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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향한 끝없는 헌신: 닥터 머레이의 사랑과 희생
온몸으로 환자 돌보고 의료 발전에 기여
- 유희라 인턴기자 (press1@koreatimes.net)
- Aug 07 2025 04:48 PM
광복 80주년 '애국지사들의 이야기 9' 시리즈(6)

플로랑스 머레이 선교사
“과연 갈 것인가?”
나는 오래 고민했다. 그러나 결국 가기로 마음먹었다. 친구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토록 먼 나라에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 가려 하느냐며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혹시 내가 무모한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 마음은 확고했다. 조선으로 가는 것이 나의 소명이자 부르심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떠났다. 그리고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이제 조선에서의 첫 21년을 돌아본다. 그곳에서 나는 많은 눈물을 흘렸다. 때로는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때로는 변화의 기쁨 속에서. 그러나 그 모든 순간은 나의 인생을 가장 깊고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 나는 조선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노바스코샤에서 조선까지
나는 1894년, 캐나다 노바스코샤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나의 고향 노바스코샤는 오랜 역사와 아픔을 품은 곳이었다. 그 땅은 원래 미크맥 원주민의 것이었지만, 1600년대 프랑스가 식민지로 삼았고, 이후 영국이 차지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 추방당했다. 아카디아인들이 고향을 잃고 떠돌았던 그 아픔은 지역 전체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프랑스 후예인 아카디아인들은 프랑스 국기에 황금빛 별을 넣었다. 이 깃발이 있는 곳은 아카디아인들이 사는 장소라고 생각하면 된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것이 나의 사명임을 깨달았다. 장로교 목사의 딸로 자라며, 신앙과 사랑의 가르침 속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의사가 되어 세상의 아픈 이들을 치료하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한 후, 꽃다운 25세였고 1919년 25살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보스턴 롱 아일랜드 병원에서 인턴 과정을 마치고, 외과대학 해부 실습 강사가 되었다. 그때 이미 한국에 와서 함흥에서 의료 선교를 하고 있었던 여의사 케이트 맥밀란(Kate MacMillan)은 수년 동안 외롭게 일하면서 자기를 도와줄 여의사를 보내 달라고 캐나다 선교부에 요청하고 있었다. 1차 대전이 끝나고 군대에 갔던 의사들이 모두 돌아오고 있었으므로 내가 캐나다에서 의사로서의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케이트 맥밀란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사명의식이 점점 더 나를 조선으로 끌어당겼다.
1921년 주변의 만류와 불안한 시선을 떨치고 머나먼 땅, 조선으로 향했다. 당시 조선은 일제의 식민 통치 아래 신음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가난과 질병 속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가장 약한 이들과 함께하며, 평생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캐나다 장로회 선교부에서 노바스코샤 출신의 아네타 로즈(Annetta Rose)와 온타리오주 출신의 크리스티나 커리(Christina Currie)를 교육 선교사로 임명하여 나와 함께 한국으로 가게 했다. 우리는 밴쿠버(Vancouver)에서 엠프레스 오브 재팬(Empress of Japan)이라는 캐나다의 태평양 횡단 기선을 타고 출항한 지 이주일 만에 일본의 고베항에 도착하였다.
다시 일본의 시모노세키에서 연락선을 타고 부산항에 입항했다.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12시간만에 서울역에 도착했다.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는 희미한 불빛이 거리를 밝히고 있는 늦은 방이었다. 에드나 로렌스의 안내를 받으며 세브란스 병원 간호원 기숙사에서 조선에서의 첫날 밤을 보냈다.
어두운 밤, 낯선 풍경과 냄새가 나를 둘러쌌다. “이게 무슨 냄새죠?”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함께 있던 선교사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하수구와 뒷간에서 나는 냄새예요. 곧 익숙해질 거예요.”
낯설고도 새로운 곳에서의 첫날 밤, 나는 숙소의 작은 방에서 모기장을 치고 기도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하나님, 이곳에서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보여 주소서."
