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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음악인들
손영호(칼럼니스트·국제펜 회원)
-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editorial@koreatimes.net)
- Oct 18 2022 11:38 AM
■ 작년 9월에 그리스의 거장 작곡가인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Theodorakis, 1925~2021)가 향년 96세로 타계했다. 그는 유명한 영화 '죽어도 좋아(Phaedra·1962)', '그리스인 조르바(Zorba the Greek·1964)' 등의 음악감독이었다.
‘죽어도 좋아’는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시인 중 한 명인 에우리피데스(Euripides)의 희곡 ‘히폴리토스(Hippolytos)’를 현대판으로 각색한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의 키워드는 근친상간(近親相姦). 결국 그리스 선박왕 타노스(라프 발로네)의 전처 아들 알렉시스(앤서니 퍼킨스)와 새 어머니 페드라(멜리나 메르쿠리) 둘 다 자살로 끝을 맺는다.
특히 마지막에 앤서니 퍼킨스가 스포츠카를 몰고 해안도로를 질주하는 스피드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Toccata and Fugue), D단조’가 대조되어 긴박감이 흐르는데, ‘Goodbye John Sebastian’이라며 광기어린 절규 속에 “페드라, 페드라~”를 외치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 이보다 2년 앞선 1960년 줄스 다신 감독의 또 다른 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Never on Sunday)’로 칸영화제 최우수 여우주연상 및 아카데미 음악상을 거머쥐면서 일약 유명해진 그리스 명배우 멜리나 메르쿠리(Melina Mercouri·1920~1994)는 가수로도 활동했다. 영화 ‘페드라’에서도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가 작곡한 2곡을 불렀는데 오늘날에도 보석 같은 노래이다.
한 곡은 그리스 전통악기인 부주키와 기타 선율에 허스키하면서도 그윽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구슬프고 애절한 느낌의 ‘페드라 사랑의 테마’ - ‘Feggari mou, Agapi mou(My Star, My Moon)’라는 노래다. 이 노래는 1965년 그리스 테살로니카 출신 가수 마리넬라(Marinella)가 리바이벌하여 크게 히트한 곡이기도 하다.
또 다른 곡은 영화의 전반부에서 앤서니 퍼킨스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부르는 ‘당신께 마실 장미향수를 주었네(I Gave You Rose-Water to Drink)’인데, 이 곡이 흐르는 장면 또한 잊지 못할 명장면 중 하나다. 원곡의 가사는 “…나는 당신께 마실 장미향수를 주었지만 당신은 나에게 독약을 주었네”인데, 진작 영화 속에서는 ‘장미향수’가 아닌 ‘젖과 꿀’을 준 것으로 멜리나는 말한다. 이미 영화의 앞 부분에서 이 노래를 통해 비극적인 종말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 멜리나 메르쿠리는 1967~74년 그리스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투쟁했고, 1981년부터 8년여 문화부장관 재임 시절에는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파르테논 신전 대리석을 아테네로 반환하려고 노력하는 등 억척같은 철의 여인이었다. 개성 있는 배우로, 가수로, 정치가로 그리고 독재에 항거하는 투사로 파란만장한 삶을 산 메르쿠리. 그가 1994년 73세로 뉴욕에서 폐암으로 운명하는 순간을 남편인 줄스 다신 감독(2008년 96세로 사망)이 마지막까지 지켜보았고, 그리스 정부는 국장(國葬)으로 장례를 치러 최국빈 예우를 했다.
지금 재정위기에 처해 있는 그리스. 멜리나는 1973년에 이미 경고했다. “깨어라, 아테네여”라고. 그리스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 ‘Athenes, ma ville(Athenes, My Town)’이라는 불어로 부른 노래에서…. 멜리나는 계속해서 말한다. “내 고향이여, 텅 빈 골목길에 귀기울여 보라. 아이들이 부르는 음성이 들릴진대…. 깨어라, 깨어 있으라, 아테네여!”
