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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유증
김외숙의 문학카페
- 유희라 기자 (press1@koreatimes.net)
- Mar 31 2025 09:13 AM
사위는 장모님보다 6살 많았다.
당신보다 연세가 많던 사위를 장모님은 ‘목사님’이라 불렀다. 식구들에게 ‘목사님은 양반’이라고도 하셨는데, 장모님에게 ‘양반’이란 단어는 인품을 지닌 분에게 붙여 부르는, 최고 존중의 의미였다.
사별하여 오래 혼자 살던 딸이 북미주 여행 중에 만난, 자신보다 스물여섯 살 많은 푸른 눈 노 목회자의 청혼을 받고 고심하고 있었을 때, 다시는 안 볼 듯 오래 침묵하던 장모님은 자줏빛 고름의 연분홍 한복을 지어 딸에게 안기며 ‘목사님과 웃으며 살아라.’고 했다. 쉰이던 딸은 그렇게 태평양을 건너 푸른 눈 목회자의 아내가 되었다.
다른 언어, 문화와 관습, 혈육 없는 낯선 환경에서 마주해야 하던 낯선 사람과의 낯선 삶, 마음의 뿌리까지 옮겨가지 못한 아내는 매일 발목을 거는 그 낯섦과 씨름해야 했다.
아내는, ‘왜 이렇게 다르냐,’며 낯선 단어 조각으로 짝의 심장을 긁었고, 긁혀 아팠을 심정을 하고도 푸른 눈의 짝은 가만히 듣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너는 왜 나와 다르니?’라며, 자신에게 익숙한 언어 구사로 아내의 심장을 지질 수 있었음에도 늘 바라보며 듣기만 하던 짝에 대해 아내는 어느 날부터, 자신이 몹시 무례하다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했다. 무례는 주로, 참지 못하던 감정 실린 언사가 원인이었다.
“하고 싶은 말 다 했으면 우리, 나가자.”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이 무례임이 분명한데, 짝은 결코 아내를 갋지 않았고, 강 따라 펼쳐진 파크 웨이를 드라이브하고 어딘가에 들러 먹고 마실 것을 시킬 뿐이었다.
아내는, 그렇게 긁어 아프게 하고도 예사롭게 먹고 마시는 자신의 행위와 자신과는 다른, 가만히 들으며 기다려 스스로 깨닫게 하는 짝의 그 방법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얼굴 덥게 하던 비교는 점점 생각과 말을 다듬게 했다.
시간 지나면서 아내는 점점 낯선 삶에 익숙해졌고, 낯섦에 시달리던 마음이 평화를 누리게 되면서 선택한 한 사람을 더 깊이 알게도 되었다.

언스플래쉬
‘요람에 있을 때 내가 안고 왔답니다.’
늘 손잡고 다니는 서로 다른 생김새의 남녀, 눈에 확연히 띄는 다른 연배의 두 사람에게 어떤 사이냐고 호기심 많은 이들이 물으면, 푸른 눈의 짝은 미소 지으며 곧잘 그렇게 대답했다.
짝이 원래 유머를 좋아하는 사람이란 사실을 아내는 알고 있었다. 어떠한 상황을 유쾌하게 받아들여 함께 웃을 수 있음은 찰나에 발휘할 재치와 기지, 그것을 부릴 마음의 여유로 비롯된다는 것을, 아내는 짝을 통해 알았다.
한 사람을 잘 아는 일은, 그 사람뿐 아니라 그 사람을 그 사람이도록 한 모든 배경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야 비로소 가능하며 그것은 곧, 그 사람에 대한 총체적인 믿음에서 비롯됨을 아내는 깨달았다. 그 믿음은, 늦은 나이에 태평양을 건넌 그 파격적인 선택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의미이기도 했다.
짝이 연세 아흔에 이르면서 기억을 잃기 시작했다. 기억을 잃어가면서 말수도 줄였다. 말 수 줄여가는 짝을 바라보며 아내는, 다른 언어란 장벽 앞에서 사금파리 같던 낱말 조각을 분별없이 휘둘렀던 초기의 낯섦의 시절을 떠올렸다.
낯섦에 시달리다가 애꿎은 짝에게 화풀이한 그때, 마치 ‘내가 다 들어줄게.’라는 듯이 묵묵히 들으며 바라보던 짝처럼, 이제부터는 ‘내 차례’란, 가볍지 않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그래야 하고, 그것이 맞다, 는 생각이었다.
여섯 해 동안 아내는, 그의 눈과 입이었고 손이었고 발이었다.
여섯 해 동안 아내는, 그의 어머니였고 성도였고 친구였는가 하면, 요람 속의 딸이기도 했다.
짝이 말년에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있음은 다행이었다. 그 누군가가 그를 가장 잘 아는 바로 아내 자신이란 사실도 다행이었다.
고요한 짝의 심정을 고요한 심정으로 다가가 이해하고 나니, 맡은 그 모든 역할은 아내에게 외려 감사의 조건이었다.
그러던 지난해 성탄 전날 아침, 갑작스러운 증세로 응급실을 찾아야 했다.
”환자를 집에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응급 치료 후 병실로 옮겨 치료받다가 호스피스 병동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응급실 의사가 난데없이 호스피스란 단어를 언급했다.
“기도해 주세요!’
밤마다 짝이 자신의 손을 아내의 머리에 얹고 드리던 기도를 아내는 그 경황에 떠올렸다. ‘호스피스’란 단어 때문이었다.
그러나 짝의 팔엔 이미 여러 가닥의 생명줄이 연결되어 있었고, 머리에 손 얹고 기도하는 일조차 버거워할 짝 대신 아내는 자신의 손을 짝의 머리에 얹고 평소 짝이 하던 내용의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가족을, 그를, 아내 자신을 위한 기도였다.
여린 목소리의 ‘아멘’으로 짝이 아내의 기도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며칠 후, 눈을 감았다.
오래전, 두 번째의 청혼에서, ‘이번에도 ’노‘라고 하면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점프하겠다던, 사랑 앞에서 절박한 적 있던, 그의 눈이었다. 그 간절하던 눈동자 속으로 오히려 아내를 점프하게 한, 그래서 태평양을 건너게 한, 바로 그 푸른 눈이었다.
그의 연세, 아흔일곱의 12월이었다.
사위를 양반이라던 장모님도 고요히 눈 감았다. 여섯 해 연장자이던 푸른 눈의 사위가 떠난 지 두 달 후였다.
두 달 동안, 천국을 향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아흔일곱의 사위와 아흔하나의 장모님은 그렇게 사랑을 두고 떠났다.
바로, 스물한 해 동안 나의 사랑, 나의 스승, 나의 목사님, 내 짝이었던 사위, 제임스 힐스 목사, 그리고 평생 내 편이던 어머니였다.
받은 사랑으로 내 잔은 늘 넘쳤고, 그 기억으로 잔은 여전히 넘치겠지만 지금은,
몹시 허하다.
내 삶을 괴고 있던 두 축을 차례로 잃은 후유증일 것이다.

김외숙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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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라 기자 (press1@koreatimes.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