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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더왕의 전설과 영국 왕실의 역사
민경훈(LA미주본사 논설위원)
- 김명규 발행인 (publisher@koreatimes.net)
- May 12 2023 03:22 PM
◆영국 중세시대의 아더왕.
영국왕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더(Arthur)왕이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12세기 웨일스(Wales)의 성직자 몬마우스가 ‘영국왕의 역사’를 썼을 때부터다. 그에 따르면 왕 우더 펜드래곤이 틴타젤 지역의 성주 골로이스의 아내 이그레인에 반해 성을 공격하던 중 펜드래곤은 마법사 멀린의 도움으로 골로이스로 변장하고 성으로 들어가 이그레인을 임신시켰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더는 훗날 펜드래곤이 죽자 영국왕으로 등극, 전국을 통일하고 로마까지 쳐들어간다. 그러나 조카 모드레드가 아내 기네비어와 왕좌를 동시에 차지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캄블람 전투에서 모드레드를 죽이고 자신도 죽는다. 아더왕 이야기는 전설이지만 그가 잉태된 틴타젤이나 사망한 캄블람 모두 영국의 남서쪽 변방 콘월(Cornwall)에 있다.
전라남도 해남에 ‘땅끝 마을’이 있듯이 콘월에도 ‘땅끝 마을’이라는 뜻의 ‘Land’s End’가 있다. 왜 하필 이런 변두리를 전설의 무대로 설정했을까. 고대에는 이곳이 변방이 아니라 영국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고대인 중 영국을 가장 먼저 탐험하고 기록을 남긴 사람은 그리스인 피시아스다. 그는 기원전 325년 영국을 한 바퀴 돈 뒤 이곳 원주민들이 스스로를 ‘브레타니케’라고 부른다는 기록을 남겼다. 켈트족 말로 ‘그림’ 또는 ‘색칠’이라는 뜻으로 원주민들이 파란 물감으로 얼굴을 색칠하는 관습이 있어 그런 말이 붙었다. 이것이 지금 ‘영국’을 뜻하는 단어 ‘브리튼(Britain)’의 어원이다.
피시아스가 영국에 간 이유는 당시 가장 귀한 광물인 주석(tin)을 찾기 위해서였다. 모든 주요 고대문명은 청동기를 바탕으로 했는데 청동을 만들기 위해서는 구리와 주석이 필요했다. 구리는 비교적 널리 퍼져 있지만 주석은 매우 귀했다. 그 귀한 주석이 콘월에 대대적으로 매장됐던 것이다.
콘월에서는 고대부터 사용된 대규모 주석광산과 고대 주민들이 상당한 재산을 축적했음을 보여주는 유적이 발견됐다. 전문가들은 로마가 망하면서 영국으로 몰려든 게르만계 ‘앵글’과 ‘색슨’족이 원주민 켈트족과 싸움을 벌였는데 이때 켈트족을 이끈 부족장의 기억이 한데 섞여 아더왕의 전설이 탄생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켈트족은 패했고 영국은 앵글과 색슨족의 차지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영국을 뜻하는 또 하나의 이름 ‘잉글랜드England’는 ‘앵글족의 땅’이란 뜻이다. 영국의 가장 위대한 왕은 유일하게 이름앞에 ‘대’자가 붙은 알프레드 대왕(Alfred the Great: 재위 871- 886, 886 -899 )이다.
9세기 중반 웨섹스의 왕 에델울프의 4번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형들이 차례로 죽는 바람에 왕이 되기는 했지만 바이킹과의 치열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다른 앵글로색슨 왕국이 모두 망하고 웨섹스 하나만 남았기 때문이다. 알프레드는 게릴라전으로 바이킹을 괴롭히다가 에딩턴 전투에서 대승, 바이킹을 몰아냈다. 그는 그후 해군을 창설하는가 하면 교육과 문예를 장려해 영국국민의 수준을 높이는데 성공한다.
다음 주목할 왕은 ‘정복왕 윌리엄(William The Conquror)’이다. 바이킹의 후손으로 노르망디에 정착한 그는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영국왕 해럴드를 죽이고 영국의 새 주인이 된다. 그러나 그런 왕도 프랑스에서 죽자마자 자식들이 왕위를 먼저 차지하겠다고 영국으로 달려가는 바람에 시체가 썩은 뒤에야 장례식을 갖는 수모를 당한다. 대영제국 이전 가장 많은 영토를 가졌던 왕은 헨리 2세다. 아버지 앙주 공이 갖고 있던 땅에 덧붙여 남프랑스 아키텐의 영주이자 한때 프랑스 왕비였던 엘리노어와 결혼, 그녀의 땅까지 차지해 프랑스 안의 영토가 프랑스 왕보다 더 컸다. 그러나 다섯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비참하게 죽었다.
왕 중에서 행복한 삶을 산 왕은 드물지만 그 중 찰스 1세는 최악이다. 그는 사사건건 의회와 맞서다가 1649년 크롬웰Cromwell에 의해 참수됐다. 목숨만 건져 프랑스로 도망간 그의 아들은 훗날 크롬웰이 죽자 찰스 2세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올랐다가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껴 허랑방탕한 삶을 살다 죽었다. 자기 아버지가 죽자 자신을 벌레보듯 하던 인간들이 자기가 왕이 된 후 온갖 아첨을 떠는 모습을 보고 실망한 것이다.
찰스 3세가 지난 6일 런던에서 대관식을 마치고 영국왕(영연방국 왕 겸직)이 됐다. 9살인 1958년 왕세자가 된 찰스(1949년생: 현재 74세)는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가 96세까지 사는 바람에 왕위를 갖기까지 장장 65년을 기다렸다. 하마터면 아버지가 너무 오래 살아 왕이 되지도 못하고 죽은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의 아들이나 프랑스의 루이 14세 아들과 손자(증손자가 즉위)처럼 될 뻔했다. 영국 왕실에서 찰스라는 이름이 300년 가까이 사라진 것은 모두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과연 찰스 3세가 찰스라는 이름을 가진 전임자들과 달리 행복하게 살 지 두고 볼 일이다.
민경훈(LA미주본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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