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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탄생 340주년에 즈음하여 (하)
손영호 | 칼럼니스트/국제펜클럽 회원
- 유희라 기자 (press1@koreatimes.net)
- Jan 07 2025 07:34 AM
■ J.S. 바흐와 음악가가 된 세 아들 (계속)
▲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 (1710~1784) <출처: 위키백과>
장남인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Wilhelm Friedemann Bach, 1710~1784)는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고 수학과 철학에도 박식했을 뿐만 아니라 1746년 할레(Halle)의 유명한 리브프라우엔 교회(Liebfrauenkirche) 오르간 연주자로 재직했기 때문에 아버지 바흐는 장남이 자기처럼 되기를 많이 기대했었다고 한다. 이러한 아버지의 장남에 대한 편애 때문에 차남 에마누엘 바흐는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고백했다.
프리데만 바흐는 아버지가 사망한 1년 뒤인 1751년, 그는 세금징수원의 딸이자 자신보다 11살 연하인 도로테아 엘리자베스 게오르기(1721~1791)와 할레에서 결혼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를 잃은 충격으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여 할레에서의 생활은 아버지의 악보 필사본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궁핍했다고 한다. 두 명의 아들은 어려서 죽고 딸 프리데리카 소피아 바흐(1757~1797)는 후에 미국 오클라호마로 이주하면서 J.S. 바흐의 필사본을 상당수 가져갔다고 하는데 대를 이어오면서 대부분 유실된 것으로 알려졌다.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는 작곡보다는 즉흥연주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패셔너블하고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젊은 세대 취향의 음악이라 당시 보수적인 교회나 궁정 관련 일자리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그늘에서 탈출하기 위해 노력한 독창적이고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음악가였다는 평이다. 그러나 1784년 7월1일 베를린에서 극빈 생활 끝에 73세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 카를 필립 에마누엘 바흐 (1714~1788) <출처: 위키백과>
차남인 카를 필립 에마누엘 바흐(Carl Philipp Emanuel Bach, 1714~1788)는 1752년에 '올바른 클라비어 연주법에 대한 시론'이라는 교본을 발간했다. 이 교본은 그의 생전에만 해도 3판까지 발행될 정도로 굉장한 수요를 자랑했고, 심지어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와 베토벤도 건반 악기 연주와 작곡법을 이 교본에서 많이 참고할 정도로 높이 평가됐다.
에마누엘 바흐는 배다른 동생인 크리스티안 바흐와 구별하여 '베를린 바흐'라 부른다. 그의 아들 아담의 대부(代父)였던 게오르크 필립 텔레만(Georg Philipp Telemann, 1681~1767)이 86세로 죽자 궁정자리를 떄려치고 함부르크의 카펠마이스터(악장)를 계승하여 죽을 때까지 지냈기 때문에 '함부르크 바흐'라고도 부른다. 에마누엘은 1788년 12월14일 함부르크에서 74세로 사망하여 성 미하엘 교회에 묻혔다.
■ “음악적 헌정”의 탄생 배경
에마누엘 바흐는 프리드리히 왕세자의 하프시코드 주자로 있다가 그가 1740년 프리드리히 2세 국왕으로 등극하자 궁정작곡가가 되었다. 에마누엘 바흐는 1744년 부유한 와인상의 딸인 10살 연하의 요한나 마리아 단네만(Johanna Maria Dannemann, 1724~1795)과 결혼하여 다음해에 아들 요한 아담(1745~1789)을 낳았으나, 그 당시 유아사망율이 높은데다 세례식에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더 기다렸던 것 같다. 드디어1747년 5월 J.S. 바흐는 장남 프리데만과 함께 에마누엘 바흐의 첫아들 세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프로이센령인 포츠담(Potsdam)으로 여행을 떠났다. 라이프치히 – 포츠담 거리는 약 160km로 지금은 차로 1시간 반 정도 걸리지만 18세기 당시에는 마차로 사흘이 걸렸다.
이때 대 바흐는 프리드리히 대왕을 만난다. 사실 왕의 초청에 의한 만남이었고, 이때 유명한 “음악적 헌정”이 탄생한다.
