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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봄의 선물, 노란 레인코트와 봄비
권천학 시인·한국시조진흥회부이사장
- 캐나다 한국일보 (editorial@koreatimes.net)
- Apr 25 2023 08:04 AM
뜰 앞의 수선화가 샛노란 꽃송이를 펼쳐들기 시작하던 두 주 전쯤의 주말이었다.
‘이건 할머니 선물!’
식품 장보기를 다녀온 딸 내외가 이것저것 장보기 해온 물건들을 내놓는 중에 쇼핑백 한 개를 식탁위에 올려놓으며 한 말이다. 나는 시장보기해오면서 무슨 생뚱맞은 소린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궁금했다. 나보다 더 궁금해 하는 손주들이 달려들어 그 포장에 손을 댔다.
‘안 돼, 할머니꺼야’
그 말에 손주들은 주춤거리며 나에게 넘겼다. 받아드는 순간 묵직함을 느끼며 포장을 풀었다.
노란 레인코트였다. 그냥 노란 레인코트가 아니라 지금 막 피어나고 있는 앞뜰의 수선화 물이 번진 듯 샛노란 레인코트, 요즘 한창 인터넷으로 퍼 날라지는 개나리의 노란 빛, 갓 깨어난 병아리의 노란색. 그 노랑빛깔이었다. 날씨도 청명하고 비도 내리지 않는데, 굳이 필요하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은 레인코트였기에 정말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워진지 오랜 기억, 그토록 입고 싶었던 기억속의 레인코트가 떠올랐다.
노란 레인코트에 노란 레인부츠. 그것이 소녀시절 내가 꿈꾸던 비오는 날의 팻션이었다. 그 차림에 투명한 우산을 받쳐 들고 봄비내리는 거리를 걷고 싶었다. 그러나 엄마는 냉정했다. 검은 통고무신에 눅눅한 잠바...
참 이상했다. 팔십을 코앞에 둔 지금, 그동안 산다는 이유로 한 번도 이뤄보지 못한 그 꿈같은 시절이 소환되다니. 그 순간 곁가지로 지나가는 생각의 번개. 칫, 언제 입어볼 수 있다고! 고마움보다는 먼저 솟는 반발심 같은 마음을 눌렀다.
‘엄마가 노란 색 좋아하시잖아요. 보는 순간 엄마생각이 나서 샀어요.’
딸이 어색해하는 나를 향해 묻지도 않는 말을 했다. 억지로라도 고마움을 표현해야할 것 같았다.
‘참 곱구나. 허지만 언제 입을 수 있을지... 옷장에 간직해야겠다’ 하면서 옷걸이에 걸어 옷장에 걸었다. 현관 쪽의 외출용 옷장이 아니라 정식 옷장에 걸린 레인코트.
바로 그 다음 주인 지난주였다. 비가 내렸다. 봄비라기보다는 스노우 스톰에 밀려온 얼음비였다. 마침 외출약속이 있었다. 다들 출근하고 난 집에서 혼자 외출준비를 했다.
나는 옷장에서 그 레인코트를 꺼냈다. 현관 쪽 옷장 옆에 깃발꽂이로 이용하고 있던 분홍 레인부츠에서 깃발들을 뽑아내었다. 태극기와 캐나다기, 스위스 기.
레인부츠도 칠 년 전쯤 밴쿠버로 이사 갔을 때 딸과 함깨 백화점 첫 쇼핑에서 우연히 샀다. 비가 많은 곳이라 해서 가족들의 비 신발을 사게 되었는데, 분홍 고무장화가 있었다. 소녀 쩍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쳤고 마치 반항이라도 하듯, 핑크 고무장화를 선택했다. 정말? 하면서 딸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노랑은 아니지만 한번 가져나 보려고! 하는 말로 딸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현관근처에서 깃발꽂이로 이용되고 있었다.
노란 레인코트에 분홍 레인부츠, 그리고 우산살 한 개가 약간 휘어지긴 했지만 평소 사용하던 투명 비닐우산을 펼쳐들고 집을 나섰다. 로얄욕 역으로 가는 도중에 우박비가 세차게 쏟아졌다.
엑썰런트! 소우 뷰티플!
무슨 소린가 싶어 흘긋 주위를 살폈다. 역 쪽에서 마주오던 캐네디언 부부, 남편이 나를 향해 던지는 말이었다. 갑작스런 사태에 미처 준비를 못한 비에 흠씬 젖으면서, 그냥 지나치기에도 바쁠 텐데, 점퍼를 올려 쓴 채 쏟아지는 빗줄기속에서 엄지를 들어 올리며 윙크를 보내었다. 순간 잠시 어색했던 나 자신의 팻션에 자신감(?)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내 모습을 본 S 역시 굿! 굿!을 연발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찍은 사진을 딸에게 보냈더니 ‘perfect outfit for today!’라는 문자와 함께 하트입술이 그려진 이모티콘을 답으로 보내왔다.
다시 한 주가 지난 엊그제, 또 비가 내렸다. 그 팻션을 하고 집을 나섰다. 전철역까지 가는 동안 갑자기 파노라마로 스쳐가는 지난 날 들, 눈물이 쏟아졌다. 그토록 입어보고 싶었던 노란 레인코트와... 냉정했던 엄마는 지금 100세를 코앞에 두고 계시지만 그 일을 생각하지도 못할 것이고, 그 시절, 그토록 해보고 싶었던 비오는 날의 팻션을 이제야 차려입다니, 60 여년의 세월을 건너온 강물이 가슴속으로 넘쳐흘렀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마음 놓고 울 곳도 없어 참으며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조차 강물이 되었다.
투명우산이긴 하지만 울고 있는 내 모습을 지나가는 사람에겐 보이지 않고, 나는 그렇게 나마 울 수 있는 것이 더욱 서럽고 다행스러웠다.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우산 아래의 안전지대!
늦었지만 어떤가. 소녀시절의 꿈, 이제라도 해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깃발꽂이로 쓰이던 빨간 고무장화, 뜬금없이 사온 노란 색 레인코트. 울음이 잦아들면서 마음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오늘도 S는 굿! 굿! 하겠지.
이 봄에 큰 선물을 받았구나!
노란 레인코트를 선물해준 딸. 그리고 봄비를 내려준 이 봄.
뜰 앞의 노란 수선화가 내 마음속에서 더욱 새록새록 피어났다.
권천학
시인·한국시조진흥회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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