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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시간과 이타심(利他心)의 관계
권천학 시인·한국시조진흥회부이사장
-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editorial@koreatimes.net)
- Sep 11 2023 10:37 AM
‘할머니 안녕히 주무셨어요?’ 내 방으로 와서 늘 하는 아침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던 손녀가 뭔가 석연찮았는지, 다시 허리를 정중하게 굽히고는 또박또박 한국말로 반복하며 나의 기색을 살핀다. 혹시 내가 알아듣지 못했나 싶기도 했겠지만, 평소와 다른 나의 태도에서 뭔가 할머니 기분이 좋지 않다는 낌새를 느끼고 나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역력했다. 평소 같으면 내가 “도리도!” 하며 허그를 하고, “잘 잤지? 어서 아침 준비를 하렴!” 하는데 오늘은 그냥 책상 앞에 앉은 자세 그대로, 컴퓨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무심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자세를 고쳐 평소처럼 허그를 하며 “애고, 미안해, 할머니가 바빠서 그만... 우리 도리도 잘 잤지?”하고 웃어 보였다. 그제야 방글거리며 나간다. 그러고 보니, 손녀가 다녀가기 조금 전에 손자가 와서 “할머니, 안녕히 주무셨어요?” 했을 때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시큰둥하게 “그래~”하고 말았었다. 손자 역시 뭔가 서먹한 기분으로 나가던 뒷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왜 이럴까?
그러고 보니 간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뒤척거리며 자정을 넘겼고, 새벽녘 꿈자리까지 어지러웠다. 벌써 여러 날 째다.
‘여든에 죽어도 구들동티에 죽었다고 한다.’더니 잠 못 잔 탓을 하는 나 자신이 우스웠다.
나는 예민한 편이다.
‘예민銳敏하다’는 말은 사전에서는 ‘1) 무엇인가를 느끼는 능력이나 분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빠르고 뛰어나다. 2) 자극에 대한 반응이나 감각이 지나치게 날카롭다. 3) 어떤 문제의 성격이 여러 사람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중대하고 그 처리에 많은 갈등이 있는 상태.’로 풀이된다.
예민함은 한마디로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모든 일상적인 일에 대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반응이라 함은 꼭 정신적인 것만이 아니라 육체적인 것도 포함하므로 육체적 정신적 표현에 다 쓰인다.
같은 시를 읽었는데도 독자마다 받아들이는 감동이 다르고, 같은 영화를 보고도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은 정신적 또는 정서적 예민함의 차이이다. 냄새를 더 잘 맡거나 소리에 더욱 민감하거나, 같은 주사를 맞고도 그 아픔의 차이를 다르게 느끼는 것... 등은 육체적 예민함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 두 가지 면에서 다 예민한 편에 속한다.
늘 일이 밀려있는 상태인 채로 끌고 나가는 것이 나의 일상이긴 하지만, 그럴 때마다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견딜만한 스트레스가 되기도 한다. 그러다가 한번쯤 된통, 턱에 걸릴 때가 있다. 요즘이 그런 상태다. 계획한 원고를 제 때 소화하지 못해 일이 쌓이고, 청탁원고가 밀려 있고, 벌써 3년째 출판사 기획의 원고도 마무리하지 못한 채로 있고, 계획한 프로젝트도 쌓여만 간다. 계속 끓이고 있음에도 닥쳐오는 일에 밀려 제자리걸음인데 벌써 올 해의 반을 지났다. 시간부족을 더욱 절감하며 동동거리는 마음에 복잡한 심경에 빠질 때가 잦다.
꿈자리까지 어수선해진다.
부지런을 떠는 데도 웬일인지 엇갈리고 허둥대며 아귀가 맞지 않아서 허우적대다가 깨고 보면 꿈이다. 뒤숭숭한 새벽꿈에서 벗어나 안도하기도 하지만, 또다시 시간부족으로 몰아세운다. 그런데,
나의 그 시간부족 핑계가 단순히 시간부족이 아니라는 것을 경고해주는 실험이 나왔다.
캘리포니아대학교 연구진이 실험을 통하여 수면시간이 1시간 부족하면 타인을 도우려고 하는 ‘착한 마음’이 약화 된다는 것을 증명했다. 실험참가자를 두 그룹으로 나눈 후, 한 그룹은 잠을 충분히 자도록 했고 다른 그룹은 수면시간을 제한한 후 사회적 이타심과 관련된 질문을 했다. 그 결과 잠이 부족했던 그룹에서 남을 돕고자하는 의욕이 78% 감소했다.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 낯선 사람이든 가까운 친척이든 관계없었다. 또 뇌 스캔 결과에서도 사회적 행동과 관련된 뇌 영역이 크게 감소되어, 비활성화상태로 나타났다. 기부금도 덜 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 예로, 미국의 서머타임을 시작한 시기에 기부금 10%가 감소했고, 하와이처럼 서머타임을 하지 않는 지역의 기부금은 줄지 않았음이 분석결과였다.
비행기가 출발하기 직전,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안전조끼 착용을 설명할 때 자신부터 완전하게 착용하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나 자신이 온전해야 남을 도울 수 있는 것, 내가 편안해야 남에 대한 배려심도 생기고 공감력도 커진다는 이치다.
시간부족 때문에 수면시간을 줄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아무리 바빠도 꼭 해야 할 중요한 일은 빠트리지 말라는 경고와 같다. 수면시간은 빠트리지 말고 꼭 해야 할 일이다.
몰라서 못했을까.
내가 나의 손주들에게 불친절하지 않으려면, 그리고 나의 밀린 일은 차질 없이 해내려면, 잠부터 충분히 자야한다는 것,
늦게나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평소의 생각을 다시 한 번 새김과 동시에 나의 핑계가 시간 부족이 아니라 수면시간의 부족임을 다시 한 번 깨우쳐주었다.
권천학
시인·한국시조진흥회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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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editorial@koreatim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