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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이가 돌아왔다, 꿈이냐 생시냐"
부대원 만났으나 무기는 카빈 1정뿐
- 김명규 발행인 (publisher@koreatimes.net)
- Oct 03 2023 02:22 PM
위대한 헌신 - 유격대원 주홍길 수기(14)
◆6.25 당시 유격대원으로 활약한 주홍길(토론토)씨.
한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7월 어느 날 오후였다.
집 밖에서 젊은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와 대화하는 소리였다. 여자는 동생 이름까지 대며 나를 찾았다. 나는 직감으로 옥이가 온 줄 알았다. 혈관의 피가 솟구쳤다.
“옥이가 오다니, 옥이가!”
나는 밖의 안전상황을 살피지도 않고 마루 뚜껑을 열어젖히고 방으로 뛰쳐 들어갔다. 옥이가 맞았다.
“주선생님, 그간 무사하셨는지요?” 옥이는 내 아래 위를 훑어보더니 감회가 서린듯 주루루 눈물을 흘렸다. 나도 감정에 북받쳐 “어떻게, 잘 있었오?” 겨우 싱거운 한마디를 입밖으로 냈을 뿐 더 이상 말이 안나왔다. 옥이는 고생이 심했는지 전보다 야윈 모습이었고 그래서 더 아름다웠다. 총명한 눈빛, 단아한 자세도 흩어짐이 없었다.
나는 옥이를 어머니에게 소개했다. “제가 문평에 숨어 있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보살펴준 처녀입니다.” “아주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금새 옥이 손을 잡다가 어깨를 감싸 안으셨다. 가족을 만난듯 따듯한 눈길이 옥이에게 꽂혔다. “고마워요 처녀, 어떻게 먼 길을 찾아 왔구먼. 앉아서 쉬어요.”
어머니는 새 며느리라도 보신 듯 흐믓한 표정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강가로 나갔다. 문평서는 늘 영흥만 바다에 시선을 주었지만 이제 우리 앞에는 고향 강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잠시 흐르는 물을 보다가 정결하고 간절한 소망의 엄습을 받았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 아닌가. 나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 옥이도 나를 받아들였다.
밤이슬이 내렸다.
갑자기 나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옥이, 나는 산속으로 들어가 동지들과 합치겠다. 옥이는 어떻게 하지?” 옥이는 기다렸다는듯 대답했다. “물론 저도 따라가야죠. 이제부터 헤어지지 않겠어요. 나는 어떤 고난도, 죽음까지도 각오했어요.”
그날 밤 옥이는 어머니와 같이 나란히 누워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내 작은 ‘문화주택’에 들어가 잠이 들었다. 밤새도록 옥이 꿈을 꾸면서 평화를 맞은 듯 달콤했다.
다음날 아침은 옥이를 간곡하게 설득하는 시간이었다. “지금 알다시피 상황이 불확실해. 그러니까 옥이는 일단 문평에 가 있어. 나도 곧 따라가서 옥이를 데리고 여기서 탈출하겠으니까.”
옥이와 같이 한 자리에 오래 있으면 반드시 발각될 것이고 그럼 옥이도, 어머니도, 죽음의 고생 길에 내몰릴 것은 불보듯 뻔했다.
허황된 말이 아닌가하는 의심도 있었지만 절반 쯤은 내가 하고자 하는 계획이기도 했다. 옥이는 내 말을 믿으면서 문평으로 떠났다. 나는 석달 이상을 ‘문화주택’에서 살면서 정보를 찾았다.
내가 최초로 잡혔던 물덕방리에서 소식이 들어왔다. 유격대원 조병육 동지가 어느 집에 들려 옥수수를 얻어먹고 산으로 들어갔고 지금은 신포리 누이동생 집에 은신했다는 것이다.
그 집은 내가 북한에 처음 침투, 하룻밤을 자며 부산으로 탈출한 장동지의 소식을 부모들께 전해준 집이 아닌가. 장·조 두 동지는 처남매부 사이였다.
나는 즉시 암호문을 써서 조동지에게 보냈다. 만날 장소와 일시, 만나는 것이 탄로날 경우의 비상대책까지 세밀하게 적었다.
조동지와 나는 천내리 앞산 넘어 공동묘지 구석에서 ‘거짓말처럼’ 만났다. 그는 도피중에 만난 대원과 같이 왔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를 뒤이을 후속부대는 평남 양덕군 백산에 공중 투하했다. 함남과 평남의 접경지역이었다. 낙하지점의 지세가 너무 험해서 요원 여러 명의 낙하산이 암벽이나 높은 나뭇가지에 걸려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희생됐다.
가장 큰 타격은 부산기지와 통화하는 무전기가 고장나서 보급품과 작전지시를 받을 수 없었다. 살아남은 대원들이 부락으로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내려가다가 중공군의 포위공격으로 부대가 완전 와해됐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목숨을 유지한 몇몇 대원들은 산속을 헤메다가 뿔뿔이 흩어졌고 조동지는 누이동생 집을 간신히 찾아왔다는 것.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허탈감에 사로잡혔다. 탈출이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물었다. “무기와 탄약은 어디 두었소?” “네, 카빈총과 실탄을 원강능 골짜기에 숨겨놨어요.”
“조동지,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곳을 빠져나가 부산영도로 돌아가야 하오. 그러기 위해서는 동지가 숨겨둔 무기를 먼저 찾읍시다. 카빈 총 1개라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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