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뉴스구독
  • 핫뉴스
  • 부동산·재정
  • 이민·유학
  • 문화·스포츠
  • 주간한국
  • 오피니언
  • 게시판
  • 기획기사
  • 업소록
  • 지면보기
  • 광고문의
  • 기사제보
  • Masthead
  •     Tel: (416) 787-1111
  •     Email: public@koreatimes.net
  • LOGIN
  • CONTACT
  • 후원
  • 기사검색
  • LOGIN
  • MASTHEAD
  • CONTACT
  • 기사제보
  • HotNews CNE에 한국의 맛과 멋 스며든다
  • HotNews 캐나다, 미국산 주류 금지조치 풀까
  • CultureSports 제주 전국체전 10월16일 개막
  • HotNews 퇴역 군용기, 산불 진화에 투입
  • HotNews 국세청 등 해킹 피해자 보상 청구 시작
  • HotNews 살사축제 총격 용의자 기소
  • HotNews 아동병원 직원 성범죄 혐의로 기소
  • HotNews 미국 영주권 수속 한인, 공항서 체포돼
  • CultureSports K-컬처 크루즈 타고 토론토 달군다
koreatimes logo
  • 지면보기
  • 핫뉴스
  • 문화·스포츠
  • 주간한국
  • 이민·유학
  • 부동산·재정
  • 자동차
  • 오피니언
  • 게시판
  • 업소록
  • 뉴스구독
  • 기사검색
  • 후원

Home / 기획기사

조선의 광복을 꿈꾼 일본인 독립운동가

일본의 양심 가네코 후미코·후세 다쓰지


Updated -- Aug 12 2025 04:30 PM
  • 유희라 인턴기자 (press1@koreatimes.net)
  • Aug 12 2025 04:28 PM

광복 80주년 '애국지사들의 이야기 9' 시리즈(7·끝)


 

2025년 3월 현재, 97명의 외국인이 독립유공자 서훈받아

지난해(2024) 3월 초순, 삼일절 105주년을 맞이하여 서울역KTX 3층 전시장에서는 아주 뜻깊은 시화전이 열렸다. 시화전 주제는 ‘조국 독립을 위해 숭고한 삶을 살다 간 여성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로 모두 40점의 시화(詩畫) 작품이 선보였다. 이날 전시된 작품을 그린 이는 한국화가 이무성 화백이고 시는 필자가 썼다. 전시 작품 40점 가운데 유달리 기억에 남는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있다. 그 이름은 호주 여자 선교사 출신의 마가렛 샌더먼 데이비스(2022년 애족장), 이사벨라 멘지스(2022년 건국포장), 데이지 호킹(2022년 건국포장)이다.

 

스크린샷 2025-08-11 131629.png

지난해 전시한 호주 독립운동가(마가렛 샌더먼 데이비스, 이사벨라 멘지스, 데이지 호킹) (왼쪽부터, 이무성 화백 그림)

 

이 3명을 포함하여 외국인 신분으로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공로로 서훈을 받은 분들은 2025년 3월 현재 97명(국가보훈부 자료)이다. 이들을 국가별로 살펴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도운 장개석(蔣介石, 1953년 대한민국장) 등 중국 국적자가 41명으로 가장 많다. 뒤를 이어 미국 국적자는 호레이스 뉴튼 알렌(1950, 독립장) 등 21명, 러시아 국적자는 김알렉산드라(2009, 애국장) 등 14명, 영국 국적자는 조지 루이스 쇼(1963, 독립장) 등 6명, 캐나다 국적자는 1919년 4월 일본군의 수원 제암리교회 학살 방화 사건을 전 세계에 알린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968, 독립장) 등 6명이다. 이 가운데 일본인은 남편인 독립투사 박열과 함께 일본 천황 타도를 꾀하다 23살 꽃다운 나이에 사형선고를 받고 일본에서 순국한 가네코 후미코 지사와 1919년 도쿄에서 2.8독립선언을 발표하며 독립운동을 한 조선인 유학생들의 변론을 맡아 준 후세 다쓰지 변호사를 들 수 있다.

이번 제9집 '애국지사들의 이야기'에서는 ‘외국인 출신으로 조선의 독립을 도운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일본인 출신인 가네코 후미코 지사와 후세 다쓰지 변호사의 삶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가네코 후미코’

죽음보다 더
견디기 힘든
일제 폭력에 항거하며
자유를 갈망하던
조선인 남편 도와
저항의 횃불을 높이 든 임
그 횃불 타오르기 전
제국주의 비수 맞아
스물셋 꽃다운 나래 접고
조선땅에 뼈를 묻은
임의 무덤 위로
해마다 봄이면
푸른 잔디
곱게 피어나누나.