낯선 언어, 낯선 문화 속으로
함흥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나는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사람들을 도울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의 한국어 선생님, 안상철 선생은 조용하고 인내심이 많았다. 그러나 내가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면 웃기도 했지만 때로는 난감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한국어에는 외국인이 이해하지 못할 존칭어가 많았다. "한국어는 존댓말이 많습니다." 그 말을 이해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그 차이를 직접 경험했다.
전화 통화를 하며 상대방에게 “누구?”라고 하자 상대방이 당황했다. 잠시 후 “누구요?”, “누구시오?”, “누구십니까?”, “누구세요?” 다양한 표현이 이어졌다. 한국어가 얼마나 정교하고 섬세한 언어인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떠나야만 했던 그날
조선에서의 삶은 나의 모든 것이었다. 나는 이 땅에서 숨 쉬고,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1941년, 나의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일이 일어났다. 일본 제국이 나에게 강제 추방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다. 조선은 이미 나의 고향과 다름없었다. 나는 여기서 아이들을 치료했고, 병든 노인들의 손을 잡았으며, 외롭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했다. 나는 조선의 사람들을 위해 살았고, 그들도 나를 가족처럼 여겼다. 그런데 이제, 나는 이곳을 떠나야만 했다.
의심과 감시
사실, 이러한 일이 벌어질 조짐은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일본 당국은 외국인 선교사들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에서 일하는 우리를 단순한 의료 선교사로 보지 않았다. 우리는 ‘잠재적인 위협’이었다.
나는 종종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병원을 운영하는 것이 내 일상이었지만, 누군가 내 뒤를 밟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나의 작은 행동 하나까지도 보고하고 있었다. 나는 단순히 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리고 일본은 바로 그 ‘희망’을 두려워했다.
일본은 조선의 독립운동을 철저히 탄압하고 있었다. 나는 독립운동가들을 몰래 치료한 적이 있었다. 총에 맞은 이들, 고문당한 이들, 병들어 쓰러진 이들이 밤에 몰래 병원을 찾아오곤 했다. 나는 그들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들은 단순한 환자가 아니라, 자유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밤, 나는 심하게 다친 젊은이를 치료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 경찰에게 쫓기고 있었고, 몸은 이미 쇠약해져 있었다. 나는 그의 상처를 소독하며 기도했다. “하나님, 이 젊은이를 지켜 주소서.” 하지만 며칠 후, 그는 결국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나는 그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때부터, 일본군의 감시는 더욱 심해졌다.
운명의 날
어느 날 아침, 병원 문 앞에 군인들이 서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내게 건넨 문서에는 **‘즉각 귀국 명령’**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곳을 떠나라고요?”
군인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즉시 짐을 꾸리십시오. 당신은 조선을 떠나야 합니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수많은 환자들이 떠올랐다. 아픈 아이들, 나를 찾아오는 노인들, 그리고 내 손길을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는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거부할 수 없었다. 일본 제국은 이미 선교사들을 하나둘씩 내쫓고 있었고, 나는 그들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별의 순간
짐을 꾸리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병원 문을 나서려는 순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닥터 머레이, 떠나지 마세요.”
“우린 어떻게 합니까?”
“다시 돌아올 거죠?”
나는 그들의 손을 잡고,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대답했다. “꼭 돌아올게요.”
기차에 오르는 순간까지 나는 조선을 떠나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기차가 출발하고, 창밖으로 익숙한 풍경이 사라져 갈 때, 나는 눈물을 흘렸다.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이 땅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돌아오리라.
그렇게 나는 조선을 떠났다. 하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었다.
