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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어
황현수의 들은 풍월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Jun 26 2024 12:57 PM
지난겨울부터 산에 다니고 있다. “걸어 다닐 수 있을 때까지가, 내 인생이다”라는 말이 걸려 “올해는 산이라도 좀 다녀야지” 마음먹고 있었는데, 친구가 “좋은 산모임이 있는데, 같이 걸을래요?”해서 따라나섰다. 토요일마다 평균 12~14 Km 정도를 걷는데 처음 몇 주는 산행을 다녀온 뒤, 몽둥이로 두드려 맞은 것처럼 앓아누웠다.
이 산악회는 1993년에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친구들 몇몇 이서 건강도 챙기고 얼굴도 보자는 생각으로 10여 명이 다니다가, 차츰 멤버가 늘어서 <아리랑산악회>라는 이름도 지었다”라고 윤길근 등반대장은 말한다. 이 산악회는 윤 대장과 이의식 대장이 매주 번갈아 가이드를 하는데, 31년 동안의 축적된 노하우 덕분에 매주 다른 코스를 다닌다. 처음에는 “도대체 산도 별로 없는 이 토론토에 매주 다른 곳을 다닐 산행 코스가 있을까?” 싶었지만, 다양한 트레일을 쫓아다니며 새삼 놀라고 있다.
<아리랑 산악회>는 평균 나이가 78세로 아마 토론토의 산모임 중에서는 가장 어르신 모임일 게다. 20여 년 전부터 매년 1회 정도, 미국이나 로키산맥 원정 산행도 하고 있단다. 초보자인 나는 항상 뒤처져, 후미에서 지켜주는 김영해 선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그는 “창립 멤버인 이서구 전 대장(1936년생)은 연세가 87세이지만, 지난해까지 산행에 참여하셨고, 제스퍼 로키산맥 트레일을 17번이나 다녀올 정도로 열정적으로 산악회를 챙겼다”라며 “이렇게 주말에 걸으면 1주일을 잘 지낼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기죠. 빠지지 말고 꾸준히 걷다 보면 남들처럼 잘 걸을 수 있습니다”며 격려를 준다.
산악회 막내인 유형관(1959년생)은 “이렇게 나이 들어서 젊게 사는 어르신을 빗대어 ‘청어’라 한대요. 청년처럼 사는 어르신이란 뜻이죠. ‘청어’들의 공통점은 미래에 대한 호기심이 있고, 공익적인 것에 욕심이 없고, 긍정적이고 잘 웃어요”라고 하길래, “어, 난 호기심도 많고 욕심도 없고 잘 웃는 편인데…내가 청어 아닌 감?”했더니, 어림없다는 표정으로 “아이고, 일단 건강하고 잘 걸어야 ‘청어’가 될 수 있죠”해서 웃었다.
또 다른 청어 이야기다. '눈 본 대구요, 비 본 청어다'라는 속담이 있다. 대구(大口)는 눈이 오는 겨울에, 청어(靑魚)는 봄비가 온 후에 잡힌다는 말이다. 포항 앞바다에서는 초겨울부터 초봄까지 영일만으로 산란을 위해 들어온 청어를 많이 잡았다. 비 온 뒤 형산강을 타고 내려오는 풍부한 플랑크톤은 산란을 앞둔 청어들에게 더없이 좋은 먹거리였다. 일제강점기 때는 전국 어획량의 70%가 여기서 잡혔다고 한다. 하지만, 동해안은 소금이 귀해 먹을 것도 부족할 판이었으니 그 많은 청어를 염장할 소금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청어는 덕장에 말리면 얼고 녹기를 반복하면서 기름이 배어들고 숙성이 되었다. 이때 청어의 눈을 꿰 말렸다고 해서 '관목청어(貫目靑魚)'라 했다. 경상도에서는 '목'은 메기, 미기 등으로 불린다. 관미기 보다는 관메기가 익숙하지 않았을까 싶다. 입에 달라붙지 않아 'ㄴ'이 탈락하면서 발음이 자연스럽게 과메기가 되었을 것이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청어는 맛이 담박하다. 산란하러 올 때는 바다를 덮을 정도로 많다. 청어는 주기적으로 나타나며 한양이나 경기도에서는 이 생선을 비웃이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일보
과메기는 통마리와 배지기, 두 가지 방식으로 말린다. 통마리는 내장을 제거하지 않고 굴비처럼 엮어서 말리고, 배지기는 배를 갈라 내장을 제거한 후 대나무에 걸어서 말렸다. 과메기는 온도가 중요하단다. 영하 5℃에서 영상 5℃ 그리고 바람이 잘 부는 곳이어야 좋다. 그래서 예부터 구룡포 바닷가가 과메기 덕장으로는 명당인 셈이다. 2022년에 아내와 함께 구룡포를 갔었는데 ‘일본인 가옥거리’가 아직도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청어를 잡기 위해 일본의 어부들이 이주해 정착했던 곳이라 한다. 식당에서 음식을 시켰더니, 제철이 아닌데도 밑반찬으로 기름기 좔좔 흐르는 과메기를 내 주어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곳 토론토 사람들이 이민 오기 전에 먹었던 과메기는 청어로 만든 것이 아니다. 우리가 고국에서 먹었던 과메기는 주로 꽁치로 만든 것이다. 1960년대까지는 청어가 많이 잡혔지만, 1970년대 들어 청어가 안 잡히고 꽁치가 많이 잡히자, 청어를 대신해 꽁치로 과메기를 만들었다. 그러다가 2017년부터 청어의 수확량이 늘고 꽁치의 어획량이 줄게 되자 청어가 다시 제자리를 찾고 있다고 한다.
