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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다 (1)
단편소설 (2023. 시와정신 해외문학상 수상작) - 김외숙
- 캐나다 한국일보 (editorial@koreatimes.net)
- May 24 2023 08:59 PM
눈을 붙이려 하면 마치 선잠을 깨우듯 비행기는 흔들린다. 장거리 비행에는 웬만큼 익숙해져 있음에도 키질하듯 들까부는 흔들림은 여전히 두렵다. 앞쪽의 대형 티브이 스크린 속의 작은 비행기는 여태 베링 해협 상공을 향해 날고 있다. 아시아 대륙과 북미 대륙 사이의 태평양 북단의 바다. 그러니까 비행기는 이미 두 대륙의 경계를 향해 바다 위를 날고 있는 셈이다. 인천 공항을 이륙할 때의 가슴 아리던 증상이 다시 도지는 것 같다. 아마도 또 다른 경계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리라.
여행을 할 때마다 여러 단계의 경계를 넘어야 한다. 특히 이번 여행은 어머니와의 작별이 그러했고 비행기가 이륙할 때도 경계선을 넘는 것 같은 아릿함이 가슴을 맵게 했다. 이번 여행이 유난히 내게 마음 편치 않은 이유는 어머니 때문일 것이다. 또 올 것이라고 말했지만 이 세상에서 다시 만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서로 회의적인 생각을 숨긴 채였다.
어머니와의 이별에 이렇듯 아릿한 증상을 느낄 줄은 나는 알지 못했다. 늘 넘기 힘든 경계가 둘 사이에 가로놓인 듯, 그것은 결코 넘을 수 없는 선인 듯 그대로 방치해둔 채 데면데면한 관계였기 때문이랄까? 발아래가 까마득하고 망망한 바다라는 사실이 비행기의 흔들림과 함께 마치 번지점프를 앞둔 사람처럼 식은땀을 느끼게 한다.
‘잠은 포기해야겠구나.’
나는 스크린에다 준 눈길을 당기며 의자 포켓에 꽂아둔 책을 펼친다. 책에다 눈길을 주노라면 잠이 오게 될지도 모른다. 장거리 비행 중에는 나는 되도록 내용이 무겁거나 지루하여 평소에 손에 잘 쥐지 않는 책을 택한다. 그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억지로라도 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노린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하나는 잠을 청하기 위해서이다. 읽고 싶지 않은 책만큼 좋은 수면제 역할을 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잘 읽혀지면 그것은 그대로 여행에서 부수적으로 얻게 되는 이익이기도 했는데 이것은 내가 잦은 장거리 여행의 경험에서 얻은 나름의 지혜라면 지혜이기도 하다.
내 몸이 상공에 떠 있다는 사실도 잠시 잊고 책 속에 몰입하려는데 어디선가 아기 칭얼대는 소리가 들린다. 한국시간으로 대낮인 이 시간에 작은 창 가리개를 모두 닫고 조명등도 끈 채 억지로 잠을 청하게 하니 아기도 잠을 잘 수가 없던 것일까? 어쩌면 비행기의 흔들림에 아기도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아기의 칭얼대는 소리는 대형 티브이 화면의 바로 앞 좌석에서 들려왔다. 소리로 미루어 젊은 엄마의 첫아기일 것이란 짐작을 한다. 어른도 쉽지 않은 장거리 비행을 저 아기는 무슨 일로 해야 하는 것일까? 아마도 공부하는 아버지를 찾아 젊은 엄마와 가는 길일 것이라는 상상을 나는 또다시 하며 책 속에다 눈을 고정 시키려 한다.
‘미안하구나,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눈은 활자에다 두고 있는데 날 앞에다 두고 하신 어머니의 말씀이 먼저 떠오른다. 어머니는 출국을 앞둔 내게 그렇게 유언하듯 말씀하셨다. ‘미안하구나.’란 말과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는 어머니의 말은 뜻밖이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어머니로부터 그 말을 듣기 위함은 아니었다. 갑자기 입원하셔야 했던 어머니,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상면을 위한 여행이었고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주어진 기회에 마음껏 모녀간의 정을 나누기만 하면 되던 여행이었다. 어머니와 머물며 이전에는 없던 살가운 정을 나누고 이제는 떠나야 했는데 어머니는 그렇게 결코 드러낸 적이 없던 말을 하셨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고 하신 어머니의, 차마 하기 힘들었을 그 말을 하실 수밖에 없도록 한 그 일을 되돌아본다. 그때 어머니는 정말 그러실 수밖에 없었을까? 얼굴도 익히지 못한 그 아이를 그렇게 떠나보내셔야 했던 것일까? 떠나보내는 일만이 진정 일을 해결하는 길이라 여기셨던 것일까? 그래서 그 아이를 떠나보낸 후의 내 삶이 진정 그 아이와 함께 할 삶보다 행복해진 것일까, 어머니의 바램대로? 만일 어머니의 결단이 날 위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실패한 결정이었다. 내가 실패한 결정이라 단정할 수 있는 것은 내 삶 속에서 그 아이를 지우고 어머니의 생각처럼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결정은 오히려 온전하던 모녀간의 관계까지 악화시켰으니, 그래서 갉듯 내가 어머니를 떠난 삶을 살면서 어머니가 원하신 방법의 삶과는 어긋나게 살고 있으니 실패한 것임에 분명하다.
어머니께 나는 어쩌면 내가 겪은 아픔과 같은 농도의 고통을 안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자식을 생으로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어보시라는 억하심정. 베링 해협을 건너고 북미 대륙을 가로질러 그 먼 곳에다 둥지를 옮긴 내 저의는 아마도 그런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어머니에 대한 나의 정보다 불과 두어 주를 함께 거하며 나눈 정이 더 깊어졌는지 여러 과정의 경계를 벗어나 멀어져 오는 길은 내게 힘들다. 자꾸만 마지막을 의식하기 때문인 것 같다.
소설가 김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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