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통해 본 흑역사
광란의 대학살극 제주 4.3사건 되돌아본다
- 캐나다 한국일보 (editorial@koreatimes.net)
- Nov 04 2024 07:49 AM
“사랑이든 애도든 끝까지 껴안고” 이용우 (언론인)
제주 4.3 사건 발생 뒤 산간 지방으로 피신한 어린이들. 제주4.3아카이브 사진
“눈은 거의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 속력 때문일까, 아름다움 때문일까? 영원처럼 느린 속력으로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 어떤 사실들은 무섭도록 분명해진다.”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중)
13세에 겪은 일이다. 두 자매가 외가에 잠깐 다녀오는 사이, 마을이 쑥대밭이 되었다. 학교 운동장에는 마을 사람들의 시신이 즐비한데, 시신 위로 눈이 내렸다.
자매는 시신의 얼굴에 쌓인 눈을 한 사람씩 닦아가다 마침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찾았는데, 옆에 있어야 할 오빠와 막내가 안 보였다. 시신 더미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데, 오히려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죽음은 일상화되어 있었다.
두 자매는 초조해져서 보리밭과 불탄 집터의 시신들을 헤집고 다니다가 마침내 총을 맞고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막내를 찾아낸다...
0…제주도는 전근대 시기부터 본토와의 지리적 거리에 기반한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해방 직후부터 외지에 나가 있던 6만여 명의 주민들이 일시에 귀환하여 급격한 인구 변동을 겪었다.
도내 실업률이 높아지고 생필품은 부족해졌으며, 극심한 흉년과 미곡정책의 실패에 따른 식량난에 콜레라 유행까지 겹쳐 민심은 극히 악화되었다.
거기에 일제에 부역한 경찰들이 미 군정과의 유착 아래 군정 경찰로 변신해 주민들을 억압한데다, 외지에서 들어온 우익청년단들이 이에 가담하여 폭력을 휘두르는 상황은 주민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상황에서 1947년 발생한 ‘삼일절 발포사건’은 주민들의 억눌린 분노에 불을 지피는 도화선이 됐다.
0…1947년 3월1일, 삼일절 28주년을 맞아 제주지역 좌익계열을 중심으로 도내 곳곳에서 기념 집회가 열렸다.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기념식이 끝난 후 시가행진이 이어졌는데, 광장에서 이를 구경하던 어린이가 기마경찰이 탄 말에 차여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기마경찰이 그대로 가려 하자 일부 군중이 경찰을 공격했고, 경찰은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하고 총을 들었다. 경찰 발포에 민간인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에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주: 북한 권력서열 2위 박헌영이 남한 전복을 위해서 이끈 정당) 는 3·1사건 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반(反)경찰 활동을 전개한다. 이 ‘삼일절 발포사건’은 1년 후 4·3사건의 도화선이 된다.
0…3월10일, 경찰 발포사건에 항의하는 민·관 총파업이 벌어졌고 제주도의 95%에 달하는 166개 기관 및 단체에서 파업에 동참했다. 총파업 사태는 3월말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으나, 미 군정은 경찰의 발포보다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정책을 폈다.
경찰은 대대적인 파업 주모자 검거작전을 벌여 한달만에 500여명을 체포했고, 1년 동안 2,500명을 구금시켰다. 구금자에 대한 경찰의 가혹한 고문도 잇따랐다.
3·1사건 이후 지역 주민과 경찰이 자주 충돌하면서 미 군정 역시 경찰에 대한 주민들의 반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오로지 좌익세력에만 모든 책임을 돌리는 태도로 일관해 민심을 악화시켰다.
0…한편, 미국이 소련과의 협상을 포기하고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이관하자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가시화되었고, 이는 남한 내에서 분단에 대한 광범위한 반대를 촉발했다.
특히 남로당은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투쟁의 일환으로 1948년 2월7일을 기해 전국에서 총파업을 일으켰고, 제주도당에서는 무장투쟁 노선을 채택했다.
1948년 4월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탄압이면 항쟁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봉기했다. 350명의 무장대는 이날 새벽 12개의 경찰지서와 서북청년단(서청) 등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했다.
0…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중지,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미 군정은 “공산계열의 파괴적, 반민족적 분자들의 지도 아래 총기를 가진 무뢰배들이 작당하여 경찰관서, 관공서 습격, 경찰관과 가족 살해, 선량한 동포 살해, 방화 폭행과 약탈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고 발표했다.
