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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선교와 독립운동의 밀알이 된 윌리엄 존 맥켄지
광복 80주년 특집...'애국지사들의 이야기 9' 시리즈(1)
- 유희라 인턴기자 (press1@koreatimes.net)
- Jul 21 2025 04:22 PM
박우삼(애국지사기념사업회)

윌리엄 존 맥켄지 (William John McKenzie) 선교사
캐나다 기독교가 해외 선교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선교사 중의 한 사람이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윌리엄 존 맥켄지 (William John McKenzie) 선교사다. 그가 1893년 12월12일 조선에 도착하여 황해도 소래에서 선교활동을 시작 한 때는 그의 나이 32세의 젊은이였다. 한국 선교의 큰 뜻을 안고 조선에 도착했지만 도착한지 고작 559일(약1년6개월) 만에 그만 열사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34세가 채 되지도 않은 아까운 나이였다. 그가 조선에 올 때 그는 캐나다 장로교회 소속 선교사 였지만 교단에서 공식적으로 지원하는 파견 선교사가 아닌 독립 선교사 자격으로 왔다. 그는 조선에 오기전 캐나다에서 교단에 캐나다 장로교가 조선 선교를 위해 자신을 공식적으로 후원하는 파견선교사의 자격으로 파송 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교단으로부터 재정이 부족하여 새로운 선교지역인 조선을 개척할 여력이 없다며 그의 공식지원을 수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친지들과 소속교단 개별 교회에서 헌금한 자금을 모아 1년 동안의 여비(당시 미화 8백달러)를 들고 자비량 선교사로 조선에 온 것이다. 당시 조선백성들은 경제적으로는 모진 가난과 함께, 외부적으로는 청일전쟁등 외세의 침략과 개방 압력으로 일본군들에게 핍박을 받았으며, 내부적으로는 동학농민 운동으로 동학군들에게 이중으로 박해를 받는 혼란한 시기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윌리엄 존 맥켄지는 음식, 주거등 모든 면에서 조선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생활하며(월 생활비 미화 7불) 선교하여 조선의 개화와 그 후 독립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비록 짧은 생을 마감하고 짧은 기간 조선에서 살았지만 그의 자주자립에 기반한 희생정신의 선교는 조선인 뿐만 아니라 캐나다인에게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선교를 통한 양국가의 교량역할도 담당했다. 그가 주도해 신축한 소래교회는 조선 최초의 자립 기독교 교회로 평가받고 있다. 또 조선 최초의 남녀공학인 김세학당(후에 해서 제일학교)을 세워 개화와 민족교육에 힘썼다. 본인이 인도하여 새롭게 단장한 소래교회의 봉헌 예배마저 치르지 못하고 선교현장에서 사망한 윌리엄 존 맥켄지의 순교적 생애를 접한 캐나다 장로 교단은 조선에 대한 선교 방침을 획기적으로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즉 교단차원의 후원선교사를 조선에 파견하기로 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공식적인 캐나다 장로교회 조선선교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의 밀알과 같은 선교 활동으로 그의 사후부터 1925년까지 캐나다 선교사 관련 한국 선교 상황은 선교부6곳, 장로교 선교사134명, 교회 310, 개척지 110곳, 목회자 23명, 교사와 전도사 500명, 선교부 산하 학생과 주일학교 학생 2만명, 교인 18,385명에 이르도록 부흥 했다고 전해진다(출처:유 영식저, 윌리엄 존 맥캔지의 삶과 선교). 그 후 그의 자립정신의 신앙을 물려받은 소래교회는 일제 강점기에 애국지사들의 기지역할을 충실히 담당 했으며, 창립당시 초대장로 였던 서 경조는 한국 장로교회 최초 7인 목회자의 한 사람이 되었고, 서 장로의 후손들 (아들 서 병호, 손자 서 재현)은 알려진 애국 지사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또 김 마리아등의 애국지사들도 이 교회 출신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조선 선교의 시작