-필자 시 '서간도에 들꽃 피다' (제10권), ‘가네코 후미코’ 수록-

 

경북 문경시 마성면 샘골길에는 부부독립운동가 박열(1902-1974)과 부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 지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박열의사기념관'이 있다. 또한 경내에는 ‘일제에 저항하며 자유의 횃불을 높이 들었던 가네코 후미코의 무덤’도 자리하고 있어 기념관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스크린샷 2025-08-11 131638.png

경북 문경시 ‘박열의사기념관’ 공원 안에 있는 가네코 후미코 무덤.

 

가네코 후미코는 1903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재혼하는 바람에 9살 때 조선에 살고 있던 고모집에 보내진다. 말이 고모이지 새아버지의 여동생 집이었기에 사실상 거의 남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이곳에 맡겨진 가네코 후미코는 하녀 취급을 받으며 16살이 될 때까지 7년을 보냈다. 이때의 ‘조선 경험’은 훗날 그가 조선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 조선에서 몸소 겪은 1919년 3·1만세운동 현장은 오랫동안 가네코 후미코의 가슴 속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억압과 압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고군분투하던 조선인들의 삶의 모습은 그녀가 일본의 형무소에 수감되어 기록한 일기 등에서 감지된다.

1920년 봄, 도쿄로 돌아간 가네코 후미코는 신문팔이, 가루비누 행상, 식모살이, 식당 종업원 등을 전전하면서도 학업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때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과 만나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눈뜨기 시작했는데 특히 조선인 무정부주의자인 청년 박열과의 만남은 가네코 후미코의 인생을 바꿔 놓는 계기가 되었다. 어린 시절 하녀 취급받으며 조선에서 지낼 때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물로서 고통받는 식민지 조선인과 가족제도의 희생물로 노예처럼 살아온 자신을 동일하게 여기고 그 정점이 천황제라고 인식하기에 이른다. 가네코 후미코는 1922년 봄부터 박열과 함께 독립투쟁 노선에 뛰어드는데 이 무렵 일본 사상계의 효시로 평가되는 흑도회(黑濤會) 기관지 '흑도(黑濤)' 창간호를 펴냈다. 이어 동지이자 남편인 박열과 함께 무정부주의자 단체인 흑우회를 결성하고 11월에 '불령선인(不逞鮮人)'을 창간하여 1923년 6월까지 4호를 펴냈다. 또한 1923년 4월에는 남편과 함께 대중 단체인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여 활동하는 등 가네코 후미코의 열성적인 활동은 모두 이 무렵에 이뤄졌다. 그러나 이들의 이러한 투사적인 활동은 1923년 9월1일 관동대지진 시에 체포됨으로써 그 활동이 중단되고 말았다.

서슬 퍼런 제국주의 심장 일본 도쿄에서 천황 타도에 앞장섰던 박열·가네코 후미코 부부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23년 9월1일 오전 11시58분, 일본 간토(관동) 일대를 강타한 이른바 ‘간토대지진’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도 7.9의 초강진이 발생하자 야마모토 곤베(山本權兵衛) 내각은 사나워진 민심을 돌리기 위해 도쿄 전역과 가나가와현에 계엄령을 확대 시행하고 지진 발생 이튿날부터 조선인 폭동설을 조직적으로 유포시켜 수많은 조선인을 검거하기에 이른다. 이때 박열·가네코 후미코 부부는 보호검속(保護檢束, 공공의 안전을 해롭게 하거나 죄를 지을 염려가 있는 사람을 경찰에 잠시 가둠)이란 명목으로 체포되었다. 대지진을 수습해야 하는 군부와 경찰은 위장 단체인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하여 불령선인(不逞鮮人)이란 이름 아래 조선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스크린샷 2025-08-11 131650.png

간토대지진(관동대지진) 때 자경단으로 위장한 일본 경찰들이 조선인을 학살하고 있는 모습.

