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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보다 조선을 더 사랑했던 파란 눈의 이방인 제임스 스카스 게일
광복 80주년 특집...'애국지사들의 이야기 9' 시리즈(2)
- 유희라 인턴기자 (press1@koreatimes.net)
- Jul 25 2025 08:32 AM
문맹 퇴치 앞장...'춘향전' 등 영어로 번역

제임스 스카스 게일 (James Scarth Gale) 선교사
여는 말
일제 강점기 조선(구한말 선교사들이 조선으로 갔기 때문에 한국이란 표현 대신 조선이라 지칭함) 땅에 온 벽안의 선각자들 중 게일 선교사(한국명 기일)에 대해 쓰게 됨이 더한 기쁨이다.
1937년 1월31일 제임스게일(James Scarth Gale) 목사가 소천했을때 그의 오랜 동료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는 그를 추모하며 이렇게 그의 사역을 높이 평가했다.“고 기일 목사의 위대한 과거의 업적은 하나둘로 논할 바 아니매 적은 지면으로 다 발표할 수 없습니다”라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한다. 캐나다 출신의 개신교 선교사이며 한국의 초기 기독교역사에 초석을 이룬 인물이다. 그는 1888년에 한국에 도착해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깊이 배우고 이해하며, 어학 천재였던 그는 자신의 뒤를 이을 후배 선교사를 위해서 1921년 우리나라 최초의 한영사전을 만들고 한영사전을 제작, 특히 역사문화, 민속언어에 탁월한 한국학의 대가였다.
그는 저술가, 번역가, 역사가이며 민속학자였고, 또 성경 번역가이며 목회자였다. 반면 한국시 및 문학 작품을 영어로 번역해 조선을 외국에 최초로 소개하였으며, 그의 주된 사역은 전도와 신.구약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 40년이란 긴 시간을 조선땅에 바치고, 고국이 아닌 영국으로 가 그곳에서 잠든 사람이다. 게일은 한국인보다 먼저 한국어를 연구한 한국어 학자이자 고전 번역가였으며, 서구가 아닌 한국시선에서 한국학을 개척한 학자라고 일컬는다. (이상현 부산대 인문한국 연구교수). 후에 그를 조선에서 가장 훌륭한 외국인 한글학자로 인정받은 선교사, 한글학 박사, 신학박사 학위가 수여 된다. 그의 한국이름은 기일(Ki il)이라 불리었다.
출생과 선교사의 꿈
그는 백여 년 전 캐나다 교회들이 당시에 식민지인 조선에 보낸 한 선교사 200여명 중의 한사람으로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출신으로 캐나다로 이민온 농장 경영주이며 장로교회 장로였다. 그는 지역사회 설립에 열절정으로 봉사를 한 독실한 신자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칼빈주의 전통이 강한 네덜란드계의 여성이었다. 게일은 이런 가정에서 6남매중 5째로 캐다나 온타리오주 알마(Alma)에서 태어나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가 농부였기에 그는 어린시절 농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엘로라(Elora)에서 초, 중등 교육을 마친 후 토론토대학에 입학하여 문학을 전공하였다.
1886년 그가 대학 재학중 매사추세츠주 마운트 허몬(Mount Hermon)에서 열린 미국 YMCA가 주최하는 제1회 학생 하령회에 참석했다가 이 집회의 주도자이며 시카고 지도자 드와이트 라이먼 무디(D.L. Moody) 선교사의 설교에 감동되어서 그때 선교사의 소망을 갖게 된다. 게일에게 다니엘 무디와의 만남은 일생 동안 잊을 수 없는 사건이라 전해진다. 이때 그들의 구호는 “모두 다 가자, 모두에게로, All Should Go and go to all“였다. 1년전 1885년 5월에 대학 2학년이 될 때 그는 일찍이 영국을 거쳐 프랑스로 건너가 프랑스대학에서 잠깐 수학하면서 선교 회관에서 봉사의 일을 체험하게 된다. 그곳의 선교기관(McCall Mission)에서 순회선교와 교파를 초월한 선교방법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도 그곳에서 탁월한 세계적 선교사들과 만남은 그의 삶의 방향을 결심하게 만들어준다. 약 6개월을 보낸 후에 평생을 하느님의 종으로서 살 것을 결심하고 돌아온다.
