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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무죄(無罪)다
권천학 | 시인·K-문화사랑방 대표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Dec 02 2023 11:54 AM
꽃으로 누군가를 때리면 맞는 사람이 아플까? 꽃이 아플까?
처음 엉뚱한 듯한 그 질문을 들었을 때 글쎄~ 하고 잠시 생각을 했다. 꽃으로 맞는다는 것 자체를 생각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퍼뜩 떠오른 것은 나만의 시론(詩論)인 <식물성의 시 쓰기>였다.
문학의 길을 들어서서 밑도 끝도 없이 내달리면서 시에 매달리던 1980년대, 방황과 갈등을 넘어서고자 하는 내 자신의 문학 행위에 대한 자세를 곧추세우기 위하여 스스로 세운 나만의 이론이다. 그렇게 시작한 나의 시론 <식물성의 시 쓰기>를 지금까지 마음속에 품고 골똘히 추구해 오고 있다. 그 질문은 나의 내면에 가라앉아 있는 의식(意識)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 질문이 탤런트 김혜자 씨의 『꽃으로도 때리지 마세요』라는 책 제목에서 비롯되었음도 나중에 알았다.
언스플래쉬 제공
꽃이 아플까? 맞는 사람이 아플까?
어디 꽃과 맞는 사람뿐일까. 때리는 사람의 마음도 아프겠지, 더하여 이를 지켜보는 사람조차도 아프겠지.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 나도 아픔을 느낀다.
맞는 사람이야 맞을 짓을 했다 치더라도, 죄 없이 폭행의 도구로 사용되면서 꽃은 망가진다. 꽃이 무슨 죄인가?
언젠가, 동네 안 큰길 바닥을 하얗게 덮고 있는 꽃잎들을 보았다. 길옆의 담장 안에 서 있는 커다란 목련 나무에서 떨군 도톰하고 뽀얀 목련 꽃잎이었다. 가까이 가보니 꽃잎 위에 자동차 바퀴자국이 선명하게 찍힌 채, 검게 짓뭉개져 있었다. 갑자기 알큰하게 아려옴을 느끼며 뭉개진 꽃잎들을 주워들고 그 자리를 서성였던 기억이 난다. 나는 왜 그 상처가 아름답게 아픈 상처로 보였는지, 지나간 트럭 운전사는 꽃의 아픔을 생각이나 했을까? 아니 꽃 같은 것을 생각이나 했을까. 그렇게 아린 마음을 가슴에 품으며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었다.
꽃을 도구 삼아 때리는 사람도 과연 마음이 아플까? 아픈 사람도 있겠지만 무덤덤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무심히 지나간 트럭 운전사처럼.
근래에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시국이 연관 지어지면서 세상 돌아가는 것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法)은 꽃이다.
범법자나 피의자를 가리는 좋은 도구여야 할 법이 오용되고 남용되어 많은 사람들 가슴에 상처를 낸다. 비뚤어진 힘이 되어 제거하고 싶은 사람을 쓰러뜨리기 위해 몽둥이로 휘두르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기울어져, 기울어진 운동장이 된다.
권력(權力) 또한 꽃이다.
정의를 위해 쓰여야하고 정의를 지켜야 할 의무를 실행하는 권력이어야 함에도, 그 본연의 직분에 어긋난다면 결국 정의, 정의로움을 파먹거나 무너뜨리는 것은 악(惡)의 꽃일 뿐이다.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눈 둘 곳을 찾지 못해 속만 태운다.
법이나 권력을 꽃이 아니라 막대기나 몽둥이로 삼는 작금의 현실과 수없이 목격해야 하는 여러 국면들이 실소(失笑)와 허탈(虛脫)과 불신(不信)의 씨앗을 품게 한다.
법이라는 꽃, 혹은 권력이라는 꽃을 몽둥이 삼아 휘두르는 사람의 마음이 아플까. 그나마 눈 딱 감고 모른 척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용기 없는 사람이거나, 기회주의자이거나, 구차한 사람이 아닐까.
싫든 좋든, 반갑지 않은 그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입속으로 뇌이거나,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 혹은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하고 서글픈 곡조에 한탄의 마음을 실어 잠시 정신승리로 삼는 위로를 대신할 뿐이다.
꽃은 무죄(無罪)다.
억울하게 뭉개졌을 뿐이다. 아름다움과 향기로 사람의 마음을 치유해야할 꽃이 본의 아니게 아름다음도 향기도 잃었다. 본디의 모습을 잃은 꽃은 더욱 처참하고 지저분하다. 꽃으로서의 존재가치가 사라져버렸다.
지금 나의 뜰에는 겨울을 부르는 가을바람이 차다. 찬바람 속에 가을국화가 아직은 생생하게 피어있다. 늦게 핀 데이지도 노란 꽃송이를 쌩쌩하게 세우고 있다. 그런가하면 급하게 닥쳐온 저온에 맺은 꽃송이들조차 미처 피워내지 못한 채 시들어버린 무궁화와 들깨도 있다. ‘인디언 썸머, 그 후 초췌하던 그 모습이 더욱 급속히 메말라버렸다.
쌩쌩한 국화나 데이지들은 태생적으로 찬 기온을 잘 견뎌낼 수 있는 면역력을 가진 것이겠고, 맺어놓은 꽃송이마저 접은 채 일찍 시들어버린 무궁화나 들깨는 일찍 찾아온 한파(寒波)라는 권력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일 터이니. 무서운 힘으로 덮쳐오는 막강한 권력이 그들에겐 도저히 맞설 수 없는 불가항력이었으리라 생각하면, 그저 쉽게 나약함을 탓할 수만은 없다.
생생한 국화와 데이지, 시들어버린 무궁화와 들깨,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얼마나 착잡할까? 생생한 국화나 데이지도 머지않아 지고 말텐데... 그런 그들 모두를 지켜보는 나 또한 착잡하다 못해 무겁게 가라앉는다. 다가올 겨울이 더욱 차갑게 느껴진다.♠
권천학 | 문화컨설턴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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