한편, 같은해 5월10일 남한 200개 선거구에서 제헌의회 선거가 실시됐다. 하지만 제주도는 3개 선거구 가운데 2개 선거구가 투표자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됐다. 제주도는 남한에서 유일하게 5·10선거를 거부한 지역이 됐다.
0…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4·3 사건은 이승만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됐다. 한국 정부는 그해 10월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해 본격적인 진압작전에 나섰다.
같은달 19일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14연대가 4·3사건 진압을 위한 파견명령에 반발해 봉기했다. 이들이 정부 진압군과 맞서는 과정에서 민간인 수천명이 학살 등 피해를 당한다. 이른바 ‘여순사건’이다.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이후 1954년 9월 한라산 전면 입산 통제를 해제할 때까지 제주도에서 대규모 진압작전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수의 무고한 양민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된 주민은 2만5천~3만명, 많게는 5만여명까지 추정된다.
0…진압 군경은 무장대의 은신처를 제거하기 위해 산간마을 주민들을 해안으로 강제 소개(疏開)하는 한편, 가옥을 파괴하고 불을 질렀다. 이 시기부터 이듬해 3월에 이르는 약 5개월 동안 이른바 ‘중산간지역 초토화작전’으로 집중적인 집단 살상이 발생했다.
95%의 마을이 불에 타 없어지고, 소개령을 전달받지 못해 마을에 남은 마을의 노약자들까지 무참히 살해됐다.
진압 군경과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원들은 재판 절차도 없이 주민들을 집단으로 사살했으며, 소개지에서도 가족 구성원이 모두 집결하지 않은 경우 ‘도피자 가족’이라 하여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대살(代殺)’을 자행하기도 했다.
1949년 1월 서북청년단 단원으로 편성한 진압부대가 주민 400여명을 한꺼번에 총살한 ‘북촌사건’은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낸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 사례다.
0…무수한 민간인 학살 참극을 빚은 4·3 사건은 무려 7년 7개월동안 이어졌다. 한라산은 1954년 9월, 7년여 만에 올라갈 수 있게 됐다.
제주 4.3 사건은 6.25 전쟁과 함께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참혹한 민간인 인명피해 사건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사건이 종결된 후에도 오랫동안 희생자들과 유족들은 ‘빨갱이’라는 낙인 때문에 피해사실을 드러내지 못했다.
공산주의가 무언지도 모르는 양민들, 심지어 친척 중 누군가가 군경 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희생자의 가족들은 연좌제에 의해 감시당하고 사회활동을 제약받았다.
전두환 때 교과서는 4·3사건을 ‘제주도 폭동 사건’으로 지칭하며 “공산 무장폭도가 봉기하여 국정을 위협하고 질서를 무너뜨렸던 남한 교란작전 중의 하나”라고 서술했다.
0…시대가 바뀌어 1980년대 후반부터 시민사회단체와 학계를 중심으로 관련 서적과 증언, 연구결과가 잇따라 발표됐다.
일각에서는 이승만 정부와 미 군정의 강경 진압에 초점을 맞춰 4·3사건을 민중항쟁, 민주화운동 등으로 규정했다.
2003년 진상규명위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연계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가 있었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하게 주민들이 희생됐다”고 발표했다.
직접적 원인으로 “남로당 제주도당이 1947년 삼일절 발포사건을 계기로 조성된 제주사회의 긴장 상황을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에 접목시켜 지서 등을 습격한 것이 시발”이라고 명시했다.
0…제주 4.3사건은 엄청난 광란의 대학살극에도 불구하고 진상규명과 평가가 더디어 온 것이 사실이다. 좌익계열(남로당)이 연루돼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좌익이 뭔지, 공산주의가 어떤 것인지 알고 죽어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이 이념이라는 어려운 용어를 붙이기에도 어색한 어린이, 여성, 노약자들이었다.
0…제주 섬 전체 인구의 10분의 1이 무참히 살육된 충격적 사실(史實)을 바탕으로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가 탄생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목엔 작가 한강강의 가냘픈, 하지만 서릿발처럼 강한 의지가 담겼다.
"어떤 것도 종결하지 않겠다는, 그것이 사랑이든 애도든 끝내지 않고 끝까지 껴안고 계속 나아가겠다는 결의"인 것이다.
한국에 가면 제주도를 다시 돌아보겠다.
이용우(언론인)
www.koreatimes.net/오피니언
캐나다 한국일보 (editorial@koreatim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