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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살 섬 색시가 순정을 바쳐···
황현수의 들은 풍월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Apr 23 2025 05:04 PM
인기리에 방영을 마친,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는 1960년대 제주 여성들의 삶을 그린 드라마다. 잔잔한 스토리에 아이유, 박보검뿐 아니라 문소리 등 출연 배우들의 명품 연기로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드라마의 대부분이 제주의 아름다운 바다와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만큼, 해녀들과 제주도 사람의 사투리, 전통 음식 등의 독특한 섬 문화도 엿볼 수 있다. 드라마를 보며 ‘내가 본 것’과 ‘내가 아는 것’이 섞여 마치 그 장면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상추자는 선착장에서 초등학교와, 우체국, 면소사무소, 파출소 등이 있는 상업지구까지는 천천히 걸어 구경해도 15분이면 족하다.
나는 1976년부터 77년까지 14개월 정도, 추자도 <해군 레이다 기지>에서 근무했다. 추자도는 진도와 제주도 사이에 있는 섬이다. 행정 구역으로는 북제주군에 속했었다. 지금은 제주시로 편입되고, 바다낚시로 유명한 곳이지만 당시는 오지 중의 오지였다. 나에게 ‘인생에서 가장 황금기가 언제였냐?’고 물으면 서슴없이 ‘추자도 군복무 시절’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진한 추억이 있다. 하지만, 막상 그 시절에는 그때가 그렇게 좋은 줄 미처 몰랐었다.
당시 우리 부대의 병력은 수병 16여 명과 하사관 14여 명, 장교 2명 등이 근무했다. 나는 병장으로 동기생과 함께 선임 수병을 하고 있었다. 과업이 끝나고 영외 거주자(중사)들이 퇴근하면 부대에는 당직자와 몇 하사관을 제외하곤 거의 병들만 근무했다.
기지장은 해군사관학교 출신의 대위였다. 30대 초반의 나이였지만, 추자도의 기관장 회의가 있는 날이면 밀집모자에 권총을 허리에 차고, 무전병과 사관 당번과 함께 회의에 참석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회의하는데 권총까지 차고 가야 했나 싶다.
섬 주민은 약 5천 명 정도라 하지만, 실제는 육지로 많이 나가 있고 3천여 명 정도가 살았다. 중학교밖에 없어서 고등학교를 다니려면 목포나 광주, 제주로 유학을 가야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중학교를 마치면 배를 탔고, 그나마 여유 있는 자녀들만 육지의 친척 집이나, 아는 집에 얹혀 지내며 공부를 했다. 그러다 보니, 섬에는 젊은이가 거의 없었고 중학교를 졸업하면 대개 서울, 인천이나 마산 등의 공장으로 떠났다.
그래서 추자도에는 10대 말~20대 초반의 젊은 처자를 보기 힘들었다. 간혹 육지에 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섬으로 돌아오는 20대 초반의 여성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다닐만한 변변한 직장은 없었다. 전화 교환원 업무를 하는 우체국과 면사무소, 파출소, 국민학교, 수협공판장, 이발소 등이 있었지만, 그나마도, 기관장 자녀들의 차지였다.
추자도 풍경의 하이라이트 나바론 하늘길. 영화 ‘나바론의 요새’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하는데, 내가 근무하던 해군 기지가 산 위에 있었다. Pixabay
당시만 해도 섬 생활이 어려워, 식구 수를 줄이기 위해 젊은 여성들은 19세 정도가 되면 섬 총각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 하지만, 바로 결혼하는 게 아니라, ‘동거’를 했다. 결혼하기 전에 미리 몇 년을 같이 살며 ‘궁합’을 맞췄다. 이런 문화가 추자도에서만 있었는지, 아니면 다른 섬도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 기지에 근무하던 영외 거주자들인 중사들은 대개 추자도 처녀와 동거를 하거나, 결혼해 살았다. 섬 처녀들 입장에선 군인들이 훌륭한 신랑감이었다. 그들이 육지로 발령 나면 섬을 벗어날 기회도 있으니 말이다.
상추자도는 선착장에 내려 부두가 길을 따라, 파출소와 면사무소가 있는 상업 지구까지는 천천히 걸으며 구경해도 15분이면 족하다. 주민들은 서로 다들 아는 사이여서 친척지간이나 겹사돈을 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누구’의 신상에 대해 말하면, 그 집 숟가락 수까지 알 정도로 빠삭하다.
<폭싹> 드라마를 보면 문학 소녀였던 애순(아이유)가 시를 좋아하는 장면이 나온다. 짧지만, 울림을 준 이 대사는 섬 처녀의 욕망을 대변한다.
"나는 무조건 서울 놈한테 시집갈 거야. 섬 놈한테는 절대(안 가)! 급기야 노스탤지어도 모르는 놈은 절대, 네버!"
섬 처녀들의 꿈은 육지로 가는 것이다. 그들의 어머니도 그러했고, 할머니도 그랬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육지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 하지만, 육지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다. 이미자가 부른 <섬마을 선생님>에 그 욕망이 잘 표현돼 있다.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선생님/ 열아홉살 섬 색시가 순정을 바쳐/ 사랑한 그 이름은 총각 선생님/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를 마오
라디오 드라마의 주제곡이었던 이 노래는 겉으로는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라고 하지만, 그 이면에는 서울에 대한 동경이 담겨 있다. ‘열아홉 살 섬 색시가’ 왜, 총각 선생님을 사랑했겠는가? 육지에서 온 남자에게 끌린 이 처자의 심리는 섬을 벗어나고 싶어서다.
이 처자의 꿈은 이루어졌을까? 노래만으로 성공을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트로트는 밝고 명랑한 분위기보다는 체념과 탄식, 슬픔의 노래가 대부분이다. ‘순정을 바친 섬 처녀는 육지로 남자를 떠나보내고, 선생님은 서울의 애인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 황당하고 갈 곳 없는 섬 처녀는 술집에서 일하게 되는데…’ 대충 이런 스토리가 펼쳐진다.
당시에는 섬을 주제로 한 노래가 많았다. 섬이란 산업화와 도시화가 미치지 않는 순박한 공간이고, 바다라는 장애를 앞에 두고 있다. 이미자의 또 다른 곡 <흑산도 아가씨>에서는 ‘애타도록 보고픈 머나먼 그 서울을/ 그리다가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라고 노래한다.
1970년대, 마음까지 검게 타버린 ‘섬마을 아가씨’들은 이제 볼 수 없지 싶다. 10 년 전 추자도에 방문했더니, ‘섬 색시’의 자리에 ‘베트남 처자’들이 결혼해 살고 있었다. 여자들이 섬에서 살려고 하지 않아, 국제 결혼을 하는 풍습이 생긴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광주나 목포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다. 세상은 변하고 돌고 돌아 가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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