1888년 6월에 토론토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한 후 그 당시 북미대륙에서 알려진 선교사를 위한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런 후에 그는 다행이 토론토대학 YMCA 선교부에 선교사로 지원을 받을 기회를 얻게 되고, 한번도 들어 보지 못한 아시아의 작은 땅, 조선으로 파견 선교사 후원 약속을 받는다. 그는 그때 자기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깊이 깨닿게 되면서 대학졸업 6개월후 1888년 10월18일 캐나다를 출발하여 2개월 후인 12월15일 혹한의 일기에 선교의 꿈으로 가득 찬 미지의 나라 조선이란 땅에 도착한다. 게일이 출항 전 밴쿠버에서 무디 선생의 설교 중 그의 앞에 인도되었는데 “그가 이렇게 나에게 질문했다”. “무얼 어디서 할거지?”. 나는 “학생 운동으로 한국에 가려고 합니다.”... “그래, 내 자네를 위해서 기도할 걸세”. Dwight L. Moody.
부산에 도착한 후 그는 제물포를 거처 육로로 서울로 가는 도중에 수많은 죽은 시체들이 전염성 질환으로(발진티푸스, 천연두) 길거리에 널브러져 있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가 태어난 캐나다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던 장면이었다고 묘사되고 있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12월23일 주일 오후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 7,1- 1916, 10,12, 미국 장로교 선교사)가 주관하는 주일 예배를 참석하게 되면서 갈 곳이 정해지지 않은 그에게 다행이 3개월을 그의 집에서 머물게 된다. 그때 게일에게는 선교지에서의 복음전파사역이 그의 일차적 관심이었기에 어학 공부와 더불어 선교에 대한 준비를 서서히 시작하게 된다. 잠깐의 준비후에 1889년 3월17일 그는 새롭고 신비로운 나라 조선을 알기 위해서 기나긴 순례의 길에 오르게 된다.
1889년 8월에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내려가 1년 동안 초량에 거주하면서 한국어 공부에 전념하게 된다. 그러나 그때 척박하고 가난했던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선교를 시작해야 할지 구체적인 그의 선교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의 부산체류 기간 동안 호주의 첫 선교사인 데이비스(J.H Davis)와 합류를 하지만 게일은 얼마 후 그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고, 그의 장례를 치르게 된다. 무엇보다도 게일은 내한 초기에 전국순회, 선교 여행을 하게 되는데 여행중에 황해도 소래에서 우연히 평생의 동반자를 만나는데 그의 이름은 이창직이란 사람이다.
게일은 그를 통해서 한글을 집중적으로 터득하게 되고 그 이후부터는 모든 일에 그가 평생 동안 게일의 동반자가 되어준다. 게일이 한국어 공부를 하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있는데 그때 한국의 저력을 발견하게 되고, 그들이 만들어 온 역사와 문화를 더욱 사랑하게 된다. 게일은 한국인의 생활방식과 그들의 풍토에서 즉시 깨달은 것은 선교 방법도 조선인에 맞는 선교를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가 한국문화와 언어, 풍토에 흠뻑 빠지게 됨으로써 이방인 게일은 한국인을 연구, 서구에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데 그가 그들을 찾아 다니는 게 아니라 그 시대에 조선인들이 만남의 장소인 사랑방을 이용하여 파란 눈의 선교사를 그들이 찾아 오게끔 하여 조선인의 삶과 문화를 서서히 눈으로 몸으로 체득하면서 배워간다.
게일은 평신도 선교사로 척박한 조선땅에 왔지만 조선인이 가진 생활 문화를 알지 못하면 그들에게 선교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일찍이 터득했기에 조선인이 되고, 거리감을 없애기 위해서 그들과 같이 한국 복장을 하고 갓을 쓰고 , 온돌방에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된장국과 김치 등의 조선음식을 먹으면서 함께 생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조선인의 문화를 익히고, 언어를 배우면서 한국 문화에 매료된다. 또 그는 조선을 동양의 그리스로 칭송했다고 한다. 게일은 고려의 문신 이규보를 좋아했고, 그의 무덤까지 찾아갔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한국 생활을 접고 떠날 때 '동국이상국집'을 가져 갔다 하니 조선에 대한 그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그는 그 시대 사람들이 쉽게 모이는 이야기방을 이용해서 그들에게 보다 낳은 삶을 베풀어 주고자 한국을 떠날 때까지 40년간 그의 모든 것을 바치고 떠난 조선인보다 조선을 더 사랑했던 게일, 그의 마음은 분명 하느님과의 그의 약속이 아닐까 하는 질문을 떨칠 수가 없다.