윌리엄 존 맥켄지는1861년7월15일 캐나다 최동쪽 노바스코샤주 케이프 브레튼 섬에서 아버지 로버트 맥켄지와 어머니 플로라 멕레 사이에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맥켄지 가족의 조상은 영국 스코트랜드로 부터 이민 온 독실한 기독교인 이었다. 이런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한 맥켄지는 할아버지 윌리엄의 영향력을 받아 유년시절부터 선교사 로서의 꿈을 키워 나갔다. 나이에 비해 조숙하고 영리했던 맥켄지는 14세에 당시 공립학교 최고 수준의 학위인 BV자격증을 획득했다. 자격증 획득 후 고향에서 13-19세 까지의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사를 역임했다. 1889년 핼리팩스 소재 댈하우지 대학에서 문학사로 졸업했다. 대학졸업 후 목회자의 길을 걷기위해 같은 지역의 파인 힐 신학교(Pine Hill Presbyterian Theological College)에 입학했다. 재학 중 이 학교의 학생 선교협회(Student Missionary Association)는 그를 핼리팍스 지역을 떠나 래브라도 (Labrador) 북극지역으로 18개월동안 선교 파견한 적이 있다. 그는 선교여행을 가던 중 미국 선교잡지(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1884년 12월 호 성탄특집에 실린 "조선으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기사를 읽게 되었다. 이글은 그가 조선 선교사로 가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기사는 조선의 '이수정'이란 인물이 보낸 편지로, 자기는 조선인으로 일본에 와서 성경을 번역하고 있으나 조선에는 선교사가 없어서 성경을 번역해도 전할 사람이 없다며 미국에서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애절하게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이 기사가 젊은 신학도인 맥켄지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마치 성경에 바울사도가 2차 선교여행 중 마케도니아인의 환상을 보고 성령에 이끌리어 미지의 땅 유럽으로 건너 갈 때와 흡사한 기분 이었을 것이다(성경 사도행전 16장6절-10절). 그는 또 선교기간 중 그리피스의 <은둔의 나라, 조선 ( Corea, The Hermit Kingdom)>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바울처럼 조선선교를 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맥켄지는 마침내 선교의 손길이 닿지 않는 땅, 이방인들을 위한 해외 선교에 비젼을 품게 되고 조선 선교의 꿈을 하나하나 실천해 나갔다. 흥미로운 일은 이 18개월의 래브라도 선교훈련 기간이 그가 조선에 머문 기간과 흡사 하다는 것이다. 맥켄지는 이 여행을 마치고 다시 핼리팍스로 돌아와 파인 힐 신학교를 졸업했다. 신학교 재학 중 댈하우지 의과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빅토리아 종합병원에서 해외 선교에 필요한 의술을 연마했다. 이러한 준비를 마친 후 앞에서 기술한 여러가지 우여 곡절을 겪은 후 마침내 1893년 12월 12일 제물포에 도착했다.

맥켄지 목사 캐나다 생가.
거기서 그는 다시 서울로 이동하여 선교사들과 함께 조선말을 배우며 선교지를 탐색하던 중, 황해도 장연의 소래(松川 솔내)를 자신의 사역지로 정하고 1894년 2월 3일 소래에 도착하였다. 소래에서는 서 경조 일행이 맥켄지를 맞았다. 서 경조는 맥켄지를 보고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람”으로 알고 그를 맞이했다고 한다. 소래에서는 서 상륜, 서 경조를 중심으로 조선인 들이 자생적으로 세운 교회가 있었지만 목회자는 아직 없었다. 그래서 맥켄지가 초대 목회자가 되었다. 맥켄지는 소래교회를 섬기며 조선사람들을 사귀면서 조선말을 배웠다. 그는 조선 사람과 같이 먹고 자며 한복을 입고 짚신을 신으며 밀짚모자를 쓰고 조선 사람들의 일터를 찾아 조선의 문화와 관습에 동화되기를 희망하며 우리 문화를 깊이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였다. 그렇게 현지인 처럼 생활 하다보니 이나 빈대, 벼룩 모기같은 해충에 물려서 때로는 팔 다리가 퉁퉁 붓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조선 최초의 자생교회인 소래교회의 초대목사라는 자부심을 갖고 복음전도에 힘을 쏟았다. 그는 진정으로 조선인이 되어야 선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미국에서 온 언더우드 선교사가 찾아와서 그의 몰골을 보고 깜작 놀래며 "당신은 조선 사람이 아니야! 서양 사람은 조선 사람처럼 풍토병의 면역력이 없어서 고기를 먹어야 살 수 있어!“라고 충고하며 통조림 등 서양음식을 보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맥켄지는 "지금껏 잘 견디었는데 이제와서 서양음식을 먹게 되면 더 이상 조선음식을 먹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 음식을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맥켄지가 조선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1894년 2월 전봉준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중앙정부가 농민들의 고충을 해결하기 보다는 동학운동가들을 체포하고 박해했다.이에 농민들은 동학군을 결성하여 반발했다. 