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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항거한 팔룡산의 호랑이 던칸 M. 맥레
일본 탄압에 맞서고 신사참배 강력 반대
- 유희라 인턴기자 (press1@koreatimes.net)
- Jul 28 2025 04:10 PM
'애국지사들의 이야기 9' 시리즈(3)

던칸 M. 맥레(Duncan Murdoch MacRae), 에디스 멕레(Edith Frances MacRae)
맥켄지 선교사의 죽음은 맥레를 부르고
던칸 맥레 선교사는 한국명 마구례(馬求禮·馬具禮)로 캐나다장로회, 캐나다연합교회 선교사이자 목사로 부인 에디스 맥레와 함께 한평생을 한국인들을 위해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맥레는 1868년 11월15일 캐나다 노바스코샤주 케이프 브레튼(Cape Breton)에서 교사와 등대지기였던 레임 도널드 맥레(Lame Donald MacRae)와 메리 프레이저(Mary Fraser)의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16세 되던 해인 1884년 베덱(Baddeck)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대장장이 견습공으로 있다가 한 복음전도자의 전도를 받고 복음 사역자가 되기로 결심했고, 대장간을 저녁에는 경건한 예배 드리는 장소로 변모시켰다. 그후 베덱아카데미에 입학하여 후에 결혼하게 될 에디스 서덜랜드(Edith Frances Sutherland, 1875-1956.7.27)를 만났다. 그러나 학교를 다마치지 못하고 픽투(Pictou)에 있던 픽투아카데미로 전학하여 졸업했다.
그는 1893년 잠시 상점 점원으로 일하다가 핼리팩스에 있던 댈하우지대학교에 입학하였고1896년 댈하우지를 졸업하면서 파인힐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신학교에 들어간 1896년 12월호 신학교 교지(The Theologue)에 알렉산더 럽(Alexander Francis Robb)이 기고한 '머나먼 한국으로부터(From Far-Off Korea)'라는 글에서 소래교회 교인을 대표하여 서경조가 쓴 선교사 요청편지를 통해 1895년 6월, 파인힐 장로회신학교 출신 독립선교사 윌리엄 맥켄지(William John McKenzie)가 한국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일사병과 영양실조로 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베덱에 있는 한 섬의 등대에서 철야기도를 하며 자신이 한국으로 가 그의 뒤를 이을 선교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베덱의 등대에서 맥레는 철야하며 한국으로 나아갈 결심을 했다. (함진원 목사 사진)
1897년 선교사 지원서를 제출했으나 임명되지 못했다. 캐나다장로회(PCC) 해외선교부는 이미 중국과 인도에 선교사를 파송함으로 재정적 여유가 없었고, 맥켄지의 소천으로 인한 선교사 파송 압력으로 간신히 두 사람만 파송할 수 있는 재정을 가지고 있었고, 이미 그리어슨 목사 겸 의사와 푸트 목사를 임명해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맥레는 “나는 반드시 한국에 갈 것입니다. 만일 당신들이 나를 보내지 않는다면 나는 태평양을 헤엄쳐서라도 한국으로 갈 것입니다. 나는 급여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나의 지원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동료들과 친구 학생들의 마음을 열 것을 기대하여 하나님만 바라볼 것입니다”라는 편지와 함께 지원 약속 편지를 동봉하여 지원서를 냈다. 맥레 파송에 필요한 경비는 졸업식 전에 매리타임(Maritime) 지역 교회들과 친구들이 모아주었는데, 결과적으로 그리어슨과 푸트의 파송에 드는 경비의 두배에 이르는 금액을 모금하였다.
결국 그의 열정에 두손두발 다든 PCC 메리타임 노회는 그리어슨, 푸트, 맥레 세사람을 파송하기에 이르렀고, 그들은 목사후보생으로 신학과 목회 훈련을 받고 1898년 졸업하였다.
함경도 땅에 복음의 전진기지가 세워지다

망덕 언덕에 세워진 함흥선교부(비전펠로우십 사진)

신창리교회, 부인 에디스가 세운 영생여학교(비전펠로우십 사진)

맥레의 가족들, 맥레와 에디스의 함경도 순회선교(비전펠로우십 사진)