또다시 떠나야 했던 날
나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1941년, 일본의 강제 추방으로 인해 떠나야 했던 그 땅으로. 해방된 조선은 변해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희망이 자리 잡기도 전에, 또 다른 전쟁이 찾아왔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날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전쟁은 너무도 갑작스럽게, 그리고 너무도 무자비하게 모든 것을 앗아갔다. 나는 부산으로 향했다. 피난민들이 몰려드는 항구 도시는 혼돈 그 자체였다. 거리에는 부모를 잃고 방황하는 아이들이 넘쳐났고, 병든 사람들은 치료받을 곳조차 찾지 못한 채 쓰러져 있었다.
나는 쉬지 않고 움직였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너무 많았다. 지친 몸을 이끌고 하루에도 수십 명의 환자를 돌보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도 한정적이었다.
부산의 절망 속에서
그날도 피난민 진료소에서 치료를 하던 중, 나는 유엔 병원선 **‘유틀란디아 호’**의 소식을 들었다. 그곳에서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하면, 더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망설일 틈 없이 병원선을 찾아갔다.
“부산에 있는 피난민들을 치료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의료진에게 말했다. 다행히도 그들은 나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나는 그곳에서 통역과 진료를 맡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한 청년을 만났다.
그는 전쟁 첫날 가슴에 총상을 입고 1년 반 동안 병상에 누워 있었다. 한국 의사들은 흉부 외과 치료법을 알지 못했고, 그의 폐는 점점 기능을 잃고 있었다. 나는 그의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있으면 살 수 없어요.”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어나야 합니다.”
그는 내 말을 믿지 못하는 듯했다. 오랜 시간 병상에 누워 있던 그는 걷는다는 것 자체를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며칠 후, 그는 망설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힘겹게 첫 발을 떼는 모습이 마치 갓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보였다. 그리고 몇 주 후, 그는 배수관을 제거하고 자신의 발로 걸어서 퇴원했다.
“이제 난 새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나도 그를 보며 기뻐했다. 그러나 전쟁은 너무도 길고, 너무도 잔인했다.
두 번째 이별
나는 전쟁 속에서도 조선을 떠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현실은 나의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전선이 밀고 내려오면서 부산에도 불안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유엔군이 병원선과 선교사들에게 철수를 명령했다. 피난민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으며, 외국 의료진은 더 이상 보호받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나는 깊은 갈등에 빠졌다.
떠나야 하는가, 남아야 하는가.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이곳에서 계속 남아 환자들을 치료하고 싶었지만, 미 대사관은 즉각 조선을 떠나야 한다고 통보했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짐을 꾸렸다.
떠나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병원을 찾았다. 거기엔 여전히 치료받아야 할 환자들이 있었다.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또다시 조선을 떠났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떠나와야 했다.
돌아온 조선, 그리고 마지막 떠남
나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1941년, 일본의 강제 추방으로 떠났고, 1950년, 전쟁의 포화 속에서 또다시 조선을 등져야 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한순간도 이곳을 떠난 적이 없었다. 나는 언제나 조선을 그리워했고, 조선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마침내, 1961년, 한국 정부의 공식 초청을 받았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많은 이별과 재회의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조선이 나를 다시 불러주었다. 나는 더 늦기 전에 그곳으로 가야 했다.
달라진 조선, 변하지 않은 마음
비행기가 인천 공항에 착륙할 때,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20년 전, 내가 떠났던 조선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폐허 같았던 도시에는 빌딩이 세워지고, 거리에는 사람들이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찾고자 했던 것은 새로운 건물이 아니라,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들이었다.
서울에 도착하자, 많은 사람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어떤 이들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나의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다.
“닥터 머레이, 정말 다시 오셨군요.”
한 노인이 내 손을 꼭 잡았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낯익은 모습이었지만, 전보다 더 깊은 주름과 세월의 흔적이 보였다. 그는 내가 함흥에서 치료했던 한 소년이었다.
“어린 시절 선생님께 치료받고, 이제는 제 아이들도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자라고 있습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미소 지었다. 이것이 내가 조선을 떠날 수 없었던 이유였다.
