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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국민의 승리'인가(하)
김성우 칼럼
- 캐나다 한국일보 (editorial@koreatimes.net)
- Jul 02 2024 03:33 PM
전 한국일보(서울) 주필
김성우 전 한국일보(서울) 주필
6. 국민의 눈높이를 높여라
너도 나도 “국민의 눈높이”를 들먹인다. 야당은 선거가 국민의 눈높이를 무시한 대통령에 대한 심판이라고 했고,
대통령도 선거에 지니 마지못해 국민의 눈높이에 부응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그 국민의 눈높이가 적정 수준인가. 국민의 눈높이가 너무 낮다.
눈높이를 끌어올려 놓고 그 높이에 맞추어야 한다. 그것이 지도자의 책무다. 국민의 낮은 눈높이에 무조건 따라가는 것을 천민민주주의라고 한다. 국민은 아니꼽다고 깔보듯이 눈을 아래로 깔지만 말고 지금 나라를 위해 무엇이 급선무인지 눈을 똑바로 뜬 채 직시해야 한다.
이 직시가 국민의 눈높이라야 한다. 초보운전자처럼 코앞만 보지 말고 멀리 전경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런데도 야당은 한사코 이 눈높이를 끌어내리려고 바람을 넣고 있고 여당은 덩달아 이 눈높이에 맞추겠다고 달래고 있다.
이제는 국민이 스스로 눈높이를 높여 정치 수준을 끌어올려야 한다.
우리 국민의 교육열이 나라를 일으킨 원동력의 하나였다. 고학력의 우리 국민은 유식하다. 그러나 지식이 곧 양식인 것은 아니다.
옛날의 왕조시대에는 우민정치였다. 백성이 너무 똑똑하면 안 되었다. 민주 국가의 교육은 민주 시민으로서의 소양과 국민 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 교육이 실패한 것이다. 교육 혁명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 사색당쟁의 역사는 유식한 선비의 국민층이 등장하면서 비롯된 것이다. 이들이 복상 같은 아무 실용성 없는 명분이나 가지고 다투는 사이 나라는 왜란에도 호란에도 속수무책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 역사교과서를 제기한 것은 혁명아의 딸다웠고 관철하지 못한 것은 그 후예답지 않았다. 당시 박 대통령은 혼자 고군분투했을 뿐 야당 측의 조직적인 방해 공작에 정부도 여당도 의지가 약했고 무기력했다.
엄호해 주는 맞불 하나 없었다. 국토가 갈라진 것도 서러운데 나라의 역사가 두 쪽으로 갈라지다니, 그 때가 찬스였다.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함으로써 돌파력을 잃었다.
그 후로 민주 시민의 교육은 후퇴하고 야당 측은 무혈 반격을 하여 지금 보무도 당당한 것이다.
7. ‘새나라 운동’의 제창
한국인은 모두 노래를 잘 부르고 춤도 잘 춘다. 어느 자리에서나 노래 하나 제대로 못 부르는 사람은 한국인이 아니다.
한국인은 이탈리아인, 러시아인과 함께 세계 3대 가수의 국민이다. 흥과 신명이 있는 특출한 국민이다. 한류가 세계를 제패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강의 기적”은 우리 국민의 이 흥과 신명이 동력이었다. 국민 총단결의 대합창이 이룩한 위대한 성과였다. 그 지휘자가 있었다.
민주화가 되었다고 해서 그 과정을 부인하면 안 된다. 그 과정에 부작용이 있었더라도 그 부작용을 부인하면 결과도 부인되어야 한다.
그 과정이 있었으므로 오늘의 성과가 있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독재의 오명 아래 국민을 단결시켰다. 민주의 미명 아래 국민은 어떻게 되었는가. 보라, 지금 그 극점에 와 있다.
국민들은 통일을 외치기만 했지 우리나라가 왜 분단이 되었는지, 왜 아직도 우리나라만이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있는지 진지하게 자성해 본 적이 있는가.
분단된 것은 외세 때문이라 치더라도 아직 통일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은 외세 때문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자작극이다. 지금 국론이 분열되어 나라가 위태로운 것도 우리 국민의 자작극이다. 통일을 외칠 자격이 없다.
“현명한 국민 여러분”은 더 현명해져야 한다. 국민끼리부터 소통하고 협력해야 할 때다.
궁지에서 나라를 살린 새마을 운동은 국민의 협동과 정신개조 운동이었다.