맥레와 성경공부 지도자들, 맥레가 함경도 최초의 기독교식 결혼을 주례하고 있다. (비전펠로우십 사진)
그 후 그리어슨과 푸트는 결혼하여 부인들과 함께 출발하게 되어 캐나다장로회 한국 파견 선교사는 5명으로 늘어나게 되었고, 이 다섯 명은 1898년 8월1일 밴쿠버를 출발했다. 일본을 거쳐 1898년 9월5일 부산항에, 9월7일 제물포항에 도착하여 1박을 하고 9월8일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어학공부를 하면서 9월22일 캐나다장로회 한국선교부를 조직하였는데, 회장은 푸트, 서기는 그리어슨, 회계는 맥레가 맡았다.
1차 파송된 다섯 사람은 언더우드 목사 부부와 서경조의 안내에 따라 10월7-19일 맥켄지 선교사가 사역하였던 소래마을을 방문하고, 20일 서울로 귀환하여 장로회선교회연합공의회(The Council of Presbyterian Missions in Korea)에 참여하였다. 이 공의회는 캐나다장로회 한국선교부를 만장일치로 회원으로 추가하고, 10월27일 회의에서 “분명한 선교지역을 지정해 달라”는 요구에 따라 스왈른(Swallen)과 게일(Gale)의 추천으로 “원산항을 중심으로 하여 한반도 북동쪽인 함경도 지역”을 맡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이미 1890~1894년에 걸친 존 네비우스(John Nevius) 선교사의 조선반도 선교지분할정책(교계예양)에 따라 1898년 캐나다선교회가 함경남도, 북도를 할양 받아 선교지역을 개척하도록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맥레는 원산에서 어학공부와 그리어슨의 진료소를 돕는 일을 하면서 함흥·성진·북청 지역의 선교여행을 하였다.
1900년 8월13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에디스 서덜랜드와 결혼하고 부인과 함께 선교지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의화단 사건 때문에 선교지가 한국으로 변경되어 가고 있던 맥컬리(Miss Louise H. McCully)와 일본 고베에서 만나 같은 배로 9월16일 원산선교부로 복귀하였다. 그는 그리어슨과 함께 1900년부터 함흥·성진 지역을 순회하고 선교부의 설치를 검토하였다.
1901년 5월 그리어슨이 가족을 데리고 성진(현 김책시)으로 이주하여 그곳에 선교부를 개척하자 맥레도 함흥선교부 설치를 요구하여 1904년 초에 선교부가 설치되었다. 당시 1902년 영국과 일본이 영일동맹을 맺고 1894년 청일전쟁을 통해 승세를 굳힌 일본은 러시아의 남하 저지를 목적으로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만주 일대와 함경남북도 일대에 전쟁이 벌어져 러시아가 남하하여 함흥을 점령하는 바람에 모두 피신하였지만 끝까지 남았던 맥레는 체포되어 가택연금 상태에 있다가 몰래 밤에 탈출하여 원산선교부로 돌아갔다. 원산까지 밀어닥친 러시아와의 전투를 그리어슨과 함께 일본군 참호에 들어가 종군기자처럼 취재를 하기도 했다. 전투가 끝난 후 영국 영사대리 웨이크필드(Mr. Wakefield)의 요청으로 수백명의 러시아군 전사자들 시신을 수습하고 기독교식으로 장례집전을 해 영령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러시아군이 패퇴하여 함흥까지 물러가자 교인들의 안위가 궁금하여 총탄과 체포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돌아가 그들을 위로하므로 함흥지역 주민들로부터 존경을 얻었다.
함흥에서 사역, 그리고 일본과의 싸움
1905년 함흥에 정착하면서 장차 교회·병원·학교를 짓기 위하여 선교부지로 함흥 성내 신창리에 있는 망덕(望德) 기지를 매입하였다. 그 땅은 원래 무당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동네 공동 소유지였다. 이주한이라는 교인이 그 마을의 원로인 박정익과 교섭하여 600냥에 계약을 체결하고 구입하였다. 맥레는 이곳에 자신이 살 집을 짓고, 교회와 학교(영생남학교, 여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지었다. 망덕 기지를 팔룡산이라 불렀고 맥레의 용감성에 함흥 사람들은 그를 '팔룡산의 호랑이'라고 불렀다.
1906년 초에 재정고문관으로 부임한 일본인 가미야가 망덕 기지를 탐내고 일본군을 동원하여 그 기지에 경계 말뚝 6개를 박았고, '팔룡산 호랑이'로 불리우는 맥레는 분개하여 이를 뽑는 과정에서 6명의 일본군을 때려 눕히는 싸움도 불사하였다. 그후 가미야는 이곳에 화장실을 지었다. 이에 분개한 맥레는 또다시 일본군을 두드려 패는 바람에 영일간에 외교문제로까지 발전했다. 맥레의 소상한 편지를 통해 영국 부영사 헨리 콕번에게 밝힘으로 화해로 마무리가 되었다. 그는 이전부터 일본의 침략 야욕과 한반도를 침탈하려는 계획을 예지하였고, 그들의 비문명적이고 폭력적인 민족성을 꿰뚫어 보았다.
1907년 11월 8-26일 통감부에서 파견한 마야마(間山)와 영국영사관의 영사대리 홀름즈의 합동조사 후 함흥의 철거되는 관립학교 부지와 망덕 기지를 교환하자는 타협이 이루어져 해결되었다. 이후 망덕 기지에 살던 일본인으로부터 그 기지를 다시 선교부가 사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와 멕레는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여 다시 매입하여 그곳에 1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ㄱ’자 예배당인 신창리교회를 건축하였다. 1907년 루터 영(L. L. Young, 후일 재일동포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사역함) 선교사가 함흥선교부에 합류하여 선교활동에 활기를 더했다.