■ 위의 ‘장미향수’라는 곡은 그리스 태생의 세계적인 메조 소프라노 아그네스 발차(Agnes Baltsa)의 1986년 앨범 ‘내 조국이 가르쳐준 노래’에 실릴 만큼 널리 알려진 곡이다. 이 앨범에 테오도라키스의 또 다른 곡인 ‘5월의 어느 날(Mera Mayou)’이 들어있다. 이 노래에 관한 한 나는 발차보다 나나 무스쿠리(Nana Mouskouri)를 더 좋아한다. 1984년 그리스 고대 야외 음악당인 헤로드 아티쿠스에서 공연했을 때 이 애절한 노래를 부르면서 스스로 감정에 북받쳐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검정뿔테 안경 너머로 흘리던 눈물을 잊을 수가 없다. 마치 맑은 옹달샘에서 흘러내리는 청순함과 아름다움이 우리를 정화시키는 듯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조국 얘기가 났으니 얘기지만, 나나 무스쿠리도 발차보다 19년 전인 1967년 그리스에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프랑스에서 망명 아닌 망명생활을 시작했고, 곧바로 그리스 음악만으로 꾸민 ‘내 조국의 노래(Chants de Mon Pays)’라는 음반을 냈다. 거기에 삽입된 그리스어로 부른 원곡을 우리말로 번안하여 부른 것이 트윈폴리오(송창식·윤형주)의 ‘하얀 손수건(Me T’aspro Mou Mantili)’이다. 그리스의 유명 작곡가이자 ‘일요일은 참으세요’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하고, 그녀를 정상급 가수로 키워준 마노스 하지다키스(Manos Hadjidakis·1925~1994)가 작곡한 곡이다.
“헤어지자 보내 온 그녀의 편지 속에 곱게 접어 함께 부친 하얀 손수건. 고향을 떠나 올 때 언덕에 홀로 서서 눈물로 흔들어 주던 하얀 손수건…” 1970~80년대에 청바지, 통기타 그리고 생맥주로 상징되는 이른바 ‘청년문화’가 유행할 때 우리의 정서와도 딱 맞아떨어진 이 곡은 젊은이들에겐 가뭄에 한줄기 단비와도 같은 위안이자 역설이었다.
■ 위의 아그네스 발차의 앨범에 수록된 11개 가곡들은 모두 터키나 독일의 침략을 받았을 때 그리스 시민들이 읊은 저항의 노래라고 한다. 하지만 이 가곡집에서는 흥분이나 분노의 직접적 과시는 전혀 드러나지 않고 서민의 자연스런 마음의 미묘한 뉘앙스가 소박하게 그려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 가락은 조금도 위화감 없이 처음 듣는 우리의 감동에 깊이 파고들어 무엇인가 애틋함을 감지하게 되는 지도 모르겠다.
이 가곡집에 테오도라키스 작곡의 '기차는 8시에 떠나네(The train leaves at 8)'가 수록돼 있는데, 애수 어린 선율 속에 겉으로는 연인의 이별을 그리면서 민주화 운동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곡이다. 그리스의 가곡들은 우리와 비슷한 서정이 어려 있고, 마치 어렸을 때 걸었던 시골길을 다시 걷고 있는 듯한 낯익음이 있다. 그리고 마치 시골집 툇마루에 걸터앉으면 한여름 나무숲 사이로 서성이는 서늘한 바람소리 속에서 숱한 노래와 이야기가 들려오는 듯한 그런 분위기이다.
그런데 우리 가수들이 번안하여 부르면 훨씬 따뜻하고 그리운 애수가 스며드는 것 같다. ‘하얀 손수건’이 그렇고 조수미가 부른 ‘기차는 8시에 떠나네’도 그렇다. 단순히 가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들으면 원곡보다 더 애절하다. “아름다움은 슬픔이 찾아가는 마지막 피난처”라고 누가 말했던가. 어쩌면 아리랑 같은 한(恨)과 그를 승화시킨 살풀이가 우리의 숨결이 되고 속눈물이 된 까닭일까.
■ 암울했던 그리스 현대사의 한 가운데를 지나오며 그리스 음악의 대명사로 그 이름을 깊이 각인시켜온 인물이 미키스 테오도라키스다. 조국을 떠나 있을 때에도 그는 부주키의 울림이 담긴 렘베티카 음악의 전통에 특유의 서정성을 부여하며 시대의 아픔과 조국의 슬픔을 담아냈다.
테오도라키스는 칠레의 197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1904~1973)의 서사시를 오라토리오로 표현한 '민중을 위한 노래(Canto General)'와 같은 대작을 발표하기도 했다. 테오도라키스의 음악적 동지인 가수 마리아 파란투리(Maria Farantouri)가 이 곡을 부르기도 했다.
운명을 달리 한 그리스의 거장 음악가 테오도라키스의 영면을 빈다. 하지만 그가 작곡한 그리스의 음악은 영원하리라.
손영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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