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큰 하늘의 문, <대한문(大漢門)>
황현수의 들은 풍월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Sep 26 2024 05:59 AM
서울 덕수궁 옆에 <진주회관>라는 콩국수 맛집이 있다. 고국에 가면 즐겨 먹는 음식 중에 하나가 콩국수다. 이 식당은 1962년에 개업해 지금 3대째, 이어져 오고 있다. <진주회관>이 유명해진 것은 삼성가의 단골집으로 알려지면서라고 한다. 이병철, 이건희 회장이 많이 찾았고, 이재용 부회장도 ‘포장단골’ 이란다. 이 콩국수 맛의 비밀은 식재료라고 하지만, 사실은 콩을 가는 믹서기라는 설도 있다. 미국항공우주국 NASA에서 사용하는 믹서기를 사용해 콩과 땅콩, 깨 등의 재료를 갈아 분말 형태로 사용해서다. 이 믹서기는 1분에 3만 5천 번 회전된다고 한다. 맛과 회전수가 어떤 상관이 있을까 싶었지만 이런 기사가 나고 나서, 어느 유저가 ‘이런 믹서기가 정말 있는지?’ 찾아본 결과, 바이타믹스라는 회사에 이런 믹서기가 있다는 걸 찾아냈다.
이 콩국수는 고명도 없이 콩국물과 면 밖에 없다. 콩국수와 함께 나오는 겉절이 김치가 기가 막힌데, 개인당 한 개씩 김치접시가 나오니 아껴가며 분량조절을 잘해 먹어야 한다. 가격도 16,000원이니 다른 가게보다 비싼 편이다. 강원도에서 재배한 토종 황태콩만을 사용해서 비린 맛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국물이 걸쭉하고 꾸덕꾸덕 진하다. 따로 소금을 안 넣어도 간이 맞는다. 면은 소면과 중면 사이의 두께로 쫄깃하고 탱탱한 느낌이다.
식사를 한 후, 옆의 덕수궁을 산책하고 시간 여유가 있으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이나 담 너머에 있는 <서울시립미술관>의 전시를 둘러보면 우아한 하루가 된다.
덕수궁은 본래 경운궁이었다. 처음부터 궁궐은 아니었고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살던 집이다. 선조가 임진왜란으로 피난 갔다가 돌아와 보니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에 타서 마땅히 있을 곳이 없어 그곳을 임시 거처로 사용했다. 말이 궁이지 건물 몇 채 없는 행궁이었는데, 선조는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곳에서 머물렀다. 그 뒤 수리가 끝나며 경운궁이라 이름 붙이는데 궁궐의 모습으로 갖춰진 건 고종 때였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을미사변(1895년) 이후 목숨에 위험을 느껴 살고 있던 경복궁을 버리고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다. 1년 넘게 그곳에 머물고 있던 고종이 이듬해인 1897년 러시아공사관을 나와 간 곳이 경운궁이었다. 고종은 경운궁으로 돌아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궁 안에 여러 전각을 세우고 토목 공사를 시작한다.
1902년에 이르러 대부분의 전각들이 완공되어 궁궐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지만, 1904년 함녕전에 발생한 불로 인해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된다. 당시는 이미 외교권이 일본에 넘어간 상태고 헤이그 밀사 파견으로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하고 물러난 시기였다. 그래서 순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고종만이 남게 된다. 경운궁이 궁궐로 기능을 시작한 지 10년 만에 다시 궁의 용도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 후 경운궁은 고종의 궁호(宮號) ‘덕수(德壽)’를 따라,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19년 고종이 승하하면서 빈 궁궐이 되어 버린다.
덕수궁을 구경하기 위해서는 대한문(大漢門)으로 들어서야 한다. 하지만, 대한문은 원래 덕수궁의 정문이 아니었다. 경운궁이던 시절의 정문은 서쪽에 있는 인화문이었는데 동쪽의 대안문(大安門) 앞으로 큰길이 생기고, 1904년 화재 이후 복원 작업을 거치며 정문이 된다. 이에 더해 대안문의 이름이 풍수상 불길하다는 의견에 따라 대한문으로 바꾼다. 이름을 바꾸게 되는 여러 설들이 있지만, ‘큰 하늘의 문’이라는 뜻이라고 상량문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1968년에 덕수궁 담장벽을 밀어붙여 외떨어져 있는 대한문. 그나마 있던 문을 교통 편리를 위해 1970년에 지금의 장소로 옮긴다. 사진 나무위키)
이 대한문은 내가 덕수궁 옆, 배재중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서울광장 쪽으로 22미터나 섬처럼 덩그러니 떨어져 있었다. 1968년 서울시가 태평로를 확장하며 궁궐 담장을 안쪽으로 물려 버리는 바람에 인도와 차도의 경계 부분에 있게 된 것을 1970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긴다. 교통의 편리를 위해, 덕수궁 담장과 대한문을 밀어붙이는 것이 역사 유적을 보존하는 일보다 우선하던 시절이었다.
몇 년 전, 덕수궁에 갔더니 석조전 뒤편에 ‘<돈덕전(惇德殿)> 재건 공사’를 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유심히 보니, 철골 구조물이 올라가고 있어 ‘그 당시에 철골이 있었나?’하며 의아해했다. 석조 건물을 복원하는데 철골을 사용하다니 한심스러웠다. 요즘 시대에도 이런 조악한 일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진행되는 것 같아 씁쓸했다.
1907년 돈덕전에서 고종과 순종, 영친왕 등이 2층 베란다에 나와 있다. 사진 문화재청
돈덕전은 1925년경에 일제에 의해 없어진 건물로 석조전 뒤에 있었다. 서양식의 이 건물은 러시아 제국의 사바틴이 감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돈덕전은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예식'에 맞추어 황궁 내에 지은 서양식 영빈관이다. 1902년~1903년 사이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프랑스 파리에서 유행한 화려한 건축양식으로 세워져 당시에도 큰 존재감을 나타낸 것은 물론, 수많은 외국의 외교 사절을 접견하고 연회를 베풀었다. 1906년에는 황태자 이척(순종)과 황태자비 윤 씨(순정효황후)의 가례 때 연회장으로 사용했고, 1907년에는 순종이 이곳에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즉위했던 곳이다. 문화재청이 2018년부터 설계 및 복원공사를 시작하고, 2023년 9월에 복원을 완료했다.
www.koreatimes.net/오피니언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