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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게임 (중)
소설가 김외숙
- 유희라 인턴기자 (press1@koreatimes.net)
- Jul 31 2025 09:06 AM
친구 내외가 캐나다로 떠난 후 아내는 자주 짜증을 냈었다. 캐나다가 마치 안락한 삶을 보장하기라도 하는 듯, 그 행렬에서 도태되기라도 한 듯, 남아있던 우리는 툭하면 그 일로 다투었다. 그때 과감히 떠나지 못하고 주저앉아야 했던 나는 주저앉은 그 자리에서 아내가 앓고 있던 이민 병을 치료해야 했으니 그것은 곧 회사에서의 내 능력을 인정받는 일이었고 내 젊음을 송두리째 쏟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떠나지 않고 청춘을 바쳐 일한 그 회사로부터 명예퇴직을 통고받은 줄 알았을 때 아내는 눈에 불을 켰었다.
‘나쁜 놈들. 죽도록 일했는데 기껏 이거야?’
짝사랑한 여인으로부터 발길질당한 느낌이 그런 것일까? 아내는 몇 날째 흥분하더니 화를 못 이겨 자리에 누워버렸다. 나 대신 누워버린 셈이었다.
‘그때 떠났더라면 이런 꼴은 안 당하잖아!’
며칠 앓던 아내는 다시 오래전 일을 들먹이며 내 탓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친구와 함께 떠나지 못한 표면적인 이유는 그냥 대기업에 근무하면서 이곳에서 내 포부를 펼쳐나가겠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부모와 형제 때문이었다.
가난한 농부의 맏이로 혼자 대학 공부를 마치고 대기업에 다닌 나는 가족의 희망이었다. 평생 고생밖에 모르신 부모님과 맏이의 학비 조달을 위해 직접 간접으로 희생한 동생들, 그들에게 나는 꿈이요, 깜깜한 밤바다의 등대 같은 존재였으므로 친구처럼 가볍게 떠날 수가 없었다. 혼자 혜택받은 장남의 아내란 이유로 공유해야 했던 책임의 무게에 짓눌린 아내는 그래서 짜증을 냈다.
아내의 짜증은 어쩌면 갈 수 없는 캐나다란 미지의 땅에 대한 동경 때문이 아니라 거미줄처럼 엮이고 연결된, 그래서 언제 오붓이 우리 식구끼리 식사 한번 해 본 적이 없는 생활, 시집 식구로부터의 탈출에 대한 욕구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구태여 아내의 짜증이 아니어도 나도 속으로는 거리낌 없이 사표 던지고 비행기에 오르던 그 친구가 얼마나 부럽던지, 어깨에 지워진 짐의 무게를 원망한 것도 그때였다. 그런데 식솔 끌고 먼저 비행기에 오른 이 친구는 일에 얽매여 집 근처의 그 유명한 폭포에도 가보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뭔가가 헷갈려 잠시 눈을 감았다.
“작년에 이 사람 친척이 왔었는데 북쪽으로 단풍 관광을 하겠다는 거야. 자네 보다시피 우리가 명색이 가게라고 열어놓고 보니 자리를 비울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여행사에다 예약하려는데 그렇게는 못 하겠다는 거야. 줄 서서 가이드 따라다니는 관광은 체면상 못한다는 거야. 그래서 별수 있어야지.”
친구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더니 들고 있던 술을 한꺼번에 털어 부었다. 그의 아내가 불안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으로 이틀간 문 닫았어요.”
마치 자신이 한 일인 듯 친구의 아내가 술기운으로 발그레해진 뺨을 더 붉혔다. 친구의 아내가 뺨을 붉힐 때 나는 나대로 조바심하고 있었다. 이유를 밝히지도 않은 채 며칠째 머무는 나를 친구가 행여 그 친척처럼 보는 건 아닐까 하고. 그러나 친구는 말이 없었다.
“대한민국이 언제부터 그렇게 잘 산 거야?”
몇 잔 마신 술 탓인지 친구의 말투에 가시가 돋기 시작했다. 친구의 말처럼 잘 산다고 흥청망청 돈을 쓰며 허세를 부린 사람이 마치 나 자신이기라도 한 듯 내가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사정을 알지 못하는 친구는 나 또한 한갓지게 여행이나 다니는 줄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친구 집에 온 지 며칠 째나 되었음에도 명퇴를 당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그것도 체면 때문이었을 것이다, 구겨질 대로 구겨진 내 자존심을 친구에게 드러낼 수 없다는 체면.