맥켄지도 기독교를 서학이라며 적대시하는 동학군의 공격을 받았다. 그는 두 번이나 죽음의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그는 동학군에게 인도 주의적 의술을 베풀었다. 오히려 동학군의 요새를 찾아가 부상 동학군 들을 치료해 주며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었다. 어떤 때는 거꾸로 동학 지도자들이 맥켄지에게 부상 동학군의 치료를 요청하기도 했다. 동학군들은 맥켄지가 있는 소래교회는 하얀 천에 붉은 십자가(旗)를 높이 달게 하고, 그 표식을 보는 모든 동학군이 이를 침범하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동학 봉기 동안 동학군의 잔혹 행위로 고통받던 황해도 주민들에게 소래 마을은 그 지역에서 유일한 피난처가 되었으며 소래교회의 신자라는 신분은 신변안전을 위한 보증수표나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이때 많은 동학군들이 기독교로 개종해 소래교회의 신자가 되었으며 이를 통해 그는 동학(천도교)과 서학(기독교)간의 동맹을 촉진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즈음 소래교회는 1895년 7월 신축 예배당을 짓게 됐다. 신축된 교회는 아홉자 높이에 여덟칸 짜리 기와로 새롭게 단장했다. 건축의 도목수로는 김 윤방 집사가 맡았다. 그러자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를 위시한 많은 선교사들이 신축을 위해 건축 기금을 후원금으로 모아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이때 맥켄지는 교회 담임 목사로서 교인들에게 그가 자비량 선교사로 조선에 왔듯이 소래교회 교인들이 서구 선교사의 도움 없이 자주자립형 교회를 건축하도록 인도하여 교인들이 이 제안을 거절하고 자력으로 이 교회를 신축했다. 이를 섭섭히 여긴 선교사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은 교회 마당에 밝힐 양등 (석유램프)만으로 제한되었다. 이와 관련 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록에 의하면 미국에서 석유램프 5개를 가져와 새 예배당에 선물 했는데 ,밤에도 그 불빛이 얼마나 밝았던지 온 동네가 대낯 같이 밝았다고 전한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소래교회는 맥켄지가 조선에 도착하기 10년전 1883년 5월16일 서 상륜, 서 경조 형제가 황해도 장연군에 세운 교회 공동체이다. 그 후 이 교회는 맥켄지가 초대 담임 목사직을 맡으며 그의 자주 자립의 선교정신을 이어받아 단순한 기독교 교회로서의 선교적 역할을 넘어 지역사회를 선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나갔다. 이 교회를 통하여 교육과 복음이 전파되자 무지했던 조선땅에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찾아와 개화 되었다. 교인들 중에는 탐관오리에게 수탈 당하던 농민들이 예배에 참여 위로를 받았고, 이들을 규합하여 나라를 바로 잡겠다던 동학의 무리들도 있었다. 선교에 모범이었던 이 교회는 해외에서 새로 부임하는 선교사 마다 이곳에서 일정기간 적응훈련도 하고 조선문화를 익히는 선교훈련 센터의 역할도 담당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소래교회가 민족의 계몽과 잃어버린 나라를 찾으려는 독립운동 지사들의 산실이 되었다. 소래교회 건축을 맡았던 도목수 김 윤방 집사의 딸, 김 마리아는 애국 부인회와 조선 여전도회를 이끌며 여성의 지위향상과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녀는 해방을 1년 앞두고 고문 후유증으로 병사했다. 그가 숨지자 안 창호 선생은 “김 마리아 같은 여성동지가 열명만 있었 던 들 대한은 독립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친척 김 필례 역시 수피아 여학교 교장과 정신 여학교의 교장을 지내며 김 활란과 더불어 YMCA를 만들어 독립운동의 선봉장이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 주석을 지냈으며 해방 후 귀국하여 입법위원 의장(국회의장)을 지낸 한국의 독립 운동가 김 규식 박사도 이 교회출신이다.
서울여대의 고 황경 박사, 조선최초의 신학 박사가 된 남 궁혁, 서 경조 목사의 아들 서 병호 장로가 경신학교 교장을 지내며 조선의 근대화에 일익을 담당 했으며, 서 목사의 손자 서 재현도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애국지사로서 해방 후 해군제독을 지내며 3대에 걸친 애국지사의 후손이 되었다. 소래교회는 교회사에서 토착교인들이 건축비 전액을 부담하여 세운 첫번째 교회였으며,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라고 기록 되어있다.
맥켄지는 교육을 통해 조선의 근대화와 기독교 전파를 동시에 이루려고 노력했다. 그는 가부장적 유교 사회구조를 개혁하고 여권신장을 강조했다.