한국에서의 역동적인 선교 활동 시작
한국 도착 그 이듬해인 1889년 3월에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서 영어를 사용하지 않은 황해도 깊은 시골 해주를 거처서 조선에서 개신교 교회가 처음 새워진 소래 마을에서 생활하게 된다. 그때 조선인 최초의 개신교인 서상륜의 집에서 유숙하면서 조선어를 상당히 잘 할 수 있을 때까지 머무른다. 그러면서 한글 공부와 선교를 병행할 수 있었으며 그곳에 머무는 동안 조선의 풍습을 어느 정도 익힌 후에 다시 서울로 되돌아온다.
그런데 뜻밖의 소식을 접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을 파송한 토론토대학 YMCA에서 재정난으로 그의 선교비를 계속 지원할 수가 없다는 소식을 받게 된다. 그런 시점에 1891년 조선에서 만난 친구 의사 헤론과 마펫의 주선으로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소속으로 옮기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런 과정에 소래에서 만난 평생의 협조자가 된 이창직으로부터 더 많은 한글, 한문, 풍습을 공부할 기회를 접하게 되면서 조선에 대한 지식을 쌓아간다. 이런 과정에 그는 정식 신학공부를 끝마치지는 못했지만 첫 안식년인 1897년 5월13일 미국 인디애나주 뉴 알버니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돌아온다. (김영문 목사의 글- 시카고 나눔교회담임)
그후 그는 서울에 도착하여서 한국에서의 그의 존재는 부활신앙인 게일(James Scarth Gale) 선교사로 알려지게 되고, 한편 그를 “기이하고 놀라운 사람 게일”이라고도 기록하고 있다. 그가 서양에서 동양으로 와서 조선 사람이 되어 함께 울고 함께 웃고, 언어, 풍토, 문화, 생활기준을 모두 한국사람처럼 익혀가면서 한국에 머무는 40년 동안 그의 한국사랑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런 경지로 깊어만 간다. 그가 순례를 하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조선사람들의 문화와 생활 습관을 분명히 읽어낸 파란눈의 신학자라 칭해진다. 그가 시도한 제1단계의 선교는 가난하고 무지한 조선인들에게 접근하게 되고, 제 2단계는 지식층의 조선인들에게 도전하게 된다. 그는 그렇게 조선인들의 풍습과 문화를 잘 파악하고, 그에 맟추어 선교를 접근해 나갔다고 학자들은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그를 조선역사 선교사 중 가장 착한 목사라 불리어진다. 그는 19세기 어두운 조선땅에 복음의 불씨를 들고 와서 작은 밀알로 썩어갔고, 예수의 흔적을 남기고 간 사람이라 기록되어 있다.
그 결과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조선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문서와 문학, 시를 번역하고 영역하는데 촌음을 아끼지 않았으며 기적같은 초능력으로 많은 일을 한국과 한국인을 위해서 남긴 사람이다. 어떻게 한사람이 그의 반평생 동안 문화와 언어가 생소한 나라에 와서 자국인보다 더 많은 그 나라의 언어를 통달하고 문화와 풍습을 체험한 깊은 지식으로 수많은 책을 한영, 영역을 다 할 수 있었는지 그가 한국에 남긴 공헌은 참으로 지대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분에 대해 쓰기 위해서 수많은 자료를 찾아가면서 놀란 것은 게일이 언어와 문학에 천재였다는 것을 숨길 수가 없다. 그런 재능으로 빠른 시일에 성서를 한국말로 번역한데 이어서 한국 최초의 한영사전을 만들고, 내한 7년만에 영국의 죤 번연의 '천로역정', '로빈슨 크루소'를 한글로 번역해서 복음을 전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독립운동과 관련된 일로 투옥된 이상재, 이승만, 이원긍 등 민족지도자들을 감옥으로 찾아가 그들을 위로해 주고 또 천로역정을 전해주어 읽고 감명받아 탈옥후에 연동교회 교인이 된다.