 

스크린샷 2025-08-11 131656.png

간토대지진 때 일본 군경의 개입은 없었고 주민들이 마을을 지키려고 조직한 ‘자경단’이 있었을 뿐이라고 일본은 주장했지만 '제1사단사령부'에서 만든 보병15부대, 기병2부대 등의 군부대 배치가 명확히 기록되어 있는 '경비부대배치도개요'가 세상에 드러나 조직적인 군경의 개입이 있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간토대지진 당시 일제가 조선인 학살을 규탄한 하와이동포들의 동정을 보도한 기사(신한민보 1923년 11월8일)에 따르면 6,380여 명이 구속되었다고 한다. 당시 계엄군과 경찰에 의해 검속된 사람 가운데 박열·가네코 후미코 부부를 비롯한 불령사 동지들 16명도 포함되었다. 이들은 한 달 뒤인 10월20일 ‘대지진 중 혼란을 틈타 천황 암살을 기도한 불령선인 비밀결사’의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이듬해인 1924년 1월, ‘대역죄인’으로 구속·수감되었다. 이 과정에서 박열·가네코 후미코 부부는 조선인 대학살에 대한 비난을 모면하려는 일본 정부에 목숨을 구걸하기보다는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투쟁’을 벌이기로 했다. 이들은 수차례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전향을 거부한 채 예심 판사에게 천황을 처단하기 위한 폭탄 유입 계획을 당당히 밝혔다.

 

스크린샷 2025-08-11 131707.png

천황제 반대와 일왕 살해 기도 죄로 잡혀 재판정에 들어서는 박열, 가네코 후미코 부부 기사(박열의사기념관 제공).

 

그 결과, 1926년 2월26일 도쿄 대심원 법정에서 열린 공판에서 박열·가네코 후미코 부부는 일왕 살해를 기도한 이른바 '대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죄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사형’을 선고받기 한 달 전 이들은 혼인신고서를 제출하여 정식 부부가 되었으며 죽어서도 영원히 함께 하자고 맹세했다. 사형이 선고된 뒤 두 사람은 각각 지바(千葉) 형무소와 도치키(栃木) 형무소로 이감되었는데 열흘 뒤 ‘대사면 은사(恩賜)’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스크린샷 2025-08-11 131716.png

박열·가네코 후미코, '주부의 벗(主婦之友)' (1926.3월호)

 

그러나 가네코 후미코는 그해(1926) 7월23일, 옥중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가네코 후미코 나이 스물세 살 때 일이다. 당시 교도소 측에서는 그녀의 죽음을 ‘자살’로 발표했으나 일설에는 ‘타살 의혹’이 줄곧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주장은 후지와라 레이코(藤原麗子) 씨의 '문경에서, 2017'이라는 글에서 당시 가네코 후미코가 임신 중이었는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보기에는 의문이 따른다는 지적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야마다 쇼지(山田昭次)씨도 '가네코 후미코 : 자신·천황제국가·조선인(金子文子: 自己·天皇制國家·朝鮮人)'이란 책에서 “후미코 유족이 자살을 믿을 수 없다고 조사를 요청했으나 간수측의 방해로 사망 경위가 불명인 채로 남아있다.”고 증언한 사실에서도 ‘자살 처리’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다. 가네코 후미코의 주검은 옥사한 그해, 1926년 11월5일, 남편 박열의 선영(경북 문경)에 안장되었으며 2003년 11월 박열의사기념관 공원 안, 현재의 터로 이장하여 영면에 들었다.

한편, 박열 의사는 대역죄명으로 사상 유례없는 22년 4개월간을 일본의 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해야했다. 특히 1945년 8월, 죄수들의 석방이 대거 이뤄졌지만, 일제는 72일이나 지난 10월27일까지 박열 의사를 대역사범(천황살해기도죄)이라고 풀어주지 않았다. 이에 원심창, 이강훈, 김천해 등 동료들이 맥아더 연합군 총사령부 앞으로 석방 탄원서를 제출한 끝에 1945년 10월 홋카이도에서 44살이 되어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박열 의사는 석방 뒤 1946년 10월3일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을 결성하여 초대회장을 맡아 활약했다. 이듬해 조국으로 귀환하였으나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1974년 북한에서 숨을 거두었다. 박열 의사(義士)는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고, 가네코 후미코는 2018년 11월17일, 일본인으로는 후세 다쓰지 변호사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2·8도쿄독립선언을 주도한 조선인 유학생 변론을 맡아준 ‘후세 다쓰지’ 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1880-1953) 변호사는 한평생을 사회적 약자 편에 서서 소외된 이들의 벗이 되어 그들의 손을 잡아주고 법률 변호를 맡아주었던 민중 변호사였다. 특히 1919년 2월8일, 도쿄에서 2·8독립선언을 하다 잡혀간 조선인 유학생들의 변론뿐만이 아니라 3·1만세운동 때는 “조선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한다”는 글을 발표할 정도로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깊은 사랑을 지녔던 일본인이다.

