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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주인공이 된 여자들
70년 만에 추는 ‘한풀이’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Nov 04 2024 12:40 PM
‘정년이’가 되살린 여성국극 영광 1950년대 최고 인기 종합예술 여배우가 남성 배역까지 연기 국극 배우, 아이돌급 인기 누려
“자꾸 가슴이 뛰어갖고 잠이 안 와.”
생전 처음 여성국극 공연을 본 날 저녁. 드라마 ‘정년이’의 주인공인 열아홉 윤정년(김태리)은 언니에게 홀린 듯 말한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공연 장면 때문에 심장이 계속 벌렁대는 정년이 안에서 국극 배우라는 꿈이 싹트는 순간이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여성국극 ‘별하나’(1958)의 배우 김경수와 김진진(가운데 사진). 여성국극은 웹툰 ‘정년이’(2019·왼쪽 사진)를 거쳐 올해 동명의 드라마(오른쪽 사진)로도 만들어져 사랑받고 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6년을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는 같은 제목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픽션이지만 여성국극의 존재와 인기, 그리고 국극이 수많은 여성들을 잠 못 이루게 했던 것은 ‘팩트’다.
노래에 재능 있는 여성들이 국극에 청춘을 바쳤고, 여성 관객들은 ‘언니부대’를 자처하며 그들을 응원했다. 여성국극은 여성배우들이 작품 속 남성 배역까지 모두 연기하는 일종의 국악 연극. 소리 중심이었던 창극과 달리 노래, 연기, 춤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이다.
‘정년이’를 통해 여성국극이 처음 대중에 알려지며 한 시대를 빛냈던 예술과 배우들에 대한 궁금증도 커지고 있다.
여성국극을 사랑했던 여성들은 그간 묘사된 전쟁 직후의 여성들과 다르다. 대중문화는 여성을 ‘굶주린 아이들을 돌보는 헌신적인 어머니’나 ‘전쟁 피해자’로 그리거나, 여성 이야기를 아예 다루지 않았다.
올해 공개된 1950~1960년대 배경 드라마들도 전후 혼란을 틈타 권력 다툼을 벌이는 남성들(‘삼식이 삼촌’), 부패한 권력에 맞서 민중을 지키는 남성 형사들(‘수사반장 1958’) 이야기였다. 드라마 ‘정년이’는 여성국극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꿈과 재능에 집중했던 여성들의 성장을 따라간다.
여성국극 배우들의 삶은 다큐멘터리 영화 ‘왕자가 된 소녀들’(2013)에서 엿볼 수 있다. 대중문화가 여성국극을 주목한 첫 작품이다. 김혜정 감독은 2008년부터 5년간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린 조금앵 김진진 박미숙 허숙자 김혜리 등 배우들과 팬들을 만나 영화를 만들었다.
1950년대 여성국극 배우들.
배우들은 “남자한테 얽매이기 싫었다” “여자친구들이 남자보다 좋았다”며 결혼이나 이성애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았던 젊은 날을 회상했다.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몰입하며 ‘춘향전’ ‘호동왕자’ ‘시집 안 가요’ 등의 국극 작품으로 전국을 누볐다.
국극 배우들은 ‘정년이’ 드라마처럼 실제로 팬을 몰고다녔다. 남성 역할을 맡았던 조금앵은 팬들의 요청에 신랑역을 맡아 가상결혼식 사진을 찍었을 정도다. 팬들은 결혼 전 예비신랑에게 “나는 여성국극을 좋아하고, 나에게는 이런(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언니가 있다”고 밝힌 후 이를 이해하면 결혼했다고 한다.
결혼 후에도 시부모 점심을 차려두고 공연을 쫓아다녔다는 팬도 있었다. 배우도 팬도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함께 여성국극을 이끌었고, 10여 년간 가장 사랑받는 공연예술로 자리매김했다.
남성 배역으로 유명했던 조금앵 배우는 팬의 요청에 신랑으로 분장하고 팬과 가상결혼식 사진을 찍기도 했다. 김혜정 감독 제공
김혜정 감독은 “처음 여성국극이라는 걸 알고는 이런 역사가 너무 안 알려져 있어서 이상했다”며 “나 역시 큰 기대 없이 옛 선생님들이 하는 국극을 보러갔다가 배우들의 카리스마와 공연에 눈이 번쩍 뜨였다”고 말했다.
영화와 방송의 등장으로 배우들의 설 자리는 좁아졌다. 이영미 드라마평론가는 “1955년 영화 ‘춘향전’의 흥행 성공 후 1950년대 후반부터 공연계 배우들이 상당수 영화로 이동했다”며 “국극, 악극, 신파극이 다 무너졌다”고 말했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은 판소리를 문화재로 지정하는 등 전통예술 보호 정책을 폈다. 하지만 여성국극은 모든 지원에서 제외됐다. 여성국극의 인기에 밀려 남녀혼성창극단을 접어야 했던 김연수 명창(남성)이 초대 국립창극단 단장이 됐다.
남성 소리꾼을 비롯한 제도권 문화인들은 여성국극을 ‘여성들만의 사이비 예술’이라고 폄훼했다. 김혜정 감독은 “국가유산(문화재) 지정을 논의하는 의사 결정권자들 중에 여성이 없었고, ‘남자는 돈 벌고 여자는 살림하는’ 가부장적 현대가족의 모델이 강조되는 시대적 분위기가 지원 배제에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국극은 이후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걸었고, 국극 배우들은 후진 양성이라는 오랜 꿈도 이루지 못한 채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수많은 장벽을 뛰어넘었으나 시대의 한계를 넘지 못한 여성들의 이야기는 후세대 여성들에 의해 발굴돼 70년만에 대중에게 당도했다. ‘왕자가 된 소녀들’의 김혜정 감독과 웹툰 ‘정년이’(2019)의 서이레 글작가, 드라마 ‘정년이’의 정지인 PD 모두 여성이다.
남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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