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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성별·계급의 장애 맞선 ‘사회운동가’ 헬렌 켈러
맥스 월리스 '헬렌 켈러'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Sep 16 2024 10:57 AM
헬렌 켈러 사후 50년이 지난 2020년 미국 정치권에서 그를 둘러싼 작은 소동이 일었다. 어니타 캐머런이라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장애인 권리 운동가가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과의 인터뷰 중 헬렌 켈러를 “장애인이긴 해도 그저 특권층 백인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한 게 발단이었다. 캐머런에게 헬렌 켈러는 미국 남부 앨라배마에서 노예를 부리던 지배 계급 출신이었고, 애니 설리번이라는 가정교사의 도움을 받아 시청각 복합 장애에도 6개 국어로 소통한 ‘기적의 천재 소녀’일 뿐이었다. ‘특권층 백인’이란 단어에 꽂힌 보수 정치인들은 어니타의 발언에 거세게 반발했다.
헬렌 켈러가 1918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던 무성영화 ‘양지바른 쪽’ 촬영장에서 찰리 채플린의 얼굴에 손가락을 대고 입술을 읽고 있다. 아르테 제공
1년 뒤 헬렌 켈러는 세간에 다시 오르내렸다. 할리우드의 한 제작사에서 헬렌의 전기 영화 제작 계획을 발표한 직후였다. 청각 장애인인 사회운동가 크리스티나 하트먼은 헬렌 켈러의 이야기가 또 다시 장애 극복 영화로 제작되는 것에 거부감을 나타낸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특별한 이야기란 평범한 시청각 장애인이 사랑에 빠지고, 시비를 걸고, 중년의 위기에 뒤얽히고, 멀리서 온 사진기자와 지독한 불륜을 저지르는 사연”이라고 했다. 미디어가 답습한 역경을 극복한 헬렌 켈러의 영웅 서사가 다른 장애인들이 당면한 문제를 소외시킨다는 게 그의 논리였다. 그는 “이제 헬렌 켈러가 쉴 때”라고 선언했다. 2022년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흥행할 때 장애인들이 장애인이 주인공인 드라마를 반기면서도 우영우를 사회질서에 부합하는 ‘예쁘고 젊은 천재’로 설정한 것을 아쉬워한 맥락과 유사하다.
존 메이시(왼쪽)가 1909년 매사추세츠주 렌섬의 자택 창가에 앉아 헬렌 켈러의 손에 글씨를 쓰고 있다. 헬렌의 뒤에는 메이시의 아내 애니 설리번이 서 있다. 아르테 제공
‘헬렌 켈러’는 전기 작가이자 인권운동가인 맥스 월리스가 헬렌 켈러의 사회운동가로서의 면모에 집중해 쓴 전기다. 헬렌 켈러라는 ‘기적의 이름’에 가려진 사회운동가의 정치 역정을 담았다. 월리스는 헬렌 켈러를 ‘타인의 도움을 받아 장애를 이겨낸 수동적 인물’로 보는 평가가 가혹하다고 말한다. 헬렌 켈러는 장애를 인종, 성별, 계급과 연결해 분석하려 했다. 과거엔 보기 드문 관점이었다. 그는 선천적인 실명보다 산업재해로 인한 실명이 더 많다는 문제를 제기했고, 유색 인종 장애인이 상대적으로 더 열악한 상황에 내몰린다는 현실에 주목했다. 구조적 빈곤을 해결하기 위한 장애인의 경제 활동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헬렌 켈러·맥스 월리스 지음·아르떼 발행·592쪽·4만4,000원. 아르테
모든 종류의 차별에 반대하는 듯했던 헬렌 켈러는 한때 우생학이 옳다고 믿는 과오를 범한다. ‘아랍인’이 ‘유대인’보다 열등하다는 편견을 드러내기도 한다. 전기의 묘미가 여기에 있다. 그의 일관성 없어 보이는 행적은 그를 입체적인 인물로 살려 낸다. 헬렌을 위인전 속 ‘성자’로 박제하는 대신 불완전한 한 인간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송옥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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