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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농담>에서 자살하는 꽃, ‘능소화’

황현수의 들은 풍월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Nov 13 2024 04:11 PM


고국에 불어 닥친 ‘의대 열풍’은 과하다 못해 눈살을 찌푸릴 정도다. 초등학생 때부터 의대 입시를 준비하는 ‘초등 의대반’까지 있다고 한다. 의사는 물론 오랫동안 선망의 직업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토록 과한 열풍이 부는 것은 기이하다. 그냥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돈’ 때문이라는 이유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박완서 소설 <아주 오래된 농담>을 보면 의사에 대한 질투가 묻어 있다. 의사인 주인공 심영빈은 국민학교 6학년 때 같은 반 동창, 유현금을 좋아한다. 영빈의 장래 희망은 의사다. 어느 날 현금이 '분홍빛 혀'를 쏙 내밀며, "돈을 많이 버는 의사와 결혼하겠다"는 말을 들으며 그녀와 결혼하는 미래를 그려 본다. 그 후로 영빈은 능소화로 뒤덮인 현금의 2층집 앞을 지나다니며 현금에 대한 마음을 키운다. 하지만, 현금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동네를 떠나게 되고, 영빈도 공무원이던 아버지가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된 후, 충격으로 돌아가시자 변두리의 초라한 집으로 이사한다.

영빈은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내과 레지던트가 되고 나서도 여전히 현금을 잊지 못하는데, 어느 날 국민학교 동창이 찾아와 현금이 이미 결혼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제야 그녀를 단념하고 중학교 교사 수경과 마지못해 결혼한다. 세월이 흘러 40대 중반에 접어든 영빈은 두 딸의 아버지, 모교 의대의 교수이자 국내 호흡기내과학계의 권위자가 된다.

겉보기에 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하던 영빈은 병원에서 우연히, 그리던 현금을 만난다. 현금은 중학교 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2층 집을 잃고 외숙모의 눈총 아래 외가에서 지냈다. 아버지가 한때 재기에 성공한 덕에 음악대학에 진학하고 미국 유학도 했지만 결국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말았다. 돈의 중요성을 절감한 현금은 돈 많은 사채업자의 아들과 결혼한다. 하지만, 얽매이는 생활이 싫어 남편에게는 불임이라고 속인 채 몰래 피임했고, 남편의 간절한 부탁에도 한 번도 집 밥을 차려주지 않았다. 결국 현금은 남편과 10년 만에 이혼한 뒤, 시부모로부터 받은 위자료와 부동산 투자 수익으로 부유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현금은 그가 청하지도 않았는데 명함을 준다. “찢어지는 명함이야. 무슨 뜻이야? 요샌 안 찢어지는 질긴 명함도 많잖아. 생각나면 한 번 들러. 찢어버리고 싶어도 할 수 없고”. 명함에는 '돌피'라는 카페 이름과 그 약도까지 있었지만, 현금의 이름은 없었다. 이때부터 영빈은 때때로 현금의 아파트를 찾아가 현금과 정사를 나누는 사이가 된다.

주인공이 첫사랑 현금에게 느끼는 감정은 어릴 적, 그녀의 집 담벼락에 있었던 타오르는 듯한 능소화였다. 작가 박완서는 여주인공의 신선하고 매혹적인 모습을 능소화 꽃으로 비유한다. 본문에 중에 이런 글이 있다.

‘이층 집이었다. 여름이면 이층 베란다를 받치고 있는 기둥을 타고 능소화가 극성맞게 기어 올라가 난간을 온통 노을 빛깔의 꽃으로 뒤덮었다. 그 꽃은 지나치게 대담하고 눈부시게 요염하여 쨍쨍한 여름날에 그 집 앞을 지날 때는 괜히 슬퍼지려고 했다’라며 묘사한다.

