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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 학위
손정숙 (수필가/캐나다문협)
- 연지원 기자 (press2@koreatimes.net)
- Nov 25 2023 04:59 PM
오래 전에 포기한 꿈이었다. 외부의 조건으로, 내부적 판단으로 두 번이나 외면하였던 꿈. 포기하였다는 사실조차도 잊고 있은 학위였다.
박사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는 학문이나 전문 기술에 종사하던 사람에게 주는 벼슬이었다고 한다. 통상적으로 "박사란 대학이 전문 학술에 연구가 깊고 일정한 업적을 올렸다고 인정하는 사람이나 박사학위 논문 심사 등에 합격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학위, 또 그 학위를 가진 사람"을 일컫는다.
영어로는 PhD. 'Doctor of Philosophy' 철학박사이다. 가장 널리 쉽게 접할 수 있는 철학이란 무엇일까 다시 사전을 들여다보았다. "세계의 궁극의 근본 원리를 추구하는 학문" 이라 되어 있다. 철학가는 철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고 하였다. 뜻이 모호하고 거창하고 어려웠다.
게티이미지 제공
조금 더 읽어 내려가니 " 자기 자신의 경험 등에서 만들어 낸 기본적인 생각. " 이라 풀이되어 있다. 그제사 큰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 깊은 연구도, 또한 철학에 조예가 깊다고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시니어 대학 박사 학위. 캐나다 한국인으로는 제1호 일 것이다. 8년, 16학기를 성공적으로 마쳤을 뿐만 아니라 받을 자격이 충분하고도 넘친다는 그 자격을 찾아 지난 시간들을 두서없이 펼쳐 보았다.
정구채를 메거나 탁구를 치느라 땀을 뻘뻘 흘려보기는 했지만 정작 잘하는 것이라 곤 책 읽는 것 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때 '플루타크 영웅전‘을 읽었으니 무엇을 제대로 얻었을까. 오래 전, 미국 케네디 대통령이 어느 인터뷰에서 청소년들에게 '플루타크 영웅전'을 권하고 싶다고 말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책을 산다면 무조건 반기시던 아버님과 책 읽기를 무척 좋아하던 오빠 덕분에 동화책에서부터 안나카레니나, 까라마조프의 형제들.. 잡히는 대로 읽었다.
책읽기는 어쩌면 내 적성에 딱 맞는 것인 듯 하다. 적어도 책을 읽음으로써 나의 성격과 상호 작용을 일으키며 발전한 덕목이 있다. 시작한 일은 반드시 끝을 맺어야 한다는 것, 책임을 맡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완수해야 한다는 집념과 인내심과 의지력이 이때부터 자라고 있었다. 무슨 일에나 논리적으로 철저하게 파고 드는 성격 또한 독서에서부터 자랐을 것이다.
대학교 신입생 축하식에서 학장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전공 비전공 가리지 말고 적어도 일년에 책 100권 이상 읽도록 하시오. 어떤 분야에서든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주제의 반이상은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을 습득하도록 하시오.'
책을 읽으므로써 생성된 성격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대학원 입학부터 였던 것 같다. 부 전공으로 의류학을 택하였다. 의류의 색채 발달과 변천, 디자인의 변화와 환경의 조화 관계를 공부하려 택한 과목이었는데 기왕이면 근본적으로 접근하려고 미술사를 배우고 구도를 실습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염료의 발달, 의류디자인, 직조… 철저하게 기초부터 공부하게 되었다. 유경채 교수님과 김종환 교수 화가님들을 이때에 만나 집중지도를 받았다. '어린이 영한그림사전'이나 '영한 그림이야기’ 책을 출판하고, 미술전시회에서 간단한 평을 할 수 있는 실력은 다 이때 얻은 지식일 것이다. 읽은 책이름과 내용과 등장 인물의 이름까지 외우고 있던 덕분에 미국으로 캐나다로 옮겨 다니면서도 이민족 사회에서 지성인의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학위 취득을 향한 나의 꿈은 접어야만 했다. 브레시아 칼리지에서의 학습 경험이 꿈의 정점이라 생각하였다.
그즈음, 한국에 오래 거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남편이 브레인 21 프로그램으로 한국국립과학원의 초청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경희대학교 의과대학과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연구를 하게 되었다. 내 앞에 놓인 선택의 기회는 두 길이었다. 박사학위 정규과정을 완수할 것인가, 아니면 경희대학교 문과 대학에서 수필강의를 들을 것인가였다. 모교에서는 이미 대학원 과정을 마쳤으므로 학위 과정 이수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경희대학교에서는 재직자의 가족으로 일체 학비가 면제였다. 당시 새로운 사회적 주제로 떠 오른 노인학 연구로 학위를 받을 것인지, 명성 있는 교수님들께 수필을 배울 것인지를 놓고 며칠을 고민하였다. 사람의 일생에는 이상을 향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필수이지만 즐길 수 있는 기회도 있어야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제부터 글쓰기를 배우자. 내가 읽은 책처럼 내 책을 써보리라. 만갈래 생각들이 드디어 하나로 점을 찍었던 것이다. 캐나다 한국일보의 이석현님을 통해 이미 나의 수필은 지면에 연재되고 있었으나 기본부터 배운다는 뜻에서 다시 학교에 들어간 것이다. 더욱이 외국에 거하는 자신의 글과 국내 작가의 글을 비교 평할 수 있는 기본지식과 사고의 방향을 탐색하려는 것이 내심 감추어진 바램이었다. 내 시간을 자유롭게 배움에 사용할 수 있는 지적 성장의 황금기였다. 문단 등단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회장 상’, 그리고 훗날 '재외동포문학상'이 어렵게 내린 나의 결심을 크게 두둔해 주었다.
동신시니어대학에 문학 강사로, 남편은 노인건강 강사로 초청되어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한 학기에 45명 정도, 대학에 등록하는 시니어들의 주요 관심사와 목표는 건강유지였다. 육신의 건강, 정신적 건강, 정서적 건강, 그리고 영적 건강유지가 가장 큰 지상 목표였다. 정서적 건강유지의 한 방편으로 문예강좌가 포함되어 있었다. 가장 쉬운 방법으로 자서전 쓰기를 시작하였다. 숙제로 내 준 자서전에 평을 해주면서 글짓기 강의를 하였다.
특강시간에 도자기를 만들고, 그림 그리기와 그림에 색칠하기를 하면서 심리상태와 정서적 주관을 밝혀보았다. 함께 운동하고 게임하고 식사를 하면서 어르신들의 성품과 기호를 알게 되고 연령별 차이도 발견할 수 있었다. 학생들이 뼈대가 세워지는 글을 쓸 때쯤, 학생의 전반적인 성품과 사고의 향방, 가정 소사를 알게 되었다. 하나도 같은 것이 없는 어르신들의 인생철학을 배운 것이다.
이것이 자격이 되고도 남는다는 그 자격일까. 8년 16학기를 새롭게 돌아보다가 탄성이 절로 나왔다. 한 학기 45여 명씩 그 많은 학생들을 상대로 8년간 개별연구 (Case Study)를 하였구나.
시는 쓰기에 따라 얼마든지 건설적인 25 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친히 실습으로 터득한 시간이었다. 또 하나의 자루, 삶의 땀방울이 수정알처럼 담긴 비단 자루를 조심스레 묶는다. 내가 받는 박사학위는 다분히 경험에서 쌓인 생각의 전수이고 실생활에 의해 얻은 기본적인 노인철학일 것이다.
손정숙 (수필가/캐나다문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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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원 기자 (press2@koreatim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