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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과 조선인도 구분 못하나" 검문 순경에 되려 꾸중
김원봉의 의열단 창단과 구국투쟁 <16>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Nov 13 2022 07:46 PM
조선총독부 폭탄사건 <6·끝> 거사 후 무사귀환... 동지들과 축배들다
김익상은 그 틈에 끼어 힘' 안 들이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로부터 15분쯤 지난 후 그는 황금정 (지금의 을지로 4가) 전차 길 위에 서 있었다. 이곳은 교통이 번잡한 네거리로 전차노선이 3면으로 갈려 있었다. 동으로 가면 왕십리이고 북으로 향하면 창경원이고 서 쪽으로 가면 곧 서대문이다. 그는 우선 서대문행을 잡아타고 종점까지 가서 내렸다. 다음에 온 차를 타고 다시 을지로 4가로 돌아온 그는 이번에는 창경원 가는 차에 올라탔다.
창경원 앞에서 일단 차를 내린 그는 다시 다음 전차로 또 한번 을지로 4가까지 돌아와 그 근처 일인 상점에서 일 인 목수들이 입는 '한’이라 하는 등거리와 ‘모모히끼’ 라는 홀태 바지를 샀다. 그리고 이번에는 왕십리행 전차에 몸을 실었다. 그는 종점에 이르러 차를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서 서빙고 쪽으로 나갔다. 나루터 못 미쳐서 인가를 피해 그는 고샅길을 더듬어서 강변으로 나갔다. 음 력 8월 초열흘,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서늘한 기운이 느껴 져도 한낮에는 아직 남은 더위가 만만치 않다. 지극한 긴 장 가운데 반나절을 보낸 그는 이곳에서 남몰래 의복을 훌훌 벗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한동안 시원히 목욕을 한 뒤에 그는 새삼스럽게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보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강변으로 나와 굵직굵직한 돌을 몇개 골라 벗어 놓은 검정 양복 저고리와 흰 바지로 싸고 다시 끈으로 단단히 동여매었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강 깊은 곳으로 헤엄쳐 들어가서 그 곳에다 가라앉혀 버렸다.
바로 이때는 헌병과 경찰의 무리가 남산 일대를 철통같이 에워싸고 숲속과 골짜기 안까지 샅샅이 뒤지며 검정 양복 저고리에 흰 바지 입은 사람이면 이를 깡그리 잡아 내고 있을 무렵이었다. 김익상은 입었던 옷을 물속 깊이 감춘 뒤에 새로 산 ‘한’과 ‘모모히끼’로 일본 목수 차림을 한 다음 강변길을 따라 용산 쪽으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일본 목수로 변장을 한 그는 태연하게 용산 정거장에 이르러 평양 행 차표를 사가지고 경의선 열차에 몸을 실 어 드디어 서울을 떠났던 것이다.
이날 밤 평양에 도착한 김익상은 그곳 아는 친구의 집을 찾아 들어가 하룻밤을 편히 쉬고 이튿날 아침 다시 그곳을 떠나 신의주로 향하였다. 기차 안의 공기는 대단히 긴장되고 또 시끄러웠다. 승객들은 어제 사건이 게재된 신문을 돌려 보며 모두 놀라고 어이없어 하고 여러가지 억측을 하고 또 비평을 하였다. 김익상은 어느 일인 승객 옆으로 가서 그가 들고 있는 신문 호외를 빌었다. 어제 사건이 제법 소상하게 보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른바 범인에 대하여는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오려 했으나 문득 깜짝 놀라는 형상을 짓고 큰 소리로 외쳤다. “칙쇼! 후폐이 센징가 마다 곤나 고도 야따나. (빌어먹을! 불령선인이 또 이런 짓을 했구나.)”
'불령선인(不是鮮人)'이란 당시 왜적들이 조선의 애국자, 혁명 투사들을 욕하는 말이었다. 이때 철로 연변의 각 정거장은 물론이고 차 안에까지 수없이 많은 사복형사들 이 승객을 가장하고 들어와 있어 여행하는 모든 사람의 일거일동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자들은 애매한 사람 들에게만 의혹의 눈을 번뜩이고 일본 목수로 가장한 바로 이 사람이 자기들이 그처럼 찾고 있는 이번 사건의 장본인임을 끝내 알지 못했다.
신의주에서 김익상은 차를 내렸다. 그는 그때부터 걸어 서 국경을 넘으려는 것이었다. 국경에 깔려 있는 경계망 은 어느 때보다도 훨씬 삼엄하였다. 누구도 이곳을 그대 로는 지나가지 못했다. 그가 태연한 태도로 압록강 철교를 지나려 할 때 그곳을 지키고 있던 순경의 무리가 앞을 막아서며 물었다.
“웬 사람이오, 어디서 왔소?” 김익상은 한참동안 상대방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모양이 마치 일본경찰에게 그러한 심문을 받는 일은 정말 뜻밖이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얼른 대답을 않는 그를 수상히 생각하여 경찰이 다시 입을 열려 할 때 그는 사뭇 불쾌하다는 기색을 보이며 거의 시비조로 말하였다. “그대는 이곳 국경을 지키는 경관으로서 일본 신민과 조선인 하나 분간을 못 한단 말이요? 그래 가지고 어떻게 막중한 소임을 감당하겠소. 어제 서울에서는 대사 건이 일어났소. 좀 정신을 차리시오.” 순경은 얼굴을 붉히고 그에게 실례됨을 깊이 사과하였다. 그는 유유히 철교를 건너 마침내 국경을 넘었다.
그로부터 이틀 뒤 봉천과 천진 두 곳에 깔려 있는 비상선을 차례로 돌파하고 마침내 북경성 정양문(正陽門) 밖 약산 이하 동지들이 기다리고 있는 처소로 돌아오니 김익상이 이번 길에 오고 가고 한 일자가 모두 일주일 이내였다. 단원들은 모두 끌어안고 무사귀환을 기뻐하였다.
이 사건은 끝내 미궁에 들어간 채 그 뒤 7개월이 지나 상해 황포탄에 또 하나 큰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왜적은 그것이 의열단의 소행임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김익상이 무사히 돌아온 날 밤 북경시 정양 문밖 동지들의 숙소에서는 한잔 술로 축배를 들며 기뻐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김익상은 서울 시민에게, 아니 전국민에게 일 대 충격을 주고 교묘히 빠져 출국해 버렸으나 서울 시내는 공포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그날 김익상이 왜성대에서 빠져나간 후 에야 비로소 그 전기 공원이 범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왜적들은 그 전공의 차림이 검정 저고리에 흰 바지를 입었고 나이는 30가량이고 일어가 유창하다는 이 몇 가지 조건을 들고 전 시민을 들볶았다.
그 뿐만 아니라 저들이 평소에 주목하던 시민들은 무조건 잡아 가두었다. 하숙·여관·사가(私家) 할 것 없이 아닌 밤중에 샅샅이 뒤져서 조금만 수상하다고 보인 사람이면 불문곡직하고 잡아 가두었다. 이렇게 서울 장안이 발칵 뒤집혔다. 그래서 도리어 우리 민족에게는 일대 충격 사가 되었고 경종을 울리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의열단원인 이종암은 그해 12월까지 서울에 잠복해 있었다. 중동학교 야간부 학생 신분으로 하숙을 옮겨 가며 김익상 사건의 후문을 탐 지하고 있다가 압록강이 얼어붙은 다음에 검정 두루마기를 한 벌 지어 입고 빙판을 이용해 국경을 넘어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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