마지막 사명
나는 이번 방문에서 한국 의료 발전을 돕는 일을 맡게 되었다. 한국 정부는 전쟁 이후 붕괴된 의료 시스템을 재건하는 데 도움을 요청했고, 나는 기꺼이 힘을 보태기로 했다.
나는 병원을 둘러보며, 후배 의사들에게 내 경험을 전수했다. 당시 한국 의료진은 여전히 현대 의학의 최신 기술을 익히지 못한 상태였고, 나는 그들에게 선진국의 치료법을 가르쳤다.
특히, 나는 흉부외과와 소아과 치료에 중점을 두었다. 한국전쟁 때 폐 질환으로 치료받지 못했던 수많은 환자들을 기억하며, 나는 그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다.
나는 다시 수술실에 섰다.
다시 조선의 아이들을 치료했다.
다시 조선의 환자들과 함께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알았다. 이것이 내 마지막 방문이 될 것이라는 것을.
마지막 떠남
몇 년 동안 한국에서 머물며 의료 발전을 도왔지만, 내 몸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나이와 건강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젊지 않았고, 이곳에서 나의 역할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많은 것을 받았다.
이곳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고, 많은 사랑을 주었다.
1969년, 나는 건강상의 이유로 조선을 떠나야 했다. 캐나다로 돌아가며, 나는 조선을 위해 기도했다. 조선 사람들은 나에게 단순한 환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나의 친구이자 가족,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나는 나의 건강이 조선에서 머물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떠나야 했다. 이번에는 정말로, 마지막으로.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조용히 조선을 바라보았다.
나는 조선을 떠나왔지만 나의 심장은 여전히 조선과 함께하고 있었다.
나는 내 인생의 대부분을 조선에서 보냈다. 일본의 감시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고통속에서도 조선은 내가 머물러야 했던 곳이었다. 때로는 외로웠고, 때로는 절망스러웠지만, 조선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순간순간이 나의 삶을 더욱 깊고 풍요롭게 만들었다.
나는 조선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
플로랑스 머레이를 호명하면서
그녀는 네차례나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한국 땅을 떠났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1961년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돌아온 머레이는 원주로 향했다. 당시 원주는 의료 서비스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지역이었고, 그녀는 그곳에서 새로운 사명을 이어갔다. 그녀는 여성들, 결핵 환자, 나병 환자 등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이들을 치료하는 데에 헌신했다.
특히 1960년대에는 이동병원 차량을 미국의 복지단체로부터 지원받아 원주 인근의 농촌과 산간 지역을 돌며 치료 활동을 펼쳤다. 의료 인프라가 부족한 곳에서 그녀의 이동병원은 주민들에게 큰 희망이 되었다. 또한, 그녀는 1969년까지 원주 세브란스 병원의 설립에 기여하며 한국의 의료 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다.
닥터 머레이의 삶은 단순히 의료인의 역할을 넘어 자신의 시간과 능력을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헌신하며 진정한 사랑을 실천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개인의 선행이 아니라, 한 나라의 역사와 사회에 깊은 영향을 끼친 감동적인 여정이다. 25세의 여성의사가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한국에서 한국인을 위해 살았음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그녀는 진정한 봉사와 희생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었고, 우리 모두가 사회적 책임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녀의 발자취는 한국과 캐나다의 우정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사랑과 나눔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필진의 말

박정순 한카문화예술원 대표
제가 글을 쓰면서 느낀 감동은 제 자신이 그분들을 알지 못했던 부끄러움이었다. 가톨릭 신자로서,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조용히 선을 행하는 수도사들의 삶에 익숙했다. 그래서 선교사들의 삶에 대해선 솔직히 깊이 알지 못했다. 하지만 글을 쓰기 위해 캐나다 선교사들에 관한 논문과 책들을 읽는 동안 어둠속에 빛을 남긴 조선인을 향한 깊은 연민에 벅찬 감동을 받았다. 그 감동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뮤지컬 ‘조선의 등불’을 만든 계기가 되었다. 제게 그런 삶을 살라고 한다면 저는 당연히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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