또 찬송가를 우리말로 번역하고 (나자렛 예수,1927), (성경요리문답, 1929) 그리고 ‘갓(God )’을 ‘하나님’이란 표기로 한글성경에 정착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사람이 바로 게일이라 전해진다. 그 외 그는 첫 영한사전, '구운몽', '심청전', '홍길동전', '춘향전' 등 많은 한국 고전을 영역하여 발간하였으며 1895년에는 ‘동국통감’을 번역하여 서양에 소개한 인물이다. 또 조선시대 야담집 '천예록'을 영역하여 영국 런던에서 발간되었다고 한다. 특히 ‘구운몽’ 영역본은 그 시대 한국문화를 그대로 담아놓은 내용이라 많은 학자들 사이에 한국을 소개하는 교과서로 널리 쓰였다고 전해온다.
그리고 최초의 한영사전이라 할 수 있는 (한영자전, 1897-1911)을 편찬하였고, 조선 성교 서회(대한기독교 서회) 창립위원으로 한국에서의 기독교 문서 사역의 기초를 확립한 인물이다. 그 외 성경번역위원으로서 33년 동안 활동하였으며 그의 번역 단행본 저서가 조선에 머무는 40년 동안 43권에 달한다 하니 1년에 1권 이상의 책을 출판한 셈이다.
또 그는 한국인의 교육을 위해서 ‘교육협회’를 창립하여서 한국인의 99%(식민지기인 1910년대와 1920년대의 통계)가 넘는 문맹퇴치에 크다란 공헌을 남긴 사람이다. 이렇게 그는 다재 다능한 선교사로 찬송가개편, 기독교 교육, 기독 청년운동, 문서선교, 신학교육, 목회 등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한국문화와 교육에 핵심적 역할을 한사람이며 무엇보다도 그가 남긴 부활선교는 장로교 부활에 지대한 공로와 초석을 다진 사람이다.
1894년 종로 5가 당시 연못골이라 불리는 연지동 초가집에서 복음을 시작한 연못골 교회(연동교회)에서 초대 담임목사로서 27년 시무하면서 한국에 있는 지식인들과 활발한 접촉을 가짐으로서 더 많은 선교를 펼칠 수 있었으며, 그 당시 양반들이 모이는 교회에 계급의식을 깨고 천민 들 역시 발을 들여놓게 한 평등의 신분을 제공한 전통을 깬 사람이다. 이때 지식인 들과의 부딪침 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그에게 엄청난 힘든 시간을 주었지만 게일은 신분보다 신앙적 결단이 더 중요하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이일을 적극적으로 도운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고찬익이다.
그는 평남 안주 천민 출신으로 자신의 천한 신분을 비관하여서 젊음을 노름판에서 허랑방탕하게 지내고 있던 중, 중원산에서 게일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접하게 되었다. 게일은 그를 연못골 교회가 조직될 때 초대 장로로 장립하였는데 이것은 그 당시 파격적인 신분의 혁명이었고, 복음의 힘이 지닌 ‘새로남’이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그 이후 그는 1904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성직자의 길을 준비하게 된다. 그리고 한국장로교 최초의 목사 7인 안수하는 자리에서 고찬익이 예배를 인도하는 직도 받게 된다. 그는 게일의 곁에서 많은 일을 도왔으며 전도사 역할을 하면서 동반자 길을 걸었던 사람이다.