1907년 6월 함흥 연포에서 주민들이 염전세를 거부하자 일본군이 출동하여 살상하고 체포하여 재판에 넘긴 사건이 일어났다. 이런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자 주민들은 맥레 선교사의 서재에 몰려가 밤 늦게까지 그와 함께 대책을 의논하였다. 이 무렵 맥레의 심경은 고향에 보낸 1907년 7월11일자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총들이 발사를 멈추고 피로 엉킨 칼들이 칼집에 넣어졌을 때,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은 도시로 걸어갔고, 상처가 난 사람들은 그들의 피 속에서 뒹굴도록 남겨졌다.... 우리가 그런 잔인한 대학살에서 편들어 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과 함께 괴로워해야 한다. 그것을 말하라. 하늘이 억압받은 자의 부르짖음이 되울릴 때까지 그것을 폭로하라... 마치 나의 펜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 같다. 나의 마음은 무겁고, 우리가 무엇인가 하기에 너무 무력하다.” 마침 이 사건이 일어났을 무렵 캐나다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맥케이(Dr. G. L. McKay)가 한국을 방문하여 원산지역을 돌아보고 있어서, 맥레는 원산으로 그를 찾아가 그 사건을 보고하고 함께 함흥지역을 돌아보기 위해서 함흥에 왔다. 이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맥케이는 당시 영국인 베델이 경영하던 '대한매일신보' 영자신문인 The Korea Daily News 1907년 7월10일자에 사건의 전말을 폭로하여 '함흥에서의 공포의 대량 학살(Terrible Massacre at Hamheung)'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하였다.
맥케이는 맥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함흥에서 선교회의 수장은 맥레 목사인데, 그는 일본인들의 불의에 대항하여 조선인들을 보호하려고 일본 군대와 몇몇 감정적인 충돌을 나타낸 인물이다. 맥레 박사는 전투적 그리스도교의 거대한 경험을 소유한 것으로 보이며, 그는 상황이 (싸움을) 필요로 한다고 간주할 때 싸우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일제 헌병 경찰들이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의 집회를 조사하고 있던 1909년 1월31일부터 2월1일까지 맥레가 시무하던 함흥읍교회에서 집회가 열렸다. 이때 강사는 1907년 그 교회 초대 장로로 장립되어 맥레의 조사를 맡고 있던 김창보와 맥레의 한국어 어학선생인 조희림이 맡았다. 명분은 교회의 연설회였지만 예언자적 목소리로 민족적 위기를 경고하고 민족의식의 각성을 촉구한 애국계몽운동이었다. 이에 일제 경무국장 마쓰이가 2월26일자로 이를 통감부 소네 부통감에게 보고하였다.
한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
1910년 기어이 한일합방이 일어났다. 맥레는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총독으로 부임한 것을 알았다. 맥레는 일본의 거미줄로부터 조선이 벗어나도록 외국의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그는 또 재일본 영국 대사 클로드 맥도널드 경에게 편지했고, 이를 토대로 대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만났지만 부정적인 답변만 들었다. 이후 함흥을 중심으로 한국인들, 특히 기독교인들이 일본인들에 의해 테러와 폭력에 시달리는 일이 많았고, 이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또한 함경북도 변방에 러시아 군인들, 중국 마적단, 일본 군대의 틈새에 끼어 약탈 당하고 폭력에 억압당한 한국인들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구출하고 변호하고 돌보는 일에 앞장섰다.
1919년 3월3일 함흥만세시위가 일어나 6일까지 이어지자 맥레는 일본 무장경찰이 기관총으로 쏘며 제지함에도 불구하고 시위현장을 찾아가 일제의 폭력을 감시하고 체포된 사람들을 풀어주도록 일경을 압박하였다. 함흥 만세시위에서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목격한 그는 이를 영국영사관에 알리고 조선총독부에 항의하기 위해서 서울에 와서 1919년 3월20일자로 상세한 진술서를 실명으로 발표하였다.
1930년대에 일어난 조선총독부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서는 절대로 타협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여, 타협해서라도 학교의 존속을 추구하자던 젊은 선교사들과 자주 대립하였다.
1935년 일제는 학교의 학생들에게 비행기를 모금하라는 명령이 발표되었고, 학교의 교사들에게 신사를 세우기 위한 돈을 기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관리들은 모든 사람들을 신도주의로 개종하도록 하고 신사들을 개설하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외국 선교부들은 이로 인해 두갈래로 갈라지게 되었다. 신사는 조상을 추모하는 일종의 동양적 효사상일뿐 종교행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우상숭배에 다름 아니라는 쪽으로 갈라져 의론이 분분하였다. 이를 수용하고 교회와 학교를 지키자는 쪽과 단호히 배척해야 한다는 쪽이 갈라서게 되었다. 그러나 맥레는 단호히 이를 배척하자는 쪽이어서 많은 충돌을 야기하였다.
한국사랑은 대를 이어
그는 1937년 1월 은퇴하고 같은 해 봄에 귀국하여 한국의 신사참배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려 노력하였다. 그는 귀국 후 1937년 6월5일자 암스트롱(A. E.Armstrong) PCC 해외선교위원회 총무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신사참배 문제는 심각하고 긴급합니다. 해외선교위원회는 이것에 대해 그들이 무엇을 하려고 하든 곧 결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또한 여선교회위원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면 내가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썼다. 1938년 강연에서 “선교사들이 실제로 이교의 사당에서 예배하고 있으며 일본인 관리들과 타협하고 있다”는 요지의 주장을 하였다.
그는 노바스코샤주 베덱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49년 12월 81세로 별세하여 베덱의 세인트 앤드루 공원묘원에 안장되었다.

