표현에다 그리 강렬하지도 않은 의미여서 별 호소력도 없는 것 같은데 그러함에도 상을 받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여학교의 학생들로 하여금 좀 더 순화된 언어를 쓰게 하려는 학교의 의도와 내 표어의 의미가 서로 맞았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한다.

작가가 된 후 작품을 쓸 때 ‘아름다운 우리 말을 고운 말로 표현’해야 한다는 생각은 솔직히 한 번도 한 적 없다. 다만 이야기를 가장 잘 드러낼 문장과 그것에 합당할 단어 찾는 일에 깊게 고심했고 그것은 곧 우리의 언어를 제대로 쓰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으며 작가의 의무다.

이처럼 짧은 글귀 하나가 세월에 묻혀 천천히 발아하고 뿌리 내리고 열매 맺어 내 삶을

언어와 불가분의 관계로 만들어버렸으니 그것은 모교로 인해 ‘예수’를 알게 된 사실만큼이나 내 인생에 일어난 대단한 사건이다.

이제 두 주 후면 나는 서울에 가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책을 낸 후 스무다섯 해 만에 내 작품과 함께 다시 청라언덕 위의 그 여학교를 방문한다.

모교를 졸업한 지 50년, 작가가 된 지 31년 째, ‘아름다운 우리 말 고운 말로 표현하자’란 글귀를 앞에 두고 고심했을 볼이 곱던 단발머리 소녀는 이제 잿빛 머리카락의 노년이 되어 ‘인생은 무엇이며 사랑은 무엇인가?’, 라며 끊임없이 내 작품 속에서 묻는다. 시대를 초월해 추구하는 그 큰 주제를 두고 나는 내가 작가인 한 끌어안고 파헤쳐 볼 것이고 그것의 발단은 ‘아름다운 우리말 고운 말로 표현하자’란, 지극히 간결하던 어귀에 가 닿는다. 이 얼마나 흥미로운 인과 연의 관계인가?

나는 무심코 그러했지만 큰 섭리 안에서 그것은 분명 필연이었으니 평생 문장 만드는 일로 살라는, 신께서 개입하셨을 팔자일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가, 내가 가장 행복할, 가장 희열을 느낄, 그래서 결코 손에서 놓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며 사는 일이란.

오래 누리고 싶은 팔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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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한국일보 (editorial@koreatime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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