1908년 뜻밖의 두번의 큰 슬픔이 게일에게 닥쳐온다. 평양 신학교에서 재학중인 그의 오른팔인 고찬익이 갑자기 병사하여 잃게 되면서 깊은 슬픔에 빠져 있을 때 같은 해 봄 3월29일에 또 사랑하는 아내 헤리엇(Harriet)이 결혼 16년만에 48세의 나이로 그의 곁을 떠났으니 그의 상처는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런데 그 아픔이 아물기도 전에 그는 또 교회의 분열을 맞게 된다. 그 이유는 천민 출신 고찬익, 이명혁 장로에 이어서 광대 출신 임공진의 장로 장립을 서두르다가 양반교인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당시에 그 교회에는 지체 높은 양반출신 고관들이 있었는데 그 반면에 상인출신의 칠천역에 속하는 사람까지 섞여 있었으니. 그 이유는 교회의 최고지도자 장로선택에 양반이 아닌 상민을 뽑는다는 것이 그 시대에 수치스러운 일이라 생각하는 양반들의 사고 때문이다. 게일에게는 신분보다도 하나님 앞에 그들의 신앙적 결단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고, 이 시대 양반들과의 부딪침은 피할 수 없는 그의 결단과 선택이라 믿었다. 후에 이 연동교회는 소학교(전신 정신여자고등학교)를 세워서 민족의 많은 일꾼들을 배출하게 된다. 그렇게 한국선교의 불길을 지핀 게일은 한국복음화는 물론이고, 교육, 성경 번역,찬송가 개편에 초석을 다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의 모든 열정과 헌신은 우리민족에게 하느님이 보내주신 ‘기이한 놀라운 사람이다’라고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는데 역시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해준다.
세계에 한국문화를 알리는데 그의 연구에는 세가지점에 주목된다.
그는 캐나다에서 최초로 입국한 선교사이며 천재적인 기억의 언어학자이고, 저술가며 번역가, 역사가이자 민속학자라 전해진다. 더욱이 성경 번역가이며 목회자였다. 특히 한국의 역사문화, 문학, 민속언어에 해박했으며 한국학의 대가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내한 이래로 조선 민중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서 그들과 더불어 모든 것을 나누면 철저히 조선인을 사랑한 사람이다. 조성갑(골목길 인문학 연구소장)
첫째로 게일은 선교사로 우리나라에서 사역을 하면서 서구지식인의 입장에서 한국역사의 독자성을 탐색하기 시작 했기 때문이다.
둘째로 한국의 종교적 관념추구, 한국에서도 서양관점의 종교가 존재한다고 인정한다.
셋째로 그는 1924년 한국민속사를 저술하면서 단군에서 부터 우리나라의 역사저술에서 한국역사의 독자성을 인정하였고 , 한국 문학 독자성을 연구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한국화 기독교를 지향하면서 서양 기독교가 조선에서 조선인에 의해서 한국적 기독교가 새롭게 탄생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선교 철학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한국의 가치를 발견하고 한글이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 가운데 선교를 위해서 준비된 아주 훌륭한 언어라고 감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이은선 교수- 안양대 명예교수, 역사신학학의 전문). 또 그는 한국문화에 대해 누구보다도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번역서와 논문을 남겼는데 대표적인 영문저서로 코리안 스켓치(Korean Sketch, 1909), 선구자(The Vanguard, 1904 ), 전환기의 조선(Korea in Transition, 1913) 등이 있고 대작으로 평가받는 (History of the Korean People,1926) 등 영문 저서 9권, 한국 저서 30권을 출간했으며 이외에도 수많은 글을 국내외 언론과 잡지에 실어 한국을 세계에 알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1892년 영국 성서공회 , 한국지부소속으로 성서번역참여, 마태복음, 에베소서 등 신약성서 중 일부를 번역함으로써 그가 한국교회에 끼친 가장 큰 공헌 중 하나는 성경번역에 헌신점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선교적 토대를 구축하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기 때문이다. 내한초기에 (사도행전)을 번역한 이래 3년에 걸쳐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서), (요한복음)을 번역하였고, 1925년에는 (신역 신구약 전서)라는 이름의 사역본 성경을 출판한다.
또 (그리스도 신문), 주간(1897), (기독신보)에 주필 역할을 하면서 편집인으로(1900-1911) 그리고 영문잡지(The Korea Magazine, 1917-1919)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간행물들의 편집인으로서 활약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출처 / 한국 향토 문화 전자 대전)
그리고 그는 구한말 역사의 현장에서도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대원군 이하응을 만났고, 대원군의 장손이자 고종의 조카인 이준용과도 친교를 나누었다고 한다. 고종의 아들 의화군(의친왕)과도 친분을 가졌으며 이범진, 박영호, 이상재 등 그 시대 국정에 관여한 지식인들과 교류하였다는 것을 기록에서 볼 수 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미국유학을 위해서 추천장을 써주는 일도 하였으며 1900년에는 고종의 고문으로 임명되어서 명성왕후가 시해되던 날 고종을 알현해서 그일들을 그가 기록으로 남겼다고 전해진다.
