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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 "사람? 무기? 독립운동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금"
의열단 창단과 구국투쟁 <24>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Feb 26 2023 10:25 PM
김상옥 격전사건 <1> 청년시절부터 활약해 잔뼈 굵은 용사
1923년 1월12일 하오 8시경 서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이 있었다. 이 폭탄투척으로 경찰서를 크게 파괴하지는 못했으나 장소가 장소인 만큼 또 때가 때인 만큼 서울의 전시민 아니 전민족에게 굉장한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 일본경찰은 전혀 단 서도 잡지 못한 채 범인을 잡고자 눈에 불을 켜고 덤볐다. 조금이라도 수상쩍다 싶으면 마구 잡아다 구속하고 고문을 하며 범인 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의 범인을 잡으려다 엉뚱하게도 김상옥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서울에서 의열단원 김상옥 의사와 왜경 간에 마치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총격전을 벌여 왜경 수명이 사상하는 큰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 의열단원 김상옥 의사. 국가보훈처 홍보자료
이야기의 발단은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0년 미국 의원단이 서울을 방문하는 기회를 틈타 총독 사이또 (齋藤實)를 살해하려다 발각되어 많은 사람들이 체포·검거된 일이 있었다. 그때 김상옥도 같이 활동했으나 무사히 피해 해외로 망명했었다.
경찰은 종로경찰서 사건을 3년 전의 그 사람들의 소행으 로 짐작하고 그 당시의 관련자 다수를 잇달아 구속하고 조사하는 한편 김상옥의 소재도 추적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김상옥은 중국에서 돌아와 삼판통(三坂通一 지금의 후암동)에 사는 매제 고봉근(高奉根)의 집에 숨어 있었다.
본래 서울 태생으로 동대문 밖에 살고 있던 김상옥은 집이 가난해서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어려서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크리스찬으로 동대문교회에 다녔던 그는 청년시절부터 대한광복회에 들어가 활약한 용사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는 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태극기를 만들어 북한산 꼭대기에 갖다 꽃아 서울 시민을 놀라게 한 그런 적극 항일운동가였다. 그 도 해외로 망명해서 북경, 상해 등지에서 많은 독립운동 지사들을 만났다. 특히 북경에서 김원봉이나 이종암 등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한 후 더욱 애국 항일정신에 불탔다.
그는 독립운동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자금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사람도 있어야 하고 무기도 있어야 했지만 자금만 있으면 이런 문제는 큰 어려움 없이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것을 깨달은 그는 우선 자금부터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하여 국내에 잠입해 들어왔다. 올 때는 권총과 폭탄도 가지고 왔다. 압록강 얼음 위를 타고 12월 상순에 건너왔다. 건너와서는 수십 리를 걸어 동림역 (東林驛신의주에서 다섯번째의 정거장)에서 기차를 타고 오다가 서울 가까이 와서는 일산(一山)역에서 하차, 서울까지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동대문 밖 자기 집에 은신해 있다가 위험해 삼판통 매제 집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1월 17일 그는 총독 사이또가 동경으로 간다는 보도를 접하고 아무도 모르게 남대문역 (지금의 서울역)으 로 나갔다. 김상옥은 전에도 사이또를 죽이려다 실패하고 고생만 한 생각이 나서 이번에는 틀림없이, 그것도 나 혼 자서 해치우겠다고 결심하고 역까지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착오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와 쉬고 있는 참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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