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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즈막에 핀, 겨울 국화 즐기기
황현수의 들은 풍월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Jan 29 2025 03:34 PM
두 해 전에 아내의 친구가 정원에 심어 보라고, 뿌리째 있는 소국화 20여 송이를 주었다. 봄에 심었으나, 아쉽게도 그 해 가을 한국에 머물어 핀 꽃을 보질 못했다. 이듬해 돌아와 보니, 제법 새끼를 쳐서 송이들이 무성해졌다.
하지만, 여름이 가고 가을이 다가와도 꽃은 피지 않았다. 아내는 아침마다 ‘갓 시집온 며느리에게 임신을 기대하듯’ 국화의 눈치를 살핀다. 꽃봉오리를 맺은 지 벌써 2주가 지났는데도 꽃필 기미가 없어, “여보, 이 국화는 무슨 색이었어?”하고 물었더니 “엷은 분홍색이었던가?” 한다. “몇 송이 안됐는데 저렇게 많이 늘었네”했더니, “소국화가 번식력이 좋은가 봐, 산책 다니다 보면 다른 집 국화는 벌써 피었던데…”한다. 그런 대화를 하고 또 몇 주가 지나서야 국화는 눈꼽을 비비며 나왔다.
정약용은 “국화가 특히 뛰어난 점은 느지막이 꽃을 피우는 것, 향기를 뿜는 것, 꽃이 오래도록 견디는 것, 고우면서도 화려하지 않고 깨끗하면서도 차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내는 꽃이 엷은 분홍색이라 했는데 막상 피고 보니, 아이보리 색에 황토물이 빛 바랜 것처럼 보였다. 내 모습이 섭섭해 보였는지, “올해 유난히 가물고 더웠잖아. 그래서 색이 시원찮나봐”한다. 사실, 내가 국화에게 해 준 것이라고는 심는 해에 고작 몇번의 물주기뿐이었는데, 무슨 바램을 하나… 어차피 겨울에는 오후 4시 반경만 되면 어두워져 국화를 자세히 볼 일도 그리 없다. 창 너머 가로수 불빛에 비쳐지는 올망졸망한 국화의 윤곽만을 멀리서 봐도 좋다. 이 쓸쓸한 겨울, 눈 덮인 정원을 저렇게 지키고 있으니 얼마나 듬직하고 대견한가?
옛 선비들은 국화를 운치 있게 즐기고자 여러 방법을 고안했다. 19세기 조선 문인 이학규는 <등불 앞의 국화 그림자>라는 글에서 “등불이 국화 남쪽에 있으면 그림자는 북쪽, 등불이 국화 서쪽에 있으면 그림자는 동쪽, 상 하나에 책 몇 권과 술 두 동이 있으니, 그저 꽃 그림자 속에 이 모습을 즐겨야 하리”라고 하였다. 꽃을 직접 즐기는 것이 아니라 벽에 비친 그림자를 즐긴다. 등불을 이곳저곳 위치를 바꿔가면서 국화꽃 그림자를 바라본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 역시 <선귤당농소>에서 “흰 문종이를 바른 훤한 창문에 흰 국화꽃이 비스듬히 그림자를 만들었다. 옅은 먹을 적셔 한껏 따라 그려내니 한 쌍의 큰 나비가 향기를 좆아 꽃에 앉았는데, 나비의 수염이 구리로 된 실과 같아 역력히 셀 수 있었다.”며 묘하게 국화 즐기는 법을 글로 소개한다. 정약용도 <국화 그림자놀이>에서 “국화가 여러 꽃 중에서 특히 뛰어난 점은 네 가지가 있다. 느지막이 꽃을 피우는 것이 그 하나요, 향기를 뿜는 것이 그 하나요, 꽃이 오래도록 견디는 것이 그 하나요, 고우면서도 화려하지 않고 깨끗하면서도 차지 않은 것이 그 하나다. 그런데 나는 이 네가지 외에 특히 촛불 앞의 국화그림자를 취하여 밤마다 이를 위해 벽을 소제하고 등잔불을 켜고는 조용히 그 가운데 앉아서 혼자 즐겼다.”고 하였다.
흰 벽에 비친 국화는, 꽃은 꽃대로 잎과 줄기는 줄기대로 한 편의 먹으로 그린 그림이 되었다. 꽃을 두고 이렇게 즐기는 것이 선비들의 고상함이었다. 대부분은 국화의 아름다운 모습을 즐겼지만, 눈과 코 그리고 입으로 즐기기도 했다. 국화를 차로 끓여 먹거나 술로 담가 마셨고 꽃으로 만든 국화전도 인기 있는 음식이었다. 옛기록에 따르면 감국을 채취해 꽃받침과 꽃술을 제거한 다음 물을 뿌려 축축하게 하고 쌀가루를 묻혀 전을 부친다. 이때 꽃잎이 뭉치지 않도록 해야 모양이 곱다. 꿀에 담갔다가 꺼내어 말려 둔 뒤 겨울이나 봄, 여름까지 먹을 수 있다고 했다.
국화는 은자나 선비의 정조를 상징하는 꽃이다. 조선 문인 신경준은 “국화는 입을 다물고 뒤로 물러나 있다가 여러 꽃들이 마음을 다한 후에 홀로 피어 바람과 서리에 꺾이는 것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니 양보하는 정신에 가깝다 하지 않겠는가?”며 국화를 통해 양보하는 정신을 배웠다고 한다.
집 앞 정원의 소국화가 누렇게 말라버렸다. 겨우내 눈 속에 있다가 봄에 다시 파란 잎을 피우니 참, 신기한 일이다.
학자 홍유손은 출세가 늦다고 불평한 후학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국화가 늦가을에 피어 된서리와 찬바람을 이기고 온갖 화훼 위에 홀로 우뚝한 것은 빠르지 않기 때문이라오. 세상 만물은 일찍 이루어지는 것이 오히려 재앙인 법이지요. 빠르지 않고 늦게 이루어지는 것이 그 기운을 굳게 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이겠소? 국화는 이른 봄에 싹이 돋고 초여름에 자라고 초가을에 무성하고 늦가을에 울창함으로 이렇게 피는 것이라오. 대개 사람이 살아가는 것도 이와 무엇이 다르겠소.” 홍유손은 국화를 두고 조숙 보다는 대기만성이 중요하다는 공부를 했다.
옛 선조들은 국화를 보고 오히려 그 늦은 성장을 배우는 것이 사물을 성찰하는 공부라 생각한 것이다. 공부는 책을 통하여 지식을 확충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혜를 얻어 온전한 인격체가 되는 과정이라 하였다.
때늦은 국화 공부지만, 늦게 핀 국화꽃의 당당함을 이제라도 알게 되어서 흐뭇하다. 날이 풀리면 국화 주위에 거름이나 좀 뿌려 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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