가족관계
1891년 2월에 미국북장로교회선교사 개척 동료 사무엘 마펫(S.A. Moffett )과 함께 만주에 다녀온 후 게일은 전국을 순회하면서 한국을 공부하는데 전념하게 되는데 그의 의사 친구 존 헤론(John Heron)이 결핵 환자 치료 중 병사하게 되면서 1892년 4월7일 헤론의 미망인 헤리엇(Harriet)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다. 그 이유는 게일이 헤론 집에서 한동안 기거 하는 동안 쌓인 정과 같은 선교의 삶을 해온 헤리엇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꼈고, 무엇보다도 선교사역에 대한 같은 비젼 때문이었다고 알려진다. 그녀에게는 어린 두 딸 사라 엔(Sara Anne, 6세), 제시 엘리자베스(Jessie Elizabeth, 4세)가 있었기에 친구의 딸에게 아빠가 되고 싶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게일이 의사 친구인 헤론의 집에 몇 년 머무는 동안 서로 가까워질 수 있었고 , 또 서로가 하나님 안에서 함께 동반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친구의 병사 후에 그녀와의 결혼을 결심하였다고 엘렌우드에게 보낸 편지(1891년 9월12일)에서 밝혔다. 그런데 그가 1908년 해리엇마저 결핵으로 잃고 2년 후인 1910년에 4월 7일 영국실업인의 딸 아다 루이스 세일(Miss Ada Louise Sale)과 일본 요코하마에서 재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1919년 3년째 안식년을 가진 후 한국의 역사, 풍토, 문화,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 엄청난 양의 저술과 역서를 출판한다.
순례 중의 일화
그가 조선을 알기 위해서, 언어를 배우기 위해서, 전국순례를 하던 중에 황해도 해주에서 일어난 작은 일화가 있다. 하루는 해주목사가 그를 집으로 접대를 했는데 그에게는 게일이 평생 처음 만나는 서양인 손님이었다. 그 당시 서양인과 조선인의 인식차이가 너무나 커서 해주목사는 게일을 어떻게 대접을 해야 할지 몹시 어려워 했다. 그러는 중에 식사 시간이 되어서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가 자신처럼 맛있게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서양인도 조선인처럼 같은 인간임을 비로소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경상도 대구를 방문했을 때도 또 다른 일화가 있는데 당시 조선인들은 그를 사람인지 귀신인지 모르겠다고 할 정도로 낯설어 했지만, 다음날이 새해 첫날이어서 부모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고 말하자 부모가 있고 공경할 줄 안다니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라는 공감대가 생겨서 분위기가 누그러 졌다고 전해진다. (나무위키)
그가 대구지역을 여행하던 중 또 다른 우스운 에피소드가 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서 많은 질문을 받는다. “성이 뭐니, 어디서 왔느냐, 부모님은 살아 계시느냐” 등의 질문부터 머리에는 눈알이 하나만 달려있는 사람들이 어디 사는지? 등. 또 그가 사람들에게 붙잡혔는데 풀려난 이야기도 재미있다 .
100여 년 전 북미에서 온 선교사들에게는 조선인은 미개인이나 식인종처럼 묘사됐다. 그때 한국문화의 진수를 간파해서 이를 서양에 소개하고 초창기 기독교를 한국에 심어주기 위해 애썼던 선교사가 바로 캐나다에서 온 제임스 스카스 게일 목사다.
게일이 느낀 신기한 것은 조선에서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조선 양반에게 최고의 가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 당시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내한 후 12년만에 천명이란 기독교인이 생겼는데 같은 기간 일본과 중국에서 기독교인을 10명을 만들었다고 전해지니 그 나라에서의 선교가 얼마나 어려운지 말해주고 있다.
