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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G 오토 세일

욕망에 휩싸인 새 신부, ‘여성 햄릿’으로 돌아오다

헨리크 입센 ‘헤다 가블러’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Mar 23 2025 11:22 AM

이영애·이혜영, 각각 ‘헤다’ 무대에 1891년 초연 당시 혹평 쏟아져 화려한 삶 방해하는 남자의 파멸 유도 “악랄하고 비도덕적인 암여우” 최악 評 한 세기 만에 고독 짓눌린 인물 재평가 “입센의 인물 중 가장 현대적 캐릭터”


“난 끔찍할 정도로 지루했다고요.(…) 게다가 더욱더 견딜 수 없는 건 단 한 사람, 그것도 같은 사람과 언제까지나 늘 함께 지낸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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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개막하는 연극 '헤다 가블러' 두 편의 주연을 맡은 배우 이영애와 이혜영. LG아트센터 서울·국립극단 제공

 

삶의 지루함을 토로하는 이는 신혼여행을 마친 새 신부다. 노르웨이 상류층 집안의 29세 여성 헤다는 6개월간의 장기 신혼여행에서 막 돌아왔다. 헤다는 교수 임용이 예정된 예르겐(영어명 조지) 테스만과 사랑 없이 결혼했다. 테스만은 신혼여행지에서조차 자료 수집에 열성인 고지식한 문화사 연구자. 지루하기 짝이 없는 헤다의 삶에 불현듯 옛 연인이자 남편의 학문적 경쟁자인 뢰브보르그(영어명 뢰브보그)가 나타난다. 방탕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역작이 될 원고를 완성해 테스만의 교수 임용을 위협하는 존재로 돌아왔다. 뢰브보르그의 환골탈태는 그의 새로운 뮤즈 테아 엘브스테드 덕분이었다. 테아는 헤다가 별 볼 일 없게 여겼던 동창생. 질투와 욕망에 휩싸인 헤다는 뢰브보르그의 원고를 불태워 버리고, 원고를 잃은 뢰브보르그는 헤다에게서 건네받은 권총으로 생을 마감한다. 헤다를 욕정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헤다 주변을 맴돌던 브라크 판사는 뢰브보르그를 죽게 한 권총이 헤다의 것임을 안다. 자신이 입을 열지 않는 한 경찰이 밝혀내지 못할 것이라는 브라크 판사의 협박에 헤다 역시 자살한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지 단 이틀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희곡 ‘헤다 가블러’는 헤다·예르겐 테스만 부부, 뢰브보르그와 테아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틀간의 이야기다. 4막 구성 연극에서 시종 무대를 지키는 타이틀 롤 헤다 가블러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는 비현실적 캐릭터, 빌런 아닌 빌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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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극작가 리처드 이어 각색본 연극 '헤다 가블러'의 2005년 공연 포스터. LG아트센터 서울 제공

 

 

헤다 ‘가블러’와 헤다 ‘테스만’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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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크 입센. 위키피디아


‘희망 없는 퇴보의 표본.’ ‘악랄하고 비정하며 비겁하고 비도덕적이며, 이간질하는 암여우.’

‘헤다 가블러’는 1890년 12월 출간돼 1891년 1월 31일 독일 뮌헨 레지덴츠테아터에서 초연됐다. 평론가들은 혹평을 쏟아냈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가 전한 당시 평론가들의 반응 중엔 유독 헤다를 향한 감정적 표현이 눈에 띈다. 입센 권위자인 김미혜 한양대 연극영화과 명예교수는 “당시 리뷰는 최악이었고 ‘이해 불가능’이라는 말이 가장 많이 등장했다”며 “헤다는 현실에서 찾아보기 힘든 비사실적 인물이어서 이해하기 어려워했다”고 말했다. 이탈리아와 독일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하던 입센은 이 작품에 쏟아진 악평에 괴로워하며 27년간의 타국 생활을 접고 노르웨이로 돌아갔다.

‘헤다 가블러’는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인물의 심리 묘사가 복잡미묘하다. 헤다는 오만하면서 겁쟁이고, 차가운 듯하지만 열정적이다. 지적이지만 세상과 자신에 대해 무지하고, 성적으로 열망하지만 관계는 거부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헤다를 사악하다고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모호한 캐릭터로 평가한다. 헤다의 결혼 목적은 화려한 삶이었다. 이에 방해가 되는 뢰브보르그에게 헤다는 권총을 쥐여주며 스스로 파멸하도록 유도한다. 미국 문학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헤다 가블러를 “(오셀로를 파멸로 이끄는) 이아고와 클레오파트라의 결합”이라고 평했다.

