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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고리시스터’를 만든 이철
황현수의 들은 풍월<2>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Jun 05 2024 12:16 PM
요즘, 한국 최대 가요기획사 <하이브>의 방시혁 의장과 걸그룹 ‘뉴진스’가 소속된 <어도어> 민희진 대표와의 갈등이 화제다. 방시혁과 민희진의 다툼은 결국 그들이 만든 걸그룹 ‘아일릿’(하이브)과 ‘뉴진스’(어도어)때문이다. 방시혁이 만든 ‘아일릿’이 지난 4월 걸그룹 순위 1위(한국기업평판연구소)를 하면서, 민희진이 자신의 만든 ‘뉴진스’를 모방했다며 자존심을 건 싸움이 시작됐다. 한겨레신문의 조사에 따르면 2024년에 데뷔 예정인 걸그룹이 60~70팀 정도나 된다고 한다. 최근 10년 사이에 만들어진 걸그룹도 250개다. 이중 우리의 기억에 남는 그룹은 몇이나 될까? 나같이 대중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도 1세대 걸그룹인 핑클이나 S.E.S., 베이비 복스, 소녀시대, 원더걸스 정도를 기억할 뿐이다.
하지만, 좀 더 멀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이러한 걸그룹이 있었다. 1930년대, 비록 나라는 암울했지만 서양의 신문물이 들어오고 신문, 라디오, 영화 등이 발달하며 이전까지 없던 대중문화가 곳곳에서 꽃핀다. 음악계도 마찬가지였다. 한쪽에서는 여전히 도제식 전통 음악이 이어지는 한편, 다른 한쪽에서는 현대적인 음반사가 자리 잡으며 전속 작곡가와 작사가들이 가수들과 협업을 하기 시작했다. 이철이 설립한 오케레코드사도 그중 하나였다. 이철은 오케레코드사 가수들 중에서도 실력이 뛰어난 여성들을 모아 팀을 만든다. 이들이 바로 공식적인 팀명이 존재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걸그룹인 ‘저고리시스터’다.
우리나라 최초의 걸그룹인 ‘저고리시스터’는 오케레코드사의 전속 가수 이난영, 장세정, 박향림, 김능자 등이 멤버로 활동하였다.
‘저고리시스터’는 우리 전통 한복인 저고리와 서구식 드레스를 번갈아 가며 입었다. 여러 이유로 멤버는 계속 바뀌었지만, 5~6인조는 유지했다. 당대 잘 나간다던 가수들을 이철이 직접 스카우트한 만큼, 개개인의 역량이 뛰어났다. 당대 최고 스타였던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과 '연락선을 떠난다'로 가요계에 한 획을 그은 장세정이 고정 멤버였고 박향림, 김능자 등 전속 가수들이 번갈아 출연한다. 지금으로 따지면 뛰어난 기량을 지닌 여성 솔로 가수들을 모아, 일종의 프로젝트 걸그룹을 만든 것이다.
‘저고리시스터’는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공연을 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지만, 아쉽게도 한국전쟁을 겪으며 자료 거의가 유실되었다. 영상은 물론이고 공식 음반도 발견되지 않아 어떤 음악을 했는지도 정확하게 알 수 없는데, 유일하게 음원이 남아 있는 곡이 '처녀합창' 정도다.
그 일제강점기에 ‘저고리시스터’를 만든 이철은 누구인가? 한마디로 그는 일제강점기 최고의 대중 예술 흥행사이자 음반 기획자였다. 이철은 1903년 충남 공주시에서 태어나 1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친척 이인규의 양자가 된다.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한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으나 양아버지의 전폭적인 후원 하에 연희전문학교 악대부에서 활동했는데, 색소폰을 잘 불어 악대부의 리더로도 활약한다. 그러나 생활고로 연희전문을 중퇴한 뒤, 악기를 다루는 취미를 살려 1924년부터는 영화관에서 색소폰과 트럼펫을 연주하는 악사로 일했다.