그는 한국을 이렇게 묘사하고있다. “제가 캐나다에서 조선에 온 지도 올해로 40년이 되었습니다. 그간 내가 보았던 조선, 생각해보면 그것은 실로 한편의 활동사진입니다. 이 40년간 나는 보면 볼수록 조선 그 자체가 심오하게 여겨져 흥미를 더하게 만들어 갔으며. 조선의 전도는 도대체 어떻게 되어가는지….” (시사 한겨레 한마당)
1928년 ‘조선 사상 통신’에 실린 게일 목사의 글 ‘구미인이 본 조선의 장래의 전도를 나는 낙관한다’고 나오는 내용이다.게일 목사는 암흑 같았던 조선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았다고 기록되고 있다..
우남 이승만과의 만남
우남 이승만의 초명은 이승용이며 호가 우남이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며 현대사의 핵심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능내동에서 아버지 이경선,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에서 3남 2녀중 막내로 출생 하였으나 두형이 천연두로 이승만이 출생 이전에 사망함으로써 그는 6대 독자로 자란다. 그는 어머니와 누이동생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유아 독존적인 성격이 형성된다. 1877년 2살때 서울로 이사하여 승례문 밖 염동, 낙동을 거쳐 남산 서쪽에 있는 도동 우수현에서 성장하게 된다. 그는 5살때 천자문을 뗄 정도로 명석했고 서당에서 한학도 배우게 된다.
1895년 4월2일 신승우의 권유로 Henry Appenzeller가 설립한 배재학당에 입학해서 소년기에 동양의 전통 학문인 유학을 공부하게 되는데 그것은 어머니로부터 시작된다. 또 불교도 어머니의 영향을 받게 되지만 배재학당에서는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을 통해서 신학문을 접하고 기독교라는 서양종교를 알게 되는 계기가 바로 게일 선교사와 만남에서 이루어진다. 우남은 1899년 박영호와 함께 고종황제 폐위사건에 연류되어서 1904년 5년 7개월 한성 감옥에서 고통스런 생활을 하고 있을 때 탈옥을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종신형을 받게 된다. 이때 게일이 찾아간 곳이 한성감옥이였고, 그의 방문을 받게 된 감옥수들은 기독교 신앙인으로 회심하게 된다. 우남도 1904년 여름에 한성감옥에서 ‘독립정신’이란 책을 저술하고 (청일전기)를 편역하고 (신한영사전)을 편찬한다.
그는 같은 해 8월9일에 일본공사 하야시의 도움으로 특별사면령을 받고 출옥 후 게일을 찾아가 연동교회 교인이 된다. 1902년 투옥된 김정식은 감옥에 있는 동안 게일 목사의 끈질긴 전도에 의해서 (무디의 설교집)을 읽고 개종하게 되고 후에 일본에 있는 한국청년 기독교회(YMCA) 총무가 되어서 평생을 봉사하게 된다. 그 외 앞에서 서술한 감옥수들(이상재, 김정식, 유성준, 이원긍)이 출옥 후 연동교회 담임목사인 게일을 찾아가게 된 공통점은 옥중에서 신자가 된 사대부들이 선비 못지 않게 박식하고 개방적인 게일목사의 전교에 개종이 되었기에 그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한다. 이들보다 늦게 출옥한 우남 이승만도 석방 후 게일을 찾아가 세례를 받기를 원했지만 그는 감리교에 우선권이 있다고 세례를 주는 것만은 거절하였다고 기록되고 있다.