기록에 의하면 바흐가 왕이 직접 쓴 '왕의 주제(Thema Regium)'를 이용한 3성 푸가를 즉흥적으로 연주하자 왕은 다시 도전하여 6성 푸가를 요청했다. 바흐는 즉흥연주를 한 뒤 "폐하의 음악이나 제 음악이나 과거에도 그랬듯 '음악적 선물'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왕은 "그렇다면 '음악적 헌정(The Musical Offering)'이란 말이군."하고 웃으며 대꾸했다. 이에 "그러나 우리 중 누가 헌정을 받는 것입니까?"고 되묻는 바흐. 대답을 못하는 왕. 62세 노(老) 거장 바흐의 35세의 젊고 거만한 왕에 대한 위트있는 일격일 뿐만 아니라, 당시 단 한 줄도 작곡하지 않는 귀족들의 후원을 받아 먹고 사는 예술가들의 종속적 본질을 꿰뚫은 곱씹어볼 만한 뼈있는 일갈(一喝)이다.
구성은 3성, 6성 두 개의 리체르카레(Ricercare)와 10개의 카논(Canones) 그리고 4악장의 소나타로 되어 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음악적 헌정(Das Musikalisches Opfer, BWV 1070)'이다. 당시 바흐는 그 악보에 "Regis Iussu Cantio Et Reliqua Canonica Arte Resoluta (the theme given by the king, with additions, resolved in the canonic style)"라고 썼기 때문에, 첫 머리글자를 딴 'RICERCAR'가 당시의 중요한 기악곡 장르가 되었다.
왕이 그를 궁정작곡가로 머물게 하려고 했을 때 바흐는 말한다. "전 평생 남의 요청에 의해 작곡을 해 왔어요. 그러나 이젠 종교적 서비스나 성 토마스 교회를 위해서나 왕세자, 왕을 위해서 작곡을 하지 않을 겁니다. 전 '레몬처럼 쥐어짜지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한가지 희망이 있다면 '기쁨'입니다. 무로부터 어떤 것을 창조하는 기쁨 말입니다. 이것은 결국 '자유'를 통해 얻어집니다." 강직한 성품과 불같은 성격의 ‘장인기질’ 소유자 바흐를 잘 대변하는 말이다.
■ 바흐의 마지막 생애와 후대의 평가
바흐는 1749년 5월에 뇌일혈로 졸도하여 시력이 더 크게 나빠져, 1750년 3월 존 테일러(John Taylor, 1703~1772)라는 영국인 돌팔이 안과 의사에게 백내장(cataract)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바흐는 왼쪽 눈 수술 1주 후 다시 재수술을 받아야 했다. 백내장이 재발했다는 이유였다. 낙후된 수술방법과 합병증으로 2차 수술 후 바흐는 안타깝게도 완전히 실명했고 심각한 눈 통증과 고열에 시달리다가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4개월 후인 7월28일 영원히 눈을 감았다. 이 존 테일러라는 작자는 1758년 8월 엉터리 수술로 게오르크 헨델도 실명시킨 아주 몹쓸 인간이었다. 하기야 무균·소독의 개념이 없던 시절이었다.
바흐가 다시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프리데만 바흐의 제자이며 독일의 음악사학자인 요한 니콜라우스 포르켈(Johann Nikolaus Forkel, 1749~1818)이 1802년 바흐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인 "J.S.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Über Johann Sebastian Bachs Leben, Kunst und Kunstwerke)"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이 책 덕분에 그의 사후 50여년 만에 전 유럽적 바흐 광풍이 몰아닥쳤으며 대중들의 바흐에 대한 재인식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또 바흐 사후 약 80년의 시간이 흐른 1829년, 열렬한 바흐 팬이자 바흐 음악의 복원자였던 펠릭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1809~1847)이 '마태 수난곡(St. Matthew Passion, BWV244 (1727)'을 복원하면서 다시 한 번 바흐 열풍을 일으켰다.
막스 레거(Max Reger, 1873~1916)는 “바흐는 모든 음악의 시작이며 끝이다.”라고 했으며, 조아키노 로시니(Gioachino Rossini, 1792~1868)는 “만일 베토벤이 인간 중의 거인이라면, 바흐는 바로 하느님의 기적이다.”라고 평했다. 또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은 "종교가 그 창시자에게 은혜를 입었듯 음악은 바흐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평가했으며, 샤를 구노(Charles Gounod, 1818~1893)는 "모차르트는 가장 아름답고 로시니는 가장 천재적이다. 하지만 바흐는 가장 포괄적이다. 그는 말해야 할 모든 것을 말했다. 만약 바흐 이래로 쓰여진 모든 음악이 사라진다고 해도 바흐의 음악을 토대로 다시 재건할 수 있다."고 극찬했다.
2025년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탄생 340주년이 되기에 다시 한 번 그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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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라 기자 (press1@koreatim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