“자네, 한창 잘 나갔을 때 사표 던진 거 알아?”
술기운 때문에 조금 어긋나려는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내가 옛 기억을 불렀다.
“왜 아니냐? 남의 밑에서 일해 보니 안 되겠더라고. 아니, 어쩌면 자신이 없었는지도 몰라, 자네들과의 경쟁에서 말이야.”
내 말에 감회가 새로운 듯 친구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당찬 체구에 눈빛이 유난히 당돌해 보이던 친구였다. 친구의 아내가 소리 없이 웃었다. 힘들게 입사해 잘 나가던 대기업 중견 사원 직위의 자리를 박차고 태평양을 건너고 북미 대륙을 가로지르도록 인생의 변화를 충동질한 그녀.
친구가 떠난다고 했을 때, 그리고 같이 가자고 했을 때, 나는 미동도 할 수 없었을 때, 아내는 울었다. 그러나 아무리 울어도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었다. 실은 아내도 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너무나 잘 알고 있던 그 이유 때문에 울었는지도 몰랐다.
“같이 오지 그러셨어요?”
나의 이번 여행 목적을 관광으로 알고 있을 친구의 아내는 내가 혼자 온 것을 의아하게 여겼다. 그렇지 않아도 캐나다 여행을 계획하면서 아내에게 함께 가자고 권유했었는데 뜻밖에도 아내는 거절했었다. 표면적인 이유야 아이들 바라지 때문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 속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친구의 아내에게 직장 잃은 남편과의 동행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아내의 그 심정을. 나의 퇴직은 아내의 자존심까지 금 가게 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결국 체면 때문이었다. 아내도 나도 퇴직을 한 사실보다 퇴직과 함께 겪어야 하는 체면 손상을 더 못 견뎌 했다.
“다음에 오겠대요. 문화센터 다니느라 나보다 더 바빠요. 자기 계발해야 한다나?”
“자기 계발이요?”
내가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이는데 친구 아내가 동그란 눈을 하고 날 바라보았다.
“작은 집에서 오랫동안 식구들이 모여 살았잖아요? 갑갑도 했겠죠.”
내 말에 친구 아내는 다시 말없이 술만 들이켰다.
“이 사람은 혼자서는 할인매장밖에 갈 줄 몰라.”
‘혼자서는’이란 남편의 말 때문인지 아니면‘자기 계발’이란 내 말 때문인지 그녀는 연신 술만 들이켰다. 친구가 술만 마시는 아내를 제지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 말이야, 한국에 있었다면 담배나 껌 팔 수 있었을까? 이상한 건 거기서는 윗사람 비위도 못 맞추겠던 내가 여기서는 한단 말이야.”
친구가 아내에게 두었던 시선을 내게로 주더니 ‘하하’하고 좀 과장되게 웃었다. 아내의 심기를 다독이려는 제스처 같았다.
나도 정말 그것이 궁금했다. 가진 기술이나 돈이 많은 것도 아닌 나도 이곳에 오게 되면 정말 다 벗어 던지고 담배나 껌부터 팔아야 하는데,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잡다한 일용품 사다 나르는 일을 아내는 문화센터 교양프로그램에 동참하듯 할 수 있을까?
사실 아내의 입에서 이민 바람이 멈춘 것은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부모님과 형제들 바라지에서 가까스로 벗고 난 후부터였다. 그러니까 힘든 고비를 넘기고 우아하게 살만한데 왜 이민하느냐는 것이 아내의 생각이었다. 가이드를 따라다니는 관광은 할 수 없고, 장사도 할 수 없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대체 무엇일까? 평생 지켜온 삶의 터전을 박탈당하고도 지켜야 하는 체면, 그것의 뿌리는 의외로 깊었다.
“너무 잘 사는 것 같아. 아니, 너무 잘 사는 척하는 것 같아.”
