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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사랑법
권천학 시인·한국시조진흥회부이사장
-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editorial@koreatimes.net)
- Jun 21 2023 01:17 PM
산골 마을의 외딴집에 노부부가 알콩달콩 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80살이 지나면서 싸움이 잦아졌다. 아랫마을 사람들은 아마도 노망(老妄)이 들었나보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마을의 한 총각이 나무를 하러 산으로 가는 길에 그 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당신이 먼저 죽어, 먼저 죽으라고, 그래야 내가 편하지”
“그러는 당신이 먼저 죽으시우, 그래야 내 맘이 편하다우.”
노부부의 다투는 소리에 쓴 입맛을 다시며 지나갔다. 그 총각이 나무를 잔뜩 해서 짊어지고 내려오는데 노부부는 그때까지 티격태격 다투고 있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먼저 죽으면 되잖우.”
“무슨 말이야. 당신이 먼저 죽어야지.”
서로 먼저 죽으라니, 정말 노망이 났구나, 한심한 생각에 쿵 하고 길섶 한 옆에서 머뭇거리던 총각은 지게짝지로 땅을 내려찍었다.
“내가 당신보다는 일 처리하는 것이 야무지잖아요. 그러니 당신이 먼저 가는 게 낫지 뭘 그러우?”
“무슨 소리, 당신은 몸도 약하고 거동도 나보다 더 불편하잖아, 그러니 당신이 먼저 가야. 내가 뒤처리 말끔히 하고 뒤따라가지”
그 다툼은 혼자 남은 외로움과 장례의 수고로움을 떠맡기지 않으려는 서로에 대한 배려였다. 배려보다 더 깊은 사랑이었다. 마을총각의 가슴이 찡하게 저려왔다.
노년의 나의 어머니는 늘 아버지에 대해서 곱게 말하지 않았다.
젊었을 때 섭섭했던 일이며, 고쳐지지 않은 사소한 습관이며, 오래 전에 한 자잘한 실수들을 들추어 공격하곤 했다. 젊었을 때 아내인 당신 편을 안 들고 시어머니 편을 드신 아버지에게 그때 기분이 어땠수? 하고 다그치기도 하시고, 과일가게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순서를 내주고 뒤로 서 있다가 작고 못난이들을 들고 오시는 아버지에게, 그런 인심을 나에게나 좀 쓰시지, 빈정대시기도 했다.
어허!
아버지는 그냥 지나치시다가도 어쩌다 한 번씩은 그 한마디로 전체를 막음하시곤 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매일 이른 아침 운동 삼아 마을산에 다녀오시면서 약수를 길어 오시곤 했다. 함께가 아니라 각각 시차를 두고 코스도 달랐다. 부부가 함께 다니 것 자체를 겸연쩍어 하시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각각 아침 산행을 다녀온 후 아침식탁에서 서로를 먼발치로 본 이야기를 나누곤 하시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늦잠을 주무시는 아버지의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살그머니 집을 나섰다. 어머니가 물을 길어 조용히 현관에 들어섰을 때, 아버지가 불쑥 ‘이봐요, 오늘은 내가 밥을 해놨지,’ 하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더란다. 늦게 일어나신 아버지께서 어머니가 앉혀놓은 전기밥솥의 플러그를 꽂았던 것이다.
“평생 부엌에 들면 큰일 나는 줄 알던 사람이 다 앉혀놓은 전기밥솥의 전기 플러그 한번 꽂은걸 가지고 자기가 밥했다고 하는구나, 내 참!”
결국 그것마저도 아버지의 흉이 되었다.
나이가 깊어지면서 어머니의 투덜댐이 점점 더 자질구레해졌다. 심지어 아버지의 밥 먹는 습관까지 트집 잡듯 들먹이셨다.
아버지는 식사를 시작하시기 전에 숟가락 끝에 맨 간장을 살짝 찍어 먼저 입맛을 살리는 습관이 있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또, 또, 저렇게, 짜게 먹지 말라고 했잖아요, 하고 혀를 차면, 아버지는 못들은 척 넘기셨다.
아버지의 밥숟갈은 언제나 수북한 고봉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수북수북한 밥숟갈을 당신의 젓가락으로 툭 쳐서 반쯤 덜어 내며 군소리를 또 하셨다. 밥은 적게 먹고 반찬을 좀 많이 드시라구요. 싱겁게 만들었잖아요오~.
아버지는 달갑잖아 하시면서도 마치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고분고분한 태도를 취하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좀 심하다고 생각했다. 니 엄마 말대로 하면 맛이 없어 하시는 아버지 편을 들곤 했다.
우리가 보기에는 전혀 흉 될 것도 없고 핀잔들을 일도 아니어서 되레 어머니의 극성을 견뎌내는 아버지를 딱하게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아버지를 들볶는 어머니가 얄밉기까지 했다.
어쩌다 고궁이나 관광지 나들이라도 하는 날에도 아버지는 늘 어머니의 지천구를 들어야했다.
허리 좀 펴고 걸어요. 옆으로 걷지 말고 디딤돌을 딛고 가요, 모자를 눌러쓰세요, 얼굴에 햇볕 들잖아요... 등등.
어떤 때 어머니가 정말 이혼이라도 할 것 같이 심하게 불만을 터트리곤 하셨는데, 그럴 때에도 어허! 한 마디로 다 감당하셨던 아버지. 그런데,
그것이 어머니의 사랑법이었다는 것, 아버지 당신께서도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계셨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아버지께서 혈압걱정, 당뇨걱정 없었던 것, 그리고 엄마, 고만 좀 하셔! 할 때마다 그래, 너희들은 언제나 아빠편이지, 내편은 없어! 하시던 어머니의 그 말씀에 서린 바람소리까지. 그게 다 사랑이었다는 것을. 나의 생각이 모자랐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버지는 3년 전에 100세를 두 해 못 채우시고 돌아가셨다. 이제 100세를 한 해 앞에 둔 어머니 혼자 계신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절절하실까. 나는 지금 멀리 와있고, 게다가 코로나 때문에 한동안 발이 묶이기까지 했으니.
내편은 없어! 하시던 그 마음에 지금도 얼마나 시리실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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