우남이 출옥 후 게일의 소개서를 받은 햄림목사는 우남을 조지 워싱턴 대학 총장이며 한국공사관 법률고문인 찰스 니드햄 박사에게 소개를 하게 된다. 이렇게 게일과의 인연으로 우남은 조지 위싱턴 대학에 장학생으로 2학년에 편입할 수있었고 세례는 같은 해 1905년 4월23일 부활절을 통해서 워싱턴디씨(DC)에 있는 커버넌트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the Covenant )에서 햄림 자신이 손수 베풀어주었다고 한다. 누구보다도 게일은 그때 우남 이승만에 대해서 커다란 관심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이 개화된 지도자들은 상류지식인들로 기독교 신자가 된 한국역사상 최초의 주요 인물들이다. 그런데 게일이 그들에게 매력을 느끼고 확신을 갖게 된 점은 그들의 교육사상과 종교 사상이었다. 우남 이승만은 개종 후 마음에 해방이 생겼다고 표현을 하였는데 이것은 게일이 쏟은 선교의 조력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우남은 하버드대학 재학시부터 졸업 후 자신의 진로문제에 대해서 서울에 있는 게일과 간간히 편지로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게일이 교장으로있던 정신여 소학교와 경신남 소학교 졸업식이 있을 때 이상재와 같이 기도순서를 , 우남은 성경 봉독을 담당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이것이 우남이 귀국후에도 계속해서 게일과 교제를 계속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게일은 우남 이승만의 삶의 조언자였으며 또 스승이었으며 멘토였다.(불록blog, 강대흥 목사 성경 사랑, 수원 권선교회 )
그는 왜 영국땅에 잠들었나?
게일은 우리민족 문화적 우수성과 고유함을 일찍이 간파하고 온몸으로 받아들였던 그의 개방성과 탁월함이 있었기에 조선땅에 와서 반평생을 보낼 수 있었다고 본다. 자기가 싫어하는 일을 하면서 어떻게 내 인생의 모두를 투자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캐나다에서 태어난 한국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그에 대해 알지 못하더라도 한국 성도라면 누구나 그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남긴 영역책의 천로역정(Pilgrim Progress)은 성경다음의 애독서다. 우리가 하나님을 천주나 상제가 아닌 ‘하나님’으로 부를 수 있게 된 것도 그의 주장과 노력 덕분이다.
그의 삶은 캐나다에서 어린시절과 배움의 젊은 시절 26년을 보내고, 40년 동안 의식주가 척박한 조선땅에 선교사로 와서 조선인으로 살다가 고향인 캐나다의 밴쿠버로 돌아가서 가족들과 친구들과의 만남을 갖지만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때 캐나다 교회는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40년만에 돌아온 그에게는 교단이 연합하고 잔류하는 교회들의 모습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당시 그는 아시아 전문가로 인정 받아 의회 도서관에서 연구자로 초빙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아내의 고향인 유서 깊은 영국의 도시 ‘바스Bath’에 정착하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인구 10만명이 채 안되는 작은 도시에서 와서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또 후에 당회원으로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면서 여생을 보낸다. 그리고 아내가 곁에서 지켜보는 가운데서 죽음을 맡게 된다. 그는 그의 인생의 마지막 10년도 쉼 없이 그곳에서 말씀을 전하는 봉사 사역을 맡으면서 찰스 디킨스 협회를 비롯한 문화계에서 명성과 열정적인 지도력을 발휘하면서 74세의 나이로 마지막 그의 삶의 모습을 보인다. 그는 신분 인종에 관계없이 어디에 머물든지 그 땅의 공기로 숨쉬고, 음식도 잠자리도 말과 글도 소중히 여기며 온전히 하나님의 섭리안에 받아들였던 인물이다. 그의 신앙적 소신만은 대쪽 같았고, 그래서 때론 오해를 불러오기도 했지만 마지막 10년의 영국생활의 모습도 다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게일이 쏟은 사랑과 정열이 조선땅에 와서 기독교의 확산 뿐만 아니라 언어, 문화교류의 토대를 이루는데 그토록 큰 변화를 남기고 신앙의 초석을 다진 그의 업적에 영원토록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하고 싶다.
필진의 말

백경자 애국지사기념사업회 부회장
제임스 스카스 게일 선교사의 일생을 공부하면서 받은 감동은 어떤 글로도 표현이 힘들다.
갓 대학 졸업한 푸른눈의 이방인이 조선땅을 선택해서 그곳에서 40년이란 긴 세월 동안 매순간 쉼없이 그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까? 하는 감격에 많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무엇보다도 조선인들의 생리를 일찍 간파해서 그들이 꼭 필요한 교육, 생각과 문화에 맞춤 선교를 하기 위해서 사랑방을 이용해서 함께 웃고 울고 한 그의 재능과 업적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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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라 인턴기자 (press1@koreatimes.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