한국의 고전 소설 <춘향전>에 청어 이야기가 있다. 변 사또가 어떤 기생을 비난하는 대목이다.
“이마 앞 꾸민다고 뒤통수까지 머리를 생으로 다 뽑고, 머릿기름 바른다고 청어 굽는 데 된장 칠하듯 하고, 입술연지를 벌겋게 왼뺨에다 칠하고, 분칠을 회칠하듯 하고, 눈썹 꾸민다고 양편에 똑 셋씩만 남기고 다 뽑고”
기생이 지나치게 꾸몄다고 비아냥거리는 거다. 머리에 기름을 너무 많이 발랐다고 ‘청어 굽는 데 된장 칠하듯 하다’라고 했는데, 이 속담은 요즘도 사용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청어를 구울 때, 된장을 매우 많이 발랐었다는 것도 알게 되는 글이다.
연세대의 이윤석 교수는 “청어는 한자로는 청어(靑魚)라고 쓰는데, 때때로 청어(鯖魚)라고 쓰기도 한다. 청어를 순우리말로는 ‘비웃’이라 표현했다. 1527년에 최세진이 쓴 <훈몽자회>라는 책에 청(鯖) 자를 ‘비 쳥’이라고 돼 있는데, 현재의 표기로는 ‘비웃 청’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말 사전>을 보면 청어를 ‘비웃’이라 한 것은 “서울의 가난한 선비들이 잘 먹는 값싼 생선이라 비유어(肥儒魚)라 하였는데, 이것이 변하여 비웃이 되었다”고 한다.
과메기는 청어의 배를 갈라 내장을 제거한 후, 덕장에 말리는데 얼고 녹기를 반복하면서 기름이 배어들고 숙성이 된다. 위키피디아
이제는 서울에서도 ‘비웃’이라는 말을 쓰지 않지만, 16세기 이전부터 청어를 ‘비웃’이라 사용했다는 기록을 여럿 찾을 수 있다. 조선후기 정약전의 <자산어보(玆山魚譜)>에 청어에 대한 기록이다. 정약전은 정약용의 형으로, 1801년 전라도의 흑산도로 유배 갔을 때 <자산어보>를 썼다. 그는 흑산도 근해의 어류에 대해서 기술했는데, ‘청어는 맛이 담박하다. 산란하러 올 때는 바다를 덮을 정도로 많다. 청어는 주기적으로 나타나며 한양이나 경기도에서는 이 생선을 비웃이라 했다’고 밝힌다.
난중일기의 내용이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다음 해부터 조선에는 이른바 대기근(1593~1594)’이 덮친다. 절대적인 식량부족으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을 정도로 먹을 것이 부족했다. 전쟁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군량을 확보하는 게 먼저였다. 하지만, 이순신에게는 한 가지 해결책이 있었다. 바로 청어였다. 수군을 동원해 어부들과 함께 청어 잡이로 수십만 마리를 잡아 곡식과 물물교환으로 군량미를 마련했다”고 한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는 영-불이 연합해서 원유 수송로인 말라카 해협을 막으려 하자, 일본제국은 “동해안에서 연간 50만 톤이나 잡히는 청어 기름만으로도 유류난을 극복할 수 있다”며 큰소리를 친다. 당시 동해는 세계 최대의 청어 어장이었다. 그러나 이 말은 허세만 떠벌린 전략적 발언이라고 밝혀져, 국제적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몇 주 전 ‘포항 영일만 앞바다에 막대한 양의 석유와 가스가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용산 대통령실이 밝혔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에도 이런 비슷한 유전 뉴스가 있어서인지 여론이 미지근하다. 포항 영일만 앞바다에 50여 년 만에 청어가 돌아왔듯, 유전도 잘 발굴하여 고국 경제에 보탬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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