“그럼 저절로 죽었단 말이지. 저절로 죽긴 어떻게 저절로 죽냐? 자살을 한 거지. 자살? 나무가 말이야? 그래 그 나무는 나를 좋아했으니까. 나를 좋아하지 않음 내 창가에 어떻게 그런 예쁜 꽃을 피울 수가 있겠어. 우리 집 능소화처럼 화려하게 피는 능소화를 난 어디서고 본 적이 없어. 그래도 그렇지 나무가 어떻게 자살을 하냐? 얘 좀 봐. 왜 못해. 나무는 자살할 수 없다고 누가 그래? 나무 우습게보지 말아 너. 나무도 사랑을 잃으면 자살할 수도 있다는 걸 우리 집 능소화가 확실하게 보여줬잖아? 그래도 못 믿겠어? =중략= 애는, 그게 어떻게 거짓말이냐? 농담이지. 농담? 그래 농담이지, 듣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즐거운 거 그거 농담 아니니?”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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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는 덩굴 나무로서 줄기에 생겨나는 흡착 뿌리를 돌담이나 건물의 벽 같은 지지대를 타고 오르며 주로 여름에 피는 연한 주황색 꽃이다.

 

 

나는 이 능소화를 지난해 고국에 갔다가 보았다. 경기도 화성시 무봉산 밑에 있는 만의사라는 절에서 다. 조용하고 아늑한 이 사찰은 신자들이 수양하러 자주 오는 곳으로 경내에는 삼층 석탑과 사리탑 등의 석조물들이 있었다. 사찰 내에는 곳곳에 정원을 잘 꾸며 놨는데, 함께 갔던 친구가 담장을 보며 “어, 이거 능소화 네” 하길래, 비로소 그 꽃이 능소화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 박완서의 소설 속, ‘능소화’가 떠올랐고 ‘작가가 참 꽃의 묘사를 똑 소리 나게 했구나’ 싶었다.

시간은 흘러 몇 주 전 일이다. tvN의 <지금 이 순간>이라는 음악 프로그램을 보다가 안예은이라는 가수를 처음 본다. 송창식의 <피리 부는 사나이>를 자기만의 스타일로 부르는데, 원작자도 아빠 미소를 짓게 할 만큼 노래를 잘한다. 딴딴한 가창력과 특유의 꺾기, 시크한 끝 음 처리가 돋보였고 음역대도 저음부터 고음까지 흔들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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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예은은 싱어송라이터로 타령에 가까운 창법으로 노래 부른다. 2016년에 데뷔하였으며 대표곡으로 <문어의 꿈>, <능소화>, <상사화>, <창귀>, <홍연> 등이 있다. SBS 유튜브 영상 캡처

이런 훌륭한 신인 가수가 있었네 싶어, 구글을 찾아보았더니 벌써 데뷔 8년 차라고 한다. 무엇보다 그녀가 차별화되는 것은 지금까지 발표한 앨범의 전곡을 홀로 작사 작곡 프로듀싱했다는 점이다. 그녀의 대표곡 중에 하나가 <문어의 꿈>이라고 한다. SNS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어느새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동요가 되어 버린 곡이다. 나의 손녀들도 '나는 문어, 꿈을 꾸는 무너으어~'하며 흥얼거리던 덕분에 그 멜로디를 알고 있었다. 유튜브와 틱톡 공식 집계 조회 수만 2800만 뷰다.

‘아, 그 노래가 안예은이 부른 거구나’하며 다른 곡들도 찾아보았다. <능소화>라는 곡이 눈에 띄었다. ‘능소화’는 임금의 성은을 입은 여인이 임금이 다시 올까 하염없이 기다리다 죽어 꽃이 되었다는 꽃말에서 착안하여 쓰게 된 곡이라 한다. 독특하고 호소력 짙은 목소리를 실감할 수 있고 후렴구에 대중적으로 알려진 판소리 ‘사랑가’를 차용해 넣어 친근감을 주었다. 하지만, 곡 자체가 민요풍에다 멜로디가 무섭게 느껴져서인지 그리 재미는 못 본 것 같다. <능소화>는 비록 빛을 보지 못했지만, 그녀는 분명 크게 될 가수이지 싶다. 안예은이 능소화처럼 화려하게 피어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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