헤다는 철저하게 욕망에 충실했던 까닭에 악인의 오명을 썼다. 희곡의 주인공 이름은 헤다 테스만이지만 제목은 ‘헤다 가블러’다. 입센은 자신의 작품을 프랑스어로 옮긴 역자 모리츠 프로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 희곡의 제목은 ‘헤다 가블러’(남편의 이름을 딴 헤다 테스만이 아니라)”라며 “남편의 아내이기보다 아버지의 딸로 여겨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했다”고 적었다. 자신의 정체성과 이름의 가치를 지키며 ‘나’라는 사람 자체로 살아가려고 했던 사람, 그게 바로 헤다였다.


탄생 한 세기 만에 현실적 캐릭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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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트 블란쳇이 주연한 연극 '헤다 가블러'. 인스타그램 캡처


자기 파괴적 나르시시스트인가, 억압적 사회의 잔인함에 고통받은 영혼인가. 헤다를 둘러싼 비평계의 다각적 해석과 논란은 한 세기가 넘게 지속됐다.

시대가 변하고 사회적 분위기가 달라짐에 따라 구습을 거스르려는 헤다를 향한 비판적 시각도 누그러졌다. 헤다는 이제 인간 정신에 대한 날카로운 탐구이자 현대 드라마의 밑거름으로 여겨진다. 현실에 없던 캐릭터였던 초연 당시와 달리 현실에서도 마주할 법한 인물이 됐다. 모호하고 예측할 수 없는 헤다와 같은 인물은 현대 영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상류층이었다가 파산한 뒤 무수한 거짓말로 추락을 앞당기는 영화 ‘블루 재스민’(2013)의 재스민이나 영화 ‘타르’(2023)에서 인생의 절정에서 욕망과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몰락하는 리디아 타르는 헤다와 닮은 구석이 있다.

김미혜 교수는 “헤다는 입센이 그린 여성 인물들 중 가장 흥미롭고 현대적인 캐릭터이자 시대를 앞서 조산된 여성”이라며 “입센 생전에 이 작품이 최악으로 수용된 것은 헤다가 그 시대가 수용 가능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대인의 하나의 표상으로서 2025년 관객에게는 헤다라는 캐릭터의 불행과 고독, 욕망, 상실감이 낯설지 않다”는 이야기다.


이영애의 ‘헤다’ vs 이혜영의 ‘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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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이영애가 10일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열린 '헤다 가블러' 대본 리딩에 참석해 있다. LG아트센터 서울 제공


헤다 가블러를 빌런으로, 혹은 사회의 희생자로 만드는 것은 결정적으로 주연 배우의 역할 해석에 달렸다. 5월에 각각 무대에 오르는 배우 이영애(54)와 이혜영(63) 주연의 ‘헤다 가블러’ 개막이 기대를 모으는 이유다. 이영애의 ‘헤다 가블러’는 5월 7일~6월 8일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이혜영의 ‘헤다 가블러’는 5월 8일~6월 1일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다.

‘헤다 가블러’는 일부 비평가들에 의해 ‘여성 햄릿’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다양한 분석의 여지가 있는 도전적 역할이라는 의미다. 배우 이영애를 무려 32년 만에 다시 무대에 불러 세운 것도 이 때문이다. 이영애는 지난 10일 첫 대본 리딩 현장에서 “’헤다 가블러’는 운명처럼 다가온 작품”이라며 “그동안 드라마, 영화 등 좋은 작품을 많이 했지만 배우로서 항상 목마름이 있었는데, 50대가 된 지금 여자로서 배우로서 다양한 감정을 쏟아낼 수 있는 캐릭터가 바로 헤다가 아닌가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혜영에게도 ‘헤다 가블러’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2012년 명동예술극장 기획 공연 ‘헤다 가블러’는 이혜영의 12년 만의 무대 복귀작이었다. 그리고 13년 만에 국립극단의 ‘헤다 가블러’로 다시 관객과 만난다. 김미혜 교수는 “햄릿이 대학생 나이지만 어린 배우가 제대로 연기하기 어려운 다층적 인물이어서 역량 있는 나이 든 배우가 소화하는 것처럼, 경험이 풍부한 배우들이 연기할 헤다 가블러가 기대된다”고 말했다.

국립극단 박정희 예술감독이 연출하는 이혜영의 ‘헤다 가블러’는 입센의 원작 희곡을 약간 윤색할 예정이다. LG아트센터의 개관 25주년 기념 공연인 이영애의 ‘헤다 가블러’는 2005년 런던에서 초연한 영국 극작가 리처드 이어의 각색본을 토대로 전인철 연출가가 이끈다. 이어는 “’헤다 가블러’가 매력적이면서 대담한 점은 재치, 예상치 못한 엄숙함의 결여, 관객의 기대에 대한 도전, 삶을 단순하게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에 있다”고 말했다. 과연 두 스타 배우의 헤다 가블러는 어떤 삶의 의미 탐구와 진실로 관객을 데려다주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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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이혜영이 10일 서울 종로구 동숭동 국립극단 연습실에서 '헤다 가블러' 대본 리딩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국립극단 제공

 

김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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