1933년 이철은 아내 현송자의 도움으로 오케레코드사의 지사장이 된다. 그는 전속단과 <조선악극단> 등을 운영하며 일제강점기 대중문화 사업의 거장으로 활동한다.
이철은 연희전문학교 입학 직전에 같은 교회 신자인 현송자를 처음 만난다. 그녀는 이철보다 4살이 연상인 유부녀였다. 그녀의 남편은 대한제국 학무국장을 지낸 윤치오였고 현송자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이었는데, 나이가 30년이나 차이가 났다. 현송자는 20세에 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가 메이지여자대학에 유학했던 인텔리였다. 빼어난 미모에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 사교계의 유명 인사이기도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대한제국의 고관이었고, 어머니는 배정자로 조선의 기밀 정보를 유출하는 스파이였고 일제의 외교관을 지낸 인물이기도 하다.
교회에서 만난 현송자와 이철은 은밀히 사랑을 하지만, 1930년에 들어 그들의 밀회가 세간에 알려지고 만다. 그 뒤, 현송자는 결국 윤치오와 이혼하고 트로이카라는 술집을 운영하다가 이철과 재혼한다. 이후 새 남편이 된 이철의 음악 사업을 적극 돕는다. 이철은 현송자의 힘으로 기회를 만들었다. 현송자는 이철이 그동안 쌓아온 음악 관련 경력을 고려해, 일본 유학 시절의 인맥을 총동원하여 그가 음반회사 지점을 운영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1933년 이철은 오케레코드사의 지사장이 된다.
오케레코드사는 일본의 제국축음기상회와 관련을 맺기는 했지만 한국인이 세우고 독자적으로 운영한 최초의 음반회사로 평가된다. 그때 이철이 만든 음반이 약 1천여 점이나 되는데, 이러한 노력은 결과적으로 유성기 음반의 대중화로 이어졌다. 민요, 판소리, 창극, 가야금 병창 등의 국악 음반과 유행가, 신민요 등의 가요 음반을 다수 제작하였고, 만담, 동요, 성악 등의 음반도 제작하였다.
또한 이철은 음반 발매뿐 아니라 전속 예술인들을 공연에 활용할 수 있도록 조선악극단을 설립, 운영하여 한국 대중예술사 초창기에 연예 매니지먼트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복수, 손목인, 이난영, 김정구, 남인수, 이화자, 장세정, 이인권, 조명암 등 수많은 인기 가수와 작곡가, 작사가들을 그가 발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6년, 일본의 제국축음기주식회사가 이철의 지사장 직위를 박탈하고 문예부장으로 강등시킨다. 이 일을 계기로 음반 제작에서 손을 뗀 뒤 오케그랜드쇼단, 조선악극단, 신생악단 등을 운영하며 공연단 운영 사업에 전념한다. 1938년 이철은 ‘오케 그랜드 쇼’를 설립하여 모든 기획을 도맡았다. 가요와 음악, 무용을 섞어 연출하여 가요극을 곁들인 쇼를 만든다. 1939년에는 조선악극단을 본격적으로 발족시켜 일본 도쿄 아사쿠사의 가게츠극장에서 공연한다. 고복수, 손목인, 이난영, 김정구, 남인수, 이화자, 장세정, 이인권 등 오케레코드사의 쟁쟁한 전속 가수들이 총출동하여 조선의 민족적 색채를 배합한 공연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었다. 도쿄 공연 이후 조선악극단은 오사카, 나고야, 교토, 고베를 비롯하여 일본의 여러 지역에서 순회공연을 한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태평양 전쟁 지원을 위해 가요계가 공연하면서 친일 활동을 했을 때, 오케레코드사 이철의 악단도 조선과 만주, 상하이 등지를 순회하며 인기를 끌었다. 1944년에 만주 공연 중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어 귀국했다가 보름 만에 사망한다. 그의 나이 불과 41세였다. 요절 이후, 역사적 격동의 혼란 속에서 식민지 대중 음악계의 거인 이철의 존재는 차츰 잊히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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