친구가 다시 쓴 얼굴을 했다. 하긴 사람들이 돈을 잘 쓰고 잘 사는 것은 사실이었다. 우리나라에 또다시 육 이 오와 같은 전쟁이 일어난다면 사람들이 무기에 의해 죽는 것보다 불편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스트레스에 의해 죽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모두가 잘 사는 건 아니야. 얼마나 많은 가장이 직장 잃고 방황하고 있는데?”
“샴페인 터뜨리고 폭탄주 마시고, 그러니 그 꼴이지.”
술 탓인지 친구의 말이 거칠었다. 그 말이 어쩐지 ‘꼴좋다, 그 봐라, 는 의미로 들려 귀에 거슬렸다. 마치 자기 일임에도 방관자로 있던 사람이 일이 끝나자 참견하는 느낌이랄까? 내 속에서도 묘한 가시가 돋고 있었다.
‘찾아보면 분명, 있을 거예요, 당신 할 일이.’
명퇴 통보를 받았을 때, 처음엔 어이없어하다가 다음엔 왜 당신이냐며 흥분하며 대들다가 드러누워 버리더니, 그래도 방법이 없자 아내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막막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설마 뭔가를 다시 찾겠지, 아니, 같은 회사는 아니어도 이 정도의 체면은 지키며 살 수 있는 뭔가를 내가 다시 찾겠지 하는 믿음에 의한 수용이었다.
내가 퇴직당한 후 가장 견디기 힘든 부분 중의 하나가 아내와 자식들이 여전히 나를 기대한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비록 퇴직했지만 윤택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좋은 대우의 직장을 조만간에 구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그들의 믿음. 그러나 아무 대책을 갖고 있지 못한 나는 이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되는, 오래전 떠난 친구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 친구가 같이 가자고 했을 때 내 어깨 위에 얹혔던 짐들을 마다하고 떠났어야 하지 않았을까? 억누르던 짐 모두 벗어버리고 친구처럼 미지의 땅으로 가 마음껏 살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장남의 대학 공부를 위해 부모님의 허리가 휘어지셨든 말든, 진학을 포기한 채 동생들이 돈을 벌어야 했든 말든, 그것이 결국 무거운 짐으로 다시 내 어깨 위에 지워졌을 때 나는 그 짐들을 몰라라 하고, 떠났어야 하지 않았을까, 거리낌 없이 떠난 친구처럼? 그때 내 눈에 친구는 선구자였다.
그런데 선구자로 여겼던, 앞선 생각을 과감히 펼쳐 보이며 미련 없다는 듯 비행기에 오르던 그 친구는 자신의 세계인 가게에 오는 몇몇 관광객을 상대로 전체를 파악하고 있는, 더 넓은 세계 속에서 오히려 좁은 사고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친구는 한국이 잘 살아야 한다면서도 잘 사는 사람들이 관광 다니는 일에 흥분했고, 한국의 경제난을 염려하면서도 샴페인부터 터뜨린 결과라며 언젠가 외국 신문에 난 말을 인용해 비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있을 때 더러는 규모 있게 쓰지 못한 결과가 결국 한창 일할 나이의 인력을 무직자로 내모는 오늘의 현실을 불렀지만, 친구가 지적하는 것은 듣기 싫었다. 한창 일할 나이였을 때 남의 땅에 와 내 나라를 위해 한 일도 없는 사람이 웬 간섭이냐 싶은, 우리가 일할 때 너는 남의 나라에서 네 열정을 쏟지 않았느냐는 반감이 불쑥 치밀어 오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몇 잔의 술기운이 행여라도 친구 내외 앞에서 불쑥 치밀어 오르지 않도록 나는 꾸욱 입을 다물고는 술만 마시고 있었다.
나는, 내가 퇴직을 당했다는 말은 친구에게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평생 회사를 위해 가족을 위해 일하다 쓸쓸히 내어 쫓긴 나를 친구는 어쩌면 이해하기보다 ‘샴페인 터뜨리고 폭탄주 마실 때 알아봤다.’라며 또 큰 소리로 흥분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친구 집에 와 있으면서도 친구에게조차 속내를 털어놓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나는 화가 났다. 나는 뭔가를 자꾸만 숨기고 친구는 술기운을 빌어 자꾸만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화가 나 자꾸만 술을 마셨다.

소설가 김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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