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돌풍(突風)을 만난 날
권천학 | 시인·K-문화사랑방 대표
- 유희라 기자 (press1@koreatimes.net)
- May 26 2025 09:44 AM

권천학 시인·K-문화사랑방 대표
'아점'(아침과 점심을 겸하여 늦게 먹는 식사)을 먹은 후 느지막한 산책길에 나섰다. 정오를 넘어선 시간이었다. 그래도 평소보다 두어 시간 이른 시간이다. 나에게 걷기는 늘상 걸어야한다는 운동 강박에 쫒기듯이 억지로 시도하는 일이다. 그러다보니 오전에 대충 해야 할 일들을 어느 정도 마친 후에야 걸어볼까 하는 생각으로 마지못해 하는 운동(?)이다 보니 항상 오후 4시경이 되곤 했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이 운동이고 보니 걷는 일만으로도 굉장한 결단이기 마련이다. 걷기가 좋은 운동이라지만 나에겐 운동이란 말조차 민망하다.
집을 나설 때 어딘지 불안정한 기류를 느꼈다.
이른 아침에 짧은 봄비도 다녀갔고, 하늘도 회색빛이다. 변덕 많은 봄날씨 아닌가. 하다말다 하는 걷기가 그나마 나에겐 운동숙제 풀이이다. 잠시 밝아 보이는 그 틈을 이용하여 오늘의 숙제를 해치우고자 마음먹고 나선 길이었다.
로얄욕 로드(Royal York Road)를 막 벗어나 던다스 스트리트(Dundas Street)로 들어서는데, 바람 냄새가 심상찮았다. 저만큼 반환점인 세인트 존 성당(St., John Catholic church) 앞길에 당도하기 전이었다. 그러잖아도 꾀를 부리고 싶은데 나무를 흔들어대는 바람의 기세와 회색빛 하늘에 얼룩얼룩 무늬를 만들며 떠도는 구름을 바라보며, 그 심상찮은 날씨를 핑계거리 삼아 잠시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돌아설까 말까?
그런 나의 속내를 눈치라도 챈 듯, 후두둑 굵은 빗방울들이 때렸다. 바람이 속도를 내는 것이 분명했다. 마침 카톡이 카톡, 바람 속에서 마음마저 흔들리며 열어보았다. '곧 비온대요. 빨리 들어오세요' 딸의 다급한 마음이 전해졌다.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셈. 잘 됐다! 막 돌아섰는데, 벌써 빗방울이 굵어지고 바람 등쌀이 강해졌다.

돌풍 사진. 저자 제공
100m 정도 되는 거리, 던다스에서 로얄욕 로드로 되짚어 들어서는 커브길, 빗방울은 이미 굵은 대추알크기로 느껴지고 바람은 태풍 격이었다. 챙 넓은 모자의 양쪽이 꺾이며 빗물이 점퍼를 어깨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이었다. 턱 아래 모자의 끈을 조였다. 어느 새 어둑해진 하늘은 맷돌이 굴러다니는 소리를 내며, 스치는 빗줄기가 지나갔다.
그 오버로드 아래, 내려다보이는 공터의 풀밭위에 서 있는 철탑과 그 철탑 옆으로 뻗어있는 철길, 그리고 그 주변의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이 휘몰아치는 비바람에 젖으며 몸통까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셀폰을 꺼내었다.
나는 요즘 ‘바람’에 푹 빠져있는 중이었다. 평소에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모습들 보는 것을 좋아한다. 나무와 바람 그리고 그것이 함께 빚어내는 풍경은 나에게 일종의 명상(瞑想)이다. 휘몰아치는 비바람에 젖어드는 몸통을 휘며 흔들리는 나무를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짤막한 동영상 두엇과 몇 컷의 사진,...
등 뒤에서 달려가는 차들이 무슨 짓하고 있는 거야? 미쳤니? 하고 내지르며 달아나듯, 잽싸게 사라져갔다. 셀폰을 쥔 손가락 사이로 빗물이 방울져 흘렀다.
기계 속으로 들어가면 안 되는데 생각하면서도 할 만큼은 못하더라도, 찍을 만큼의 최소한은 찍고 나서, 서둘러 마무리를 했다. 그제야 걸음을 서둘렀다. 그런데도 여전히 바람이 등을 떠밀었다. 잠간 사이인데도 흠뻑 젖었다. 속이 후련했다.
“엄마 왔어?”
모틍이의 옆문에 키를 꽂고 살그머니 집안에 들어서는데 낌새를 알아챈 딸이 소리치며 반겼다.
'페트릭이랑 아리랑 안 만났어? 엄마 찾으려 나갔는데...'
서너 개의 층계를 뛰어내려와 젖은 점퍼를 받아들며 하는 말이었다.
“못 만났는데...”
물이 뚝뚝 듣는 모자를 벗어 옷걸이에 거는 사이 딸이 귀에 대고 있는 셀폰에서 대화소리가 가늘게 흘러나왔다.
‘응, 할머니 돌아오셨어... 알았어. 빨리 와...’ 웅얼웅얼...
잠시 후,
운동화속의 젖은 양말까지 받아 든 딸이 현관 쪽으로 갔다. 얼핏 비에 젖어 더욱 선명한 빨강으로 보이는 '모라니'가 현관문 유리창 사이로 비쳤고, '모라니'에서 내린 페트릭과 아리가 현관문으로 들이 닥쳤다.
“할머니 어디 있썻 써었어 써요?”
아리의 서툰 한국말에 반가움이 배어있고, 뒤따라 들어오는 페트릭의 얼굴도 안도의 빛으로 환해졌다. 두 사람의 후드에서 물방울이 뚝뚝 듣고 있었다.
짧은 돌풍이 불러온 우리집의 짤막한 비상상태였다.
비상상태를 만들어낸 원흉은 나였다.
그런데도 미안함 보다는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무슨 망발(妄發)인가!
www.koreatimes.net/오피니언
유희라 기자 (press1@koreatim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