지금 다시 전 국민의 협동과 정신개조로 ‘새나라 운동’을 벌여 이 궁지의 나라를 구해야 한다.
8. 침몰하는 것은 세월호만이 아니다
다른 나라들의 정치 수준이나 국민 의식도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명심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다. 유례가 없으므로 비교할 나라가 없다.
특이 상황과 특이 조건 하에서는 국민의 자각도 특이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북핵 문제요 이념 문제다.
나라의 존립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친북을 들먹이면 야당이나 언론은 “철 지난 색깔 논쟁”이라는 상투적인 한 마디로 입을 막아버린다.
여당조차도 국민들이 듣기 싫어하니 표 떨어진다고 쉬쉬 한다. 어찌 이것이 철 지난 일인가. 북한이 미사일을 펑펑 쏘아대는 이 마당에 지금도 한창 철이다. 갈수록 더욱 한창 철이다. 총선에서는 이념 논쟁이 오히려 더 쟁점이라야 했다. 이념 논쟁은 자나깨나 후렴처럼 되풀이되는 쟁점이라야 한다.
문재인 정권은 미·북의 핵협상 때 한국을 “중재자”로 자처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이 미국을 겨냥한 것이던가. 핵을 미국 땅에 떨어뜨릴 수는 있어도 그것은 자멸의 길임을 북한이 더 잘 안다.
북핵의 주적은 당연히 한국이다. 한국이 당사자 중의 당사자다. 그런데도 한국이 중립국이기나 한 것처럼 중재자라니,
더구나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당시 야당이던 지금의 여당조차 멀거니 쳐다보고만 있었으니, 이런 마비된 대북관이 나라를 무장해제시키고 있다. 그래서 반공이라면 벌떼같이 달려들면서도 친공은 싹 입 다문다. 통일이 염원이라지만 국토 통일은 국민의 대북관 통일이 먼저다.
전 국민의 일치단결은 핵보다 더 무섭다. 먼저 남한의 국민 의식이 완전한 자유민주주의로 통일 되지 않는 한 남북통일은 대박이 아니라 대재앙이다.
많은 국민들은 정신 무장이 피로하다고 동조하고 있다. 로마제국이 왜 쇠망했는지 아는가. 군대의 기강이 해이되어
갑옷이 무겁다고 벗어 던지면서 망하기 시작했다.
자유주의라 하여 자유를 억압하는 자유마저 용납하는 것은 자유주의의 자살행위다. “민주주의는 자신을 포기하면서 자신을 방위할 수 없다”고 했다.
자유는 자유를 모독하는 자들을 반드시 징벌한다. 자유를 오용하고 악용하는 자들은 반드시 자유에 복수 당한다. 자유의 복수법은 자유를 빼앗는 것이다.
극성 지지자들의 팬덤이 위험하다. 정치적 팬덤은 우상화의 바로 전 단계다. 우상화의 모델은 멀리 있지 않다. 주체사상에 광희하는 북한 주민을 흉볼 것 없다.
남한 주민도 저런 체제하에서는 꼭 저렇게 될 것이다. 동족의 유전자이므로. 침몰하는 것은 세월호만이 아니다.
침몰하는 것은 다 조짐이 있다. 그 조짐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지난 총선 결과는 그 조짐이었다. 골든타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재외의 한 언론인은 총선 결과를 보고 “그토록 절규하던 민주주의가 이런 민주주의였습니까”하고 통탄했다.
참으로 얼마나 목쉬도록 외친 민주화였던가. 그러나 지금 그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국민이 민주주의를 수호할 책임 있는 민주 시민이 되지 않는 한 아직 이 땅에 민주주의는 없다.
지금 이 대혼란의 국난이 “국민의 승리”인가. 국민의 승리가 아니라 국민의 패배다.
나라가 망해도 국민은 항상 옳은가. 망국의 국민도 국민인가. 지금 우리 국민은 언제 폭발할지 모를 화산 위에서 일부는 춤추고 있고 일부는 잠자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희극시인 아리스토파네스의 ‘새’에 나오는 포세이돈의 목소리로 묻는다. “아, 민주주의여, 도대체 우리를 어디로 몰고 가려는가?” (끝)
김성우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1957년 졸업. 한국일보 고문, 주필, 편집국장, 駐佛특파원 등 역임.
저서: '수평선 너머에서', '인생을 묻는다', '명문장의 조건', '돌아가는 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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