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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운명의 바람 앞에 흔들리는 아일랜드 독립전쟁과 내전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Feb 06 2024 11:57 AM
최근에 “오펜하이머”라는 영화가 극장가를 강타하고 있다. 내용은 원폭개발, 이른바 '맨해튼 프로젝트'의 비하인드 스토리로 개발책임자인 유대인 핵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생애와 사상편력을 흥미있게 그린 영화다. 주인공을 맡았던 킬리안 머피(Cillian Murphy·47)는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고 아카데미 및 BAFTA에서도 수상이 유력시 되고 있다.
아일랜드 출신인 푸른 눈을 가진 킬리안 머피가 인상깊은 연기를 펼친 영화 중 2006년 개봉된 아일랜드 현대사의 비극을 그린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The Wind That Shakes the Barley)'이 있다. 켄 로치 감독의 작품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영화 속 장면: 자유국파, 즉 조약찬성론자인 형 테디 오도노반은 조약반대파인 동생 데미안(킬리안 머피)을 설득하지만 실패하고 결국 그를 처형장에서 총살시킨다. 이념은 무섭다. 피보다 더 진하다!
이 타이틀은 아일랜드 의사이자 역사학자였던 로버트 D. 조이스(Robert Dwyer Joyce, 1836~1883)가 쓴 아일랜드 전통 발라드곡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여기서 '보리'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반란에 참여할 때 호주머니에 보리 또는 귀리를 넣고 행군하는 관습에서 유래했는데, 영국의 탄압에 저항하는 아일랜드는 매년 봄에 피어나는 보리처럼 시들지 않고 끝까지 투쟁할 것임을 상징한다고 한다.
배경은 1920년, 아일랜드의 코르크 카운티(County Cork). 이 시대와 지명은 아일랜드의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상당히 중요하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13년 8월 26일에 발생한 '더블린 직장폐쇄(Dublin Lock-out)'는 대규모 노동쟁의로 1914년 1월 18일까지 거의 5개월간 지속된 아일랜드 역사상 가장 격렬했고 또 중요한 노동쟁의로 평가받는다. 이를 주도한 제임스 코놀리(James Connolly, 1868~1916)는 아일랜드 사회주의공화국당 및 시민군(ICA, IRA의 전신)을 창설하여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이던 1916년 4월 부활절 기간 동안 이른바 '부활절 무장봉기'를 또 일으켰으나 곧 영국에 진압 당하고 주모자로 체포되어 총살형을 당했다.
이를 계기로 아일랜드 국민의 지지를 얻은 공화파인 신페인(Sinn Fein, '우리 자신'이란 뜻)당은 1918년 11월 총선에서 105석 중 73석의 다수의 의석을 얻어 아일랜드 의회를 설립, 1919년 1월 21일 아일랜드가 독립국임을 세계에 선언하고 아일랜드 공화군(Irish Republican Army·IRA)을 공식 아일랜드 군대로 선포한다.
그러나 세계는 그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영국은 그들을 더욱 가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영국에 대항하는 '아일랜드 독립전쟁(Irish War of Independence, 1919~1921)'이 시작된다. 이에 1920년, 아일랜드 남부 지역인 코르크 카운티에서 게릴라 투쟁이 집중적으로 일어난다. 수세기에 걸쳐 반란으로 점철된 역사 때문에 별명이 '반란의 도시(rebel city)'인 코르크 시는 20세기에 아일랜드 독립 운동의 중추가 되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때, 1822년부터 약 1세기에 걸쳐 가톨릭 교도와 개신교 교도 간의 살벌한 종교대립을 수습하는 일에 골몰해 오던 아일랜드 경찰청, 즉 RIC(Royal Irish Constabulary)를 지원하기 위해 영국은 임시군대를 파견하는데, 그들이 이른바 '블랙&탠스(Black and Tans)'이다. 너무 긴박한 상황에서 임시로 영국군의 카키복에다 검은색 줄을 넣어 입힌 군복 색깔에서 그런 이름이 생겨났다.
그들은 1차 대전 종전 후 퇴역한 영국 및 아일랜드 육군 장병들 중 지원자를 받아 구성돼 3개월의 단기 훈련을 받고 아일랜드로 급파되었다. 그러나 치안 목적이라는 미명 아래 아일랜드 고유어인 게일어(Gaelic)도 못하게 하고, 민간인을 폭행하고 죽이고, 그들의 재산도 몰수하는 등 잔혹하고 몹쓸 만행을 저질렀다.
아일랜드의 거센 항쟁에 드디어 영국은1921년 12월 아일랜드와 협정(Anglo-Irish Treaty)을 맺고, 그들의 자치를 허용한다. 그러나 북아일랜드인 얼스터(Ulster) 6개주 지역을 제외한다는 내용에 IRA는 반발하고, 결국 조약에 찬성하는 이들과 반대하는 이들로 분열하고 만다. 이 결과 1922년 12월 찬성파에 의해 아일랜드 자유국(Irish Free State)이 탄생하면서 블랙&탠스와 RIC는 사라졌지만 '아일랜드 내전(Irish Civil War, 1922~1923)'이란 집안싸움으로 양상이 바뀐다.
독립운동 때 같이 싸웠던 영웅이 살인자로, 서로 이름과 얼굴을 알던 동지가 희생자로 전락하여 영국군과 싸울 때보다 더 격렬하게 부딪치는 이 잔혹한 내전 장면은 우리나라의 처지와 같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가장 진하고 처절한 슬픔을 자아낸다. 피는 물보다 진하기 때문일까?
마치 우리나라의 1919년 3·1운동의 독립선언문과 그 이후에 일어난 일본제국의 탄압과 우리 독립군의 활약 그리고 1945년 8·15해방과 1950년 동족 상잔(相殘)의 6·25전쟁 등 일련의 과정이 아일랜드의 독립전쟁 및 내전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조약반대파인 데미안 오도노반(킬리안 머피)은 자유국파, 즉 조약찬성론자인 형 테디(패드레익 딜레이니)에 의해 처형당한다. 이념은 무섭다. 피보다 더 진하다! 데미안은 “무엇에 반대하기는 쉽지만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은 어렵다”는 말을 남기고 죽는다.
결국 영국의 지원을 받은 자유국파가 승리하고, 1923년 4월 말에 내전이 공식 종료되었지만, IRA는 지금까지 1921년의 영국·아일랜드 협정을 무효화 하고 북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통치를 종식시키기 위해 투쟁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 무렵 1912년부터 IRA에 의해 행진곡으로 불려지던 '군인의 노래(The Soldier's Song)'는 1926년에 아일랜드의 정식 국가(國歌)로 채택되었다.
아일랜드는 우여곡절 끝에 1931년 12월 11일 코먼웰스(Commonwealth)에 가입했으나 1948년에 아일랜드 의회가 '아일랜드 공화국법'을 제정하면서 1949년 4월 18일에 영국 연방에서 탈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끝으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노래 가사 일부를 소개한다.
"… 내 슬픈 마음은 둘 사이에서 다투네/ 오래된 사랑과 새로운 사랑 사이에서/ 오래된 사랑은 그녀를 위해/ 새로운 사랑은 내가 열렬히 생각하는/ 사랑스러운 아일랜드를 위해/ 그동안 산골짜기로 미풍이 불어와/ 황금색 보리밭을 흔들었네….” (끝)
손영호 | 칼럼니스트·국제펜클럽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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