이의 일환으로 그는 학교 설립과 교육 프로그램 개발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소래에서 그의 유산으로 운영자금을 마련하여 1895년 2월 26일 “맥켄지 스쿨 ( McKenzie School )” 혹은 “김세학당”이라고 불리어진 조선최초 남녀공학 학교를 설립해 지리와 한국어, 수학, 한국사,성경, 주기도문 등을 가르치며 후학들을 양성했다. 조선이 근대화를 이루려면 한자 학습보다는 한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세는 맥켄지의 한글이름이다. 맥켄지는 학교를 시작하기전 서적 구입 운동을 시작하고 소래에 마을 문고를 운영했다. 후에 이 학교는 “해서 제일학교”로 개명했다. 또 이즈음 소래교회 에서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예배시 여신도도 처음으로 대중 기도를 인도할 수 있도록 했다.
한 알의 밀알이 된 맥켄지

황해도 소래에 있는 맥켄지 목사의 묘지.
맥켄지는 조선 사람들과 함께 삶을 공유했다. 이, 벼룩, 모기등 해충에 물려 고통 받으면서도 전도하고 지역주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하는데 자신의 삶을 바쳤다. 그러다 그는 무더운 여름 뜨거운 햇볕에서 모진 열병에 걸려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고, 그가 손수 교회를 세운지 얼마 되지 않는1895년 7월 23일 주일 날 그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한국에 온 지 채 2년도 안되는 해 끝내 낯선 이국에서의 그의 짧은 삶으로 마감한다. 그는 언제나 소래교회를 섬기고 소래사람들과 사귀고 청일전쟁 중에도 굳건히 교회를 지키다 떠났다.
맥켄지의 일기장에는 이런 글이 남겨 있다. 소래교회 신자들에게 "자신의 의복과 유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을 교회 부근에 묻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마지막 일기에서 " 조금은 나은 듯 하기도 하다. 죽음이 아니기를 바란다. 내가 조선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게 될 많은 사람을 위해서이다. 내가 조심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낮에는 뜨거운 햇볕 아래서 전도하고 밤이면 공기가 추워질 때까지 앉아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내 마음은 평안하고 예수님은 나의 유일한 희망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이루신다. 그러나 나의 몸은 고통이 너무 심해서 더는 글을 쓸 수가 없다. "라고 썼다.
이처럼 캐나다의 풍요한 삶을 뒤로하고 오직 조선민의 굶주림과 개화와 복음전파를 위해 이 땅에 와서 헌신적인 충성,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다가 희생의 제물이 된 맥켄지의 소식이 조선을 넘어 캐나다에 전해졌다. 캐나다 장로교회는 하나님께서 조선에서 맥켄지의 삶을 통해서 선교의 문을 열어 주었음을 깨닫게 되었고 맥켄지 선교사가 캐나다 교단의 공식적인 도움 없이 큰 도시보다는 소래라는 벽촌을 택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놓는 그의 순교자적 생애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이어서 1895년 12월26일 목회자를 잃고 고아가 된 소래교회의 교인대표 서 경조 장로는 캐나다 장로교회에 추가 선교사를 파견해 달라는 청원서를 송부했다. 마침내 캐나다 장로교에서는 "우리가 맥켄지를 지키지 못했다"고 후회 하면서 공식적으로 조선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1898년 9월4일 윌리엄 푸트 부부, 로버트 그리어슨 부부, 그리고 던칸 멕레가 부산항에 도착 함으로서 캐나다 선교사의 본격적인 조선 선교의 시대가 시작됐다.
그의 헌신적인 생애를 기술하면서 자꾸 생각나는 성경 귀절이 있다.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12:24). 한국에서는 1988년 9월30일 양지 총신대캠퍼스에 윌리엄 존 맥켄지가 설립한 소래교회의 복제 건물을 세웠다.
<참조문헌>
· Yoo,Young-sik , “The Impact of Canadian Missionaries in Korea”.
· 윌리엄 존 맥켄지의 삶과 선교 (엘리자베스 맥걸리 지음. 유 영식 옮김)
· 한국과 캐나다 나눈 역사 (유 영식 편저)
· 윌리엄 J. 맥켄지의 편지 및 일기
· 성경
· 그림과 함께 보는 조선 교회사 (양국주 편저)
필진의 말

박우삼 애국지사기념사업회 고문
캐나다 선교사들이 조선 땅에서 보여준 헌신과 사랑은 단순한 선교의 차원을 넘어, 조선의 자주와 독립을 위한 깊은 연대의 표현이었다. 이분들의 고귀한 삶을 다시 조명하며, 우리가 기억하고 계승해야 할 역사임을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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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라 인턴기자 (press1@koreatimes.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