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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진 한(恨)의 항아리
손정숙 | 수필가·캐나다문협
- 연지원 기자 (press2@koreatimes.net)
- Jun 22 2024 10:35 AM
봄을 찾아 빛과 색을 자신에게 비춰보려 시도한 나들이였다. 이그니트 갤러리(Ignite Gallery)에 도착하니 김미현님이 반색하며 안내장을 건네주었다.
‘한’의 계량'(The Measure of Han). 주제 발표, 졸업 작품 전시회라는데 제목이 특이하여 바짝 긴장되었다. 긴 복도를 지나 아래층 전시장에 들어서면서 또 놀랐다. 표구한 그림 전시회가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행위예술 전시회인 것이다.
지난 이 년간 오로지 한 가지 주제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는 전시장은 행위에 사용된 소품 전시장과 주제를 위하여 야외와 실내에서의 예술 행위장. 세 곳이었다. 전체적으로 약한 조명의 어둑한 전시장. 소품 전시장에는 빨강 댕기, 회색 가삼, 무명 저고리 치마, 한지 부채 등이 격자 나무 벽에 그림처럼 걸려 있었다. 한국 전통에서 유래한 행위예술일 것이라 첫눈에 짐작이 되었다.
야외 전시는 싸늘한 날씨 때문에 실내에서 영상으로 진행되었다. 까만 벽에 펼쳐지는 영상 사진에는 다듬지 않은 맨땅에 커다란 원형의 낮은 시멘트 울타리가 있고 그 중앙에 작은 원형 시멘트 섬이 있었다. 섬의 중심에서 큰 울타리 사이에 서까래처럼 까맣고 기다란 나무 기둥이 걸쳐 있었다. 섬 중심에 고정된 기둥의 한끝은 움직일 수 있어 언뜻 보기에 커다란 맷돌짝 같았다.
김미현 작가의 행위예술 장면. 사진 손정숙
화가는 맨발에 가삼을 걸치고 거의 앉은 자세로 허리를 구부려 나무 기둥을 밀며 둥그런 원둘레를 한 바퀴 돌았다.
작은 분수만큼이나 큰 시멘트 울타리를 맨발로 도는 몸짓과 구부린 자세, 힘들게 밀치는 얼굴의 표정과 돌아가는 속도에서 자신도 모르게 점점 숨이 차오르고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흐르듯 온몸이 젖어왔다.
또 한 바퀴. 까만 나무 기둥으로 표상된 ‘한’의 집합체는 무엇일까. 인간 일생의 노고는 기둥을 돌리는 수고와 시간에 정비례한다는 뜻일까.
주제의 중심 전시장인 넓은 홀은 항아리 전시장이었다. 하나도 아닌 오십여 개의 옹기 항아리가 걸어 다닐만한 통로를 두고 여러 줄 바둑판처럼 줄지어 놓여 있었다. 어떤 것은 깨어져서 깨진 조각이 소복하게 쌓인 것들도 있었다. 화가는 어느새 녹색 무명치마, 자색 저고리로 갈아입고 항아리 앞에 엎드려 있었다.
가슴에 안기도 하고 돌리기도 하던 항아리를 놓고 깊은 절하기를 두 번, 다음엔 머리에 항아리를 이고 천천히 걷기 시작하였다. 실내에는 낮고 가느다란 거문고 소리가 바람결처럼 흐르고 화가의 발걸음은 소리에 끌리듯 아주 느릿하게 한 발짝씩 내디뎠다. 한 곳에 이르러 두 발을 붙이더니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바닥에는 새까만 헝겊으로 띠같이 줄이 그어져 있었다. 내내 감기듯 눈길을 아래에만 두고 걸어온 화가의 눈이 반짝 떠지는 순간 ‘쩽그렁~’ 항아리 깨지는 소리가 홀에 진동하였다.
나도 모르게 온몸이 떨렸다. 눈과 귀와 몸이 동시에 반응하는 날카로운 떨림이었다. 주저앉아 깨진 질그릇 조각들을 치마에 쓸어 담더니 천천히 다시 돌아가 항아리가 원래 있던 자리에 소복하게 둔덕을 만들더니 그 앞에 엎드려 깊은 절을 하였다. 행위예술 전시는 끝났다.
행위예술(Performance Art)이란 회화나 조각 등의 전통적인 장르에서 표현시킬 수 없는 표현 욕구를 신체로 표현하는 예술 행위라 정의한다. 유진섭 교수는 관중 앞에서 예정된 코스를 실행한다는 것을 공통점으로 하는 다양한 행위 양식을 포괄하는 용어로 아트 이벤트, 라이브 아트 등과 교류될 수 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보고 듣고 느낀 대로 나름의 그림 감상을 반추하여 보았다.
‘한’이란 욕구나 의지의 좌절과 그에 따르는 삶의 파국, 그에 처한 편집적이고 강박적인 마음의 자세와 상처가 의식, 무의식적으로 얽힌 복합체를 가리키는 한국 고유의 민간 용어라 뜻풀이가 되어있다. ‘단순하게 원한이나 유감, 혹은 애석히 여겨 후회하다’로 한국 민족의 성품 밑에 깔린 통속적 민족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적이고 불분명하고 침잠된 회색의 분위기가 담긴 상태로 삶의 용솟음보다는 불만과 죽음에 대한 영감으로 젖게 하는 암시의 분위기가 더 강하다.
독재와 금력과 권력의 억압에 시달린 민족성 저변에는 탄압과 죽음에 대한 극복할 수 없는 패배와 분노 의식이 굳어져 왔을 것이다. 바닥의 까만 헝겊 띠 줄은 3.8선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한국인의 민족성에 동족상잔의 분노와 부조리까지 가세하여 ‘한‘의 극치를 이룬 역사성의 표출이라는 해설이었다.
화가는 행위가 자유롭듯 죽음과 불만의 늪, ’한‘에서 벗어나 모든 장르를 다 포괄할 수 있는 미술가가 되고 싶다고 하였다. 한에서 탈피하자! 무언의 웅변을 찬양하다가 문득 또 다른 깨달음이 나를 흔들었다.
사람은 죽음을 전제하고 태어난다는 사실. 엄밀히 말하면 매일의 삶은 죽음으로 다가서는 행진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이 죽음과의 격전이라면 우리의 일생은 처음부터 ‘한’의 연속이다.
궤도를 따라가듯 하루하루가 반복된다면 우리의 일생은 좌절과 한숨뿐이지 않겠는가.
항아리를 깨고 탈피하자.
그리고 비상하자.
쨍 그 렁~, 울릴 때.
손정숙 | 수필가·캐나다문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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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원 기자 (press2@koreatim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