 

스크린샷 2025-08-11 131726.png

후세 다쓰지 변호사(왼쪽)와 일본인 최초로 한국의 건국훈장을 받은 후세 다츠지 변호사에 대한 강연회 포스터(2005)

 

후세 다쓰지 변호사는 1880년 일본 미야기현 오시카군(현, 이시노마키시)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심상소학교를 졸업한 뒤 고등과에 진학하지 않고 한자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제자백가 중에 묵자(墨子)의 겸애주의(兼愛主義)에 관심을 보였는데 겸애주의란 보편적인 사랑 곧 모든 사람이 사회적 지위, 부, 민족에 관계없이 동등하게 서로를 사랑하고 돌봐줘야 한다는 사상을 말한다. 그는 훗날 사법관 시보를 그만둘 때 발표한 '사직의 글'에서 “나를 언제나 감싸는 사회정책으로서의 겸애주의”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이는 자신과 타자를 동일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겸애주의 입장에서 인간의 평등성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시각은 차별과 억압을 받는 이민족으로서의 조선인에 대한 평생 후세 다쓰지의 따스한 시선의 원동력이었다. 후세 다쓰지는 1899년 고향을 떠나 도쿄로 상경하여 메이지 법률학교에 입학했다. 그가 대학 진학을 꾀한 것은 “박애주의의 이상 아래 약육강식의 현실을 없애고 이를 실행시킬 철학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학식과 장기간의 공부가 필요하다. 법률은 도덕과 더불어 사회생활의 원리이기 때문에 이에 관한 공부를 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후세 다쓰지 변호사가 조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19년 3·1만세운동을 전후한 시기로 보인다. 그는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 운동’을 배경으로 사회적으로 분출된 보통선거운동과 사회단체의 결성을 통해 ‘전통적인 변호사’로부터 ‘민중의 변호사’로 변신하겠다는 장문의 ‘자기 혁명의 고백’을 선언하였는데, 1920년 5월에 발표된 ‘자기 혁명의 고백’의 첫 부분을 보면,

“인간은 누구든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 좋은가에 대해 진정한 자신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는 양심의 소리이다. 나는 그 소리에 따라 엄숙히 ‘자기 혁명’을 선언한다. 사회운동의 급격한 조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종래의 나는 ‘법정의 전사(戰士)라고 말할 수 있는 변호사’였다. 하지만 앞으로는 ‘사회운동에 투신한 변호사’로서 살아나갈 것을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민중의 권위를 위해 선언한다. 나는 주요 활동 장소를 법정에서 사회로 옮기겠다.”

- '법정에서 사회로(法廷より社會へ)'(1920.5) -

 

이것은 그가 민중 변호사라는 이름으로 평생을 살고자 첫발을 내딛은 굳은 결심의 표현이었다. 이는 곧 ‘전통적인 변호사’로부터 ‘민중의 변호사’로 변신하겠다는 뜻이며, 입신출세하여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는 비굴한 삶을 거부하고 평생 사회적 약자와 더불어 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더 나아가 후세 다쓰지 변호사의 구체적인 활동 사안에 대한 결심을 보면 그가 어떠한 자세로 변호사의 길을 걸어갈 것인가에 대한 철학이 엿보이는 대목이 있다.

1. 관헌에게 부당한 부담을 강요받은 사람의 사건
2. 자본가와 부호의 횡포에 시달리는 사람의 사건
3. 관헌이 진리의 주장에 간섭하는 언론범 사건
4. 사회운동에 대한 탄압과 투쟁하는 무산계급의 사건
5. 인간차별에 맞서 투쟁하는 사건
6. 조선인과 대만인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사건

위의 결심을 통해 그는 일본 내의 사회문제만이 아니라 조선인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사건에도 직접 나서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가 1924년, 일본 황거에 폭탄을 투척한 김지섭 지사(1962 대통령장)의 변론과 1926년 일왕 및 왕족을 살해하려는 거사로 체포된 박열·가네코 후미코 부부의 변론을 맡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후세 다쓰지 자신의 ‘민중에 대한 철학’이 밑바탕이 된 것이었다. 특히 식민통치를 철저히 비판하고 일왕을 살해하려는 혐의로 구속된 박열·가네코 후미코 부부의 변론은 후세 변호사 자신의 목숨을 건 법정투쟁이었다. 더구나 이 과정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해 형무소 뒤뜰에 버려진 가네코 후미코의 주검을 거두어 자신의 집에 안치했다가 박열의 고향으로 운구해 장사를 지내준 것도 후세 다쓰지 변호사가 아니면 결코 실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본다.