베덱에 묻힌 맥레와 에디스 부부(함진원 목사 사진)
1956년 별세한 부인도 남편 옆에 묻혔다. 첫째 딸 엘리자베스 펄은 캐나다에서 베이컨(Roland Clinton Bacon) 목사와 결혼한 후 남편과 함께 1931년 캐나다연합교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회령선교부에서 활동하였다.
둘째 딸인 헬렌 맥레(Helen Fraser MacRae, 한국명 마혜란)는1910년 한국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릴 때 한국과 일본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이후 캐나다 노바스코샤 핼리팩스의 댈하우지대학(Dalhousie University, Halifax, Nova Scotia, Canada)에서 문학(1933)과 교육학(1934)으로 학사학위를 받았다. 헬렌은 노바스코샤에서 30년 넘게 교편을 잡았으며, 자신의 부모와 동교 선교사들의 사역을 중심으로 캐나다-한국의 관계를 연구조사하기 위하여 교직을 은퇴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팔룡산 호랑이(A Tiger on Dragon Mountain)'는 캐나다와 여러 나라에서 광범위하게 조사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그녀는 1967년 캐나다 100주년 메달(Canada Centennial Medal)을 받았으며, 1987년에는 대한민국 명예훈장(Republic of Korea National Decoration of Honour)을 수여받았다.
* 이 글은 헬렌 맥레의 부모님에 대한 전기 '팔룡산 호랑이'와 '내한선교사사전(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22)에서 발췌하여 요약한 글임을 밝혀둔다.
필진의 말

황환영(비전펠로우십 대표)
조선인(한국인)을 누구보다 사랑한 캐나다 선교사들 가운데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한 선교사들이 많지만 그 중 잘 알려지지 않은 던칸 M. 맥레 선교사의 독립운동을 위한 사역을 이번에 발굴해 발표하게 됨을 기쁘게 생각한다.
The article is funded by the Government of Canada through the Local Journalism Initiative pro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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