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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스글로크너(Grossglockner)에서 오스트리아 마지막 황제와 황후를 만나다(유럽 알프스 여행기 3)
손영호(칼럼니스트·국제펜클럽 회원)
-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editorial@koreatimes.net)
- Sep 28 2023 09:40 AM
오스트리아 하일리겐블루트에서 잘츠부르크로 이동하려면 그 중간에 넘어야 할 험준한 길, 이른바 '그로스글로크너 하이 알프스 도로(Grossglockner High Alps Road)'를 지나야 한다. 이 도로는 총길이 48km, 머리핀 회전 구간(Kehren) 36곳 등 세계적 드라이브 코스 중 하나로 유명하다. 거의 1킬로미터에 한 번씩 회전해야 하는 곳으로 1935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 그로스글로크너 하이 알프스 로드: 머리핀 커브길
하일리겐블루트(Heiligenblut)는 직역하면 '성혈(聖血, holy blood)'이란 뜻이다. 전설에 의하면 914년에 콘스탄티누스 7세의 명으로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성혈을 로마로 옮기는 임무를 맡은 덴마크 기사인 프레데릭 브리시우스가 알프스 산을 넘다가 눈사태로 죽게 되자 자기 장단지의 찢어진 상처 속에 성혈 병을 감추었다. 그후 그의 시체가 지방 농부들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눈 속에서 3개의 밀 싹이 돋아나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하일리겐블루트 마을의 문장(紋章)이 되었다는 얘기다.
현재의 성 빈센트 교회는 1460~1491년에 13세기 이후 폐허가 된 옛터 위에 지어졌다고 한다. 교회 주변은 온통 묘지인데 얼핏 브리시우스의 무덤이려니 생각하고 촬영했지만 나중에 확인하니 없어져 아쉽다. 시간에 쫓기다보니 실수를 했나보다.
▲ 하일리겐블루트 성 빈센트 교회는 묘지로 둘러싸여 있다. 가운데에 눈덮힌 그로스글로크너 정상이 보인다.
그로스글로크너 정상(3,798m)이 보이는 해발 약 2,400m의 '파노라마 레스토랑'에 다달았다. 식당에서 좀 떨어진 전망 좋은 곳에 흥미로운 동상이 있는데 1856년 9월에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와 엘리자베트 황후의 방문을 기념하여 1992년에 세운 것이란다. 그리고 식당 안에는 황제와 황후가 앉았던 자리에 실물 크기의 인형을 갖다 놓고 아예 일반인들은 앉지 못하게 해놓았다.
그런데 나중에 할슈타트(Hallstatt)를 들렀을 때 거기에도 황제와 황후의 방문기념비가 있었다. 기념비에는 "황제와 황후, 할슈타트 첫 방문 후 25년 만인 1879년 4월24일 재방문하다"라고 쓰여 있다. 아마도 결혼하고 진작 여기를 방문한 것 같다.
▲ 1856년 9월 오스트리아 프란츠 요세프 1세 황제와 엘리자베트 황후의 그로스글로크너 방문기념비. 1992년에 세웠다.
이렇다면 숱한 곳에 이런 기념비가 있을 법한데 그 이유가 나같은 사람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 기념비의 주인공을 통해 이미 들렀던 제네바와 몽트뢰를 다시 상기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 사연은 이렇다.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f I, 1830~1916) 오스트리아 황제는 1854년에 이종사촌인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Elisabeth von Wittelsbach, 1837~1898)와 결혼하였다. 별명이 '시씨(Sisi)'였고, 오스트리아 황후이자 헝가리 여왕이었던 엘리자베트는 1898년 9월10일 토요일 오후 1시35분에 제네바에서 몽트뢰로 가는 증기선을 타기 위해 제네바 호수 산책길을 걸어가다가 25세의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 루이지 루체니의 쇠꼬챙이에 찔려 암살 당했다.
당시 60세의 엘리자베트 황후가 제네바의 보 리바쥬 호텔(Hotel Beau Rivage)에 공작부인이라는 가명으로 투숙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은 암살자는 평소 한두 명의 시종만 거느리고 나들이를 하는 황후를 노리고 공격했던 것이다.
▲ 파노라마 식당 안에는 황제와 황후가 앉았던 자리에 실물 크기의 인형을 갖다 놓고 아예 일반인들은 앉지 못하게 해놓았다.
황후는 결국 오후 2시10분에 44년 간의 황후의 생을 마감하였다. 사망 원인은 가늘고 날카로운 10cm의 쇠꼬챙이가 8.5cm나 깊이 박혔고, 너무 꽉 조인 코르셋 때문에 출혈이 심하지 않아 아무렇지도 않게 승선은 했으나 코르셋을 풀자마자 심각한 출혈이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응급처치를 받으면 살 수 있었겠지만 공교롭게도 그 배에는 의사도, 간호사도 승선하고 있지 않았다. 시녀가 급히 선장에게 황후의 신분을 알려 회항했고, 죽어가는 황후는 뒤늦게서야 호텔로 옮겨졌다. 급히 의사를 불러왔지만, 단 한 번 정신을 차렸다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란 한 마디만 남기고 사망했다. 유언마저 남기지 못한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시신은 9월14일 수요일에 기차로 비엔나로 운구되어 9월17일 카푸친 교회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엘리자베트 황후가 여행을 많이 다닌 배경에는 결혼 2년차부터 이모이자 악독한 시어머니인 조피 대공비(Archduchess Sophie, 1805~1872)와의 갈등이 심화되어 '도피성 여행' 이었던 것 같다. 결혼 후 1남3녀의 아이를 낳았는데 1889년에 아들 루돌프가 자살하자 실의에 빠져 평생을 검은 상복을 입고 이전보다 더욱 도피성이 짙은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1888년 아버지를, 다음 해 아들을 잃은 시씨는 1890년에는 언니, 1892년에는 어머니, 그 다음 해에는 막내동생을 떠나보냈다. 연속적 비극으로 황후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등지고 평생 여행으로 회피했으며, 황후의 하인들은 결혼하면 쫓겨나기 때문에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 했다.
한편 엘리자베트 황후를 무지 사랑하고 온갖 난관 속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통치를 잘 수행했던 프란츠 요제프 황제도 가정적으로는 비극의 연속이었다. 프랑스 나폴레옹 3세가 1861년 멕시코를 침략하여 제2제국을 만든 후 1864년 요제프 황제의 동생인 막시밀리안 대공을 멕시코로 보내 막시밀리안 1세 황제로 등극시켰으나 1867년 6월19일 멕시코 급진개혁파 베니토 후아레스에 의해 총살 당했다. 그의 나이 35세 때였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은 바로 이 사건을 다룬 그림이다.)
1889년 왕위계승자인 아들 루돌프 황태자의 자살, 1898년 엘리자베트 황후의 암살 그리고 1914년 6월28일, 사라예보에서 그의 조카이자 상속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암살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1916년 사망하여 68년 간의 통치를 끝냈다. 하지만 엘리자베트 황후는 '마지막 황후'라는 오스트리아의 상징적 관광상품이 되어 지금도 후손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
손영호
손영호(토론토 칼럼니스트·국제펜클럽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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