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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본이 수교재개 서두르는 이유…
옥세철(LA미주본사 논설위원)
- 김명규 발행인 (publisher@koreatimes.net)
- May 09 2023 11:33 AM
현 아시아 정세가 여야 정쟁감인가
한국인의 집단의식 속에 가장 큰 상흔으로 남아 있는 국가적 재난은 무엇일까. 아마도 임진왜란이 아닐까.
이 전쟁 결과, 수많은 조선인이 포로로 끌려가 노예시장에 팔려가는 등 인적 피해만 수백만 명이 넘었다. 경작지의 3분의 2 이상이 황폐화됐고 따라서 경제는 엉망이 됐다.
경복궁과 창덕궁 등 2개의 궁궐이 불타는 등 엄청난 문화재가 소실됐다.
그 응어리가 400년이 지난 오늘에도 남아 있는가. 왜적(倭敵) 소탕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다룬 영화가 나왔다 하면 수 백만 명이 넘는 관객은 쉽게 동원된다.
1592년 4월 왜군의 부산포 침입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같은 해 12월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퇴각하는 적의 대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사실상 막을 내린다.
조선은 왜란 후 일본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대하며 내내 국교를 단절했을까. 아니다. 양국의 수교는 일찍 재개됐다. 전쟁 직후 1599년 3월 대마도주가 조선에 사자로 파견된 것이 시작이다. 1600년 8월에는 조선 주둔 명나라군도 철수하고 같은 해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막부가 세키가하라 전쟁 승리로 들어서면서 조일 양측은 모두 적극적인 자세로 교섭을 진척시켰다.
강화교섭의 전제로 조선 조정은 2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일본 국왕 명의로 공식서한을 보낼 것과 왜란 중 한양(서울)에서 이조 역대왕의 왕릉을 훼손한 범인을 붙잡아 보낼 것 등이다.
대마도주의 회신은 빨랐다. 그후 국서의 초안이 도착하고 곧이어 대마도인 2명이 압송되어 왔다. 국서도 그렇고, 왕릉 훼손 범인도 가짜였다. 그걸 조선 조정도 모르지 않았지만 그냥 묻어두기로 결정했다. 비록 일본의 요청으로 시작되긴 했지만 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날릴 필요가 없다는 현실적 판단에서였다. 경제복구가 시급했다. 대마도의 사정은 더 급했다. 조선침공 전초기지였던 대마도는 패전으로 경제기반이 초토화되어 기아사태에 직면했다. 그들에게는 조선과의 무역만이 살 길이었다.
조선도 민생문제가 심각했지만 일본의 새 정부 도쿠가와 막부와 수교를 서두른 근본적 이유는 따로 있었다. 조선을 둘러싼 안보환경이 급격히 변하기 때문이다.
국경 북쪽에서 여진족(후금)의 동태가 불온해진 것이다. 북과 남, 양면 전선을 가진다면 조선은 감당할 수 없다. 그러니 남쪽 국경만이라도 우선 안정시켜야 했다.
실제로 조선 조정은 임란이 끝난 지 14년 후인 1606년 일본에 사신단을 보내고 조총 500자루를 구입했다. 여진족, 후금과의 전쟁에 대비한 무기였다.
기시다 일본총리가 윤석열 대통령의 방일에 대한 화답으로 한국을 방문, 한일관계, 더나가 한미일 협력관계 강화에 가속이 붙었다. 이 시점에서 야권은 ‘죽창가’니 ‘토착왜구’니 하는 나팔을 불어댄다.
북한의 핵위협이 날로 고조된다. 대만해협의 파고는 점점 높아진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동북아가 처한 안보환경은 위험스럽다.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불똥은 바로 한반도로, 일본열도로 날아든다. 한 세기 전 일본과의 아픈 관계도 중요하지만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6.25를 ‘항미원조(抗美援朝: 미국에 대항해서 조선을 도왔다)의 위대한 승리로 찬양하는 시진핑에게는 찍소리도 못한다. 저들의 국적은 도대체 어디인가.
최소한 안보에서만은 여야가 따로 놀아서는 자멸을 초래할 것이다.
옥세철(LA미주본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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