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새둥지가 들려주는 이야기
김영수(수필가)
- 이로사 편집위원 (gm@koreatimes.net)
- Mar 29 2023 11:58 AM
4월 중순이 지나도록 세상은 무채색이었다. 봄이라 부르기도 어색할 만큼 춥고 을씨년스러운 4월. 연신 마른풀을 물고 오는 자그마한 새 한 마리를 발견한 것은 그무렵이었다. 뒷마당 기둥 선반에 올려놓은 작은 석고 화분에 로빈이 집을 짓기 시작한 거였다. 지푸라기를 대여섯 개씩 물어와서 부리로 쪼아 다지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더니 마침내 진흙으로 테두리를 마감했다.
둥지는 5일 만에 완공되었다. 암컷이 둥지에 앉아 있는 동안 수컷은 멀찌감치서 망을 보았다. 5월이 되어도 날씨는 여전히 변덕스러워 찬 바람 몰아치며 비까지 내렸다. 둥지가 허술해 보이던데 이런 비바람을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생각해보면 나의 둥지라는 것도 때로 얼마나 허술했던가. 그럼에도 세파와 비바람 속에서 햇빛 한 줌 얻으려는 치열함으로 지켜온 보금자리가 아니던가. 나는 그런 로빈과 유대감을 느꼈는지 둥지에 연신 마음이 쓰였다.
로빈이 자리를 비운 사이 이 층 창문에서 사진을 찍어 확대해 보았다. 둥지에 든 알이 보였다. 메추리알보다 조금 큰 파란색 알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알을 낳느라고 그렇게 바람이 불고 비가 와도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구나. 새 생명을 품은 파란 알은 볼수록 경이로웠다. 며칠 후 알은 네 개로 늘었다.
나는 새에 별 관심이 없었고 새에 관해 잘 알지도 못하고 자랐다. 캐나다로 이민 와서 새소리에 잠을 깨면서부터 관심을 두기 시작했고 몇몇 새의 음색을 구별하게 되었다. 새 소리를 한마디로 표현하기란 어렵지만, 청아한 소리로 매일 뒷마당에서 지렁이를 쪼아먹고 놀다 가는 사이에 차츰 새들과 가까워졌다. 적갈색 가슴에 등이 검은 새를 로빈이라 부른다는 걸 알았다. 로빈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장 친밀감 있게 다가온 새였다.
산란할 장소로 우리 집을 선택한 로빈. 뒷마당을 들락거리며 모종도 심고 텃밭 일도 해야 하는데 어미가 한창 예민한 시기여서 망설여졌다. 잔디 깎는 일도 미루었다. 밤에는 집안 불빛이 새어 나가 어미 신경을 거스를세라 블라인드로 빈틈없이 막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내 집에 와서 그 성스러운 일을 하는데 산바라지하는 친정엄마만큼은 못 하더라도 그 정도는 배려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검은 새 한 마리가 돌연히 둥지 근처에 날아들자 잠시 잔디밭에서 지렁이를 쪼고 있던 어미가 기겁하고 날아올랐다. 맹렬하게 공격한 끝에 침입자를 쫓아버리고서야 다시 알을 품었다. 자신의 산실이자 육아방이 될 둥지를 지키려는 어미의 몸부림은 필사적이었다. 어떤 동물 세계에서도 어미는 용감하고 강인하다는 걸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리. 저녁을 먹다가 유리창 너머로 로빈의 눈과 마주쳤을 때 고스란히 비를 맞으며 앉아 있는 어미를 차마 바라볼 수가 없어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괜찮겠지. 어디선가 수컷이 지키고 있을 것이었다.
말로만 듣던 줄탁동시(啐啄同時), 그 가슴 떨리는 광경을 목격하다니. 줄탁(啐啄)은 새끼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 어미와 새끼가 안과 밖에서 함께 알껍데기를 쪼는 일을 말한다. 아무리 간절한 줄탁(啐啄)일지라도 그것이 동시(同時)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한쪽이 절실히 원하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알아차려 호응하는 절묘한 타이밍, 그것은 지극한 사랑과 깊은 관심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리라.
그렇게 껍데기를 깨고 나온 새들이 눈을 뜨더니 식욕이 왕성해졌다. 어미 아비의 헌신은 극진했다. 새끼 네 마리가 부리를 쩍쩍 벌리고 보챌 때마다 쉼 없이 먹이를 물고 와서 넣어주는 모습에 내 어머니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마 저러셨으리라. 젖과 밥으로 표현되던 어머니의 사랑법으로 나의 삶이 성숙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공들여 지은 따뜻한 밥 한 그릇은 내 어머니에게 절대적이었다.
희비와 고락을 함께하며 동행하는 게 부부라면, 자신에게서 탯줄을 끊고 분리되어 나온 생명체를 숙명처럼 끌어안고 사는 게 부모라는 존재인지. 사람이 새와 다르다면,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보이지 않는 사랑이라는 탯줄로 연결된 관계라는 점이 아닐까. 부모자식 관계는 좋든 싫든 서로가 생명으로 존재하는 한 잠시도 놓을 수 없는, 어쩌면 본능만큼이나 질긴 끈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아기 새들이 커가는 과정을 오롯이 즐기다가도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만다. 만나면 헤어지는 이치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날갯짓하는 녀석들 모습에 문득 이별을 예감하게 된다. 독립하려고 둥지를 떠나는 새들의 모진 듯하면서도 담백한 이별 방식에 마음이 젖는다. 아프지 않은 이별이 있겠는가. 자식의 홀로서기를 위해 기꺼이 보내는 것이니 어미 마음이 좀 덜 아프려는지.
오늘도 뒷마당에서는 둥지가 비좁을 정도로 몸집이 커진 어린 새들이 천진하게 먹이를 받아먹으며 날갯짓하느라 야단이다. 로빈과의 짧은 인연도 며칠 남지 않은 것 같다. 둥지에 온 마음을 주며 숨을 고르던 5월이 저문다. 빈 둥지 위로 봄꽃잎 지는 저 소리, 나에게만 들리는 것일까.
김영수 (yyss0506@hanmail.net)
캐나다한인문인협회,에세이문학,수필문우회회원
저서:수필집<시간의기차여행><어느물고기의독백><멀리 가지 않아도 특별하지 않아도>외.수필선집<하얀고무신>
www.koreatimes.net/오피니언
이로사 편집위원 (gm@koreatim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