 

스크린샷 2025-08-11 131738.png

1927년 방한 직전의 후세 다쓰지 변호사

 

후세 다쓰지 변호사는 1923년 이후 세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해 의열단원 김시현(金始顯)의 조선총독부 요인 암살 기도사건, 제1·2차 조선공산당 사건 등에 대한 무료 변론도 맡았다. 이 일로 1930년대에만 3회에 걸쳐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두 번이나 투옥되는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는 한결같이 조선 사랑의 끈을 놓지 않았다. 특히 후세 다쓰지 변호사는 간토대지진 시에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 학살에 대해 당국의 태도를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나도 무서운 인생의 비극입니다. 너무나도 가혹한 비극이었습니다. 특히 그중에는 조선에서 온 동포의 마지막을 생각할 때, 저는 애도할 말이 없습니다. 또 어떤 말로 추도하더라도 조선동포 6천의 유령은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을 슬퍼하는 천만 개의 추도의 말을 늘어놓더라도 그 사람들의 무념에 가득찬 마지막을 추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학살은 계급투쟁의 일단이었습니다. 우리의 동지가 죽음을 당한 것도 6천의 동포가 그러한 처지에 직면한 것도 우리가 계급투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입니다.”

- '대동공론(大東公論)'(1924.11) -

 

일본의 패전과 더불어 후세 다쓰지 변호사는 1946년 '조선건국 헌법 초안 사고'를 조선인들과 공동으로 집필했다. 이는 재일조선인의 의견을 수렴하여 집필한 것으로 ‘해방’ 이전부터 조선 문제를 다뤄오던 후세다운 모습이었다. 이러한 후세 다쓰지의 ‘조선 사랑’ 마음은 그의 장례식에 보인 조선인들의 태도에서도 잘 나타난다. “후세 다쓰지 선생님은 우리 조선인에게 정말로 아버지, 맏형 같으며 또한 구원의 배와 같은 귀중한 존재였습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영원히 선생님과 이별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은 가슴이 찢어지도록 슬픈 일입니다.” 후세 다쓰지 변호사는 식민지 조선인의 진정한 ‘벗’이자 ‘동지’였다.

 

스크린샷 2025-08-11 131747.png

1953년 9월24일 장례식장 모습. 영정 좌우로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하여"라는 문구가 보인다. 국가보훈부 제공

 

일본의 양심인 후세 다쓰지 변호사는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하여”라는 말을 남기고 1953년 9월24일 73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정부는 후세 다쓰지 변호사의 한국을 위한 독립운동 업적을 기려 일본인 최초로 200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으며 '2023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여 그의 업적을 기렸다.

 

필진의 말

이윤옥.png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일본제국주의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녀오던 조선을 침략하여 식민지화했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좌절하지 않고 불굴의 투지를 불살랐다. 독버섯처럼 제국주의의 온갖 악행이 번져나가던 그때 후세 다쓰지, 가네코 후미코 같은 일본인들은 제국주의를 꾸짖으며 천황 타도라는 기치를 내걸고 조선인을 도와 독립의 횃불을 함께 들어주었다. 제국주의 반대편에 서서 조선과 조선인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일본인들, 그들의 양심과 투지는 광복의 빛을 찾은지 80년이 되는 오늘도, 아니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들 가슴에 남을 것이다.

 

The article is funded by the Government of Canada through the Local Journalism Initiative program.

0배너광고_대표_겨울.png

www.koreatimes.net/기획기사

유희라 인턴기자 (press1@koreatimes.net)

  • 캐나다 한국일보
  • 리쏘 (Lisso) 안마의자

댓글을 달아주세요

댓글운영원칙
'댓글'은 기사 및 게시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온라인 독자들이 있어 건전한 인터넷 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 원칙을 적용합니다.

1. 댓글삭제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 하겠습니다.
  1. 1) 타인에 대한 욕설 또는 비판
  2. 2) 인신공격 또는 명예훼손
  3. 3) 개인정보 유출 또는 사생활 침해
  4. 4) 음란성 내용 또는 음란물 링크
  5. 5) 상업적 광고 또는 사이트/홈피 홍보
  6. 6) 불법정보 유출
  7. 7) 같은 내용의 반복(도배)
  8. 8) 지역감정 조장
  9. 9) 폭력 또는 사행심 조장
  10. 10) 신고가 3번 이상 접수될 경우
  11. 11) 기타 기사 내용과 관계없는 내용

2. 권한제한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 드립니다.
"#광복80주년애국지사" 관련 기사
조선을 향한 끝없는 헌신: 닥터 머레이의 사랑과 희생 온몸으로 환자 돌보고 의료 발전에 기여 -- 07 Aug 2025
대한의 독립 운동을 도왔던 캐나다 선교사, 아치발드 바커 국제사회에 일본군 만행 알려  -- 31 Jul 2025
캐나다 선교사 앨리스 샤프와 유관순 열사 여성교육 통해 독립운동 기틀 마련에 큰 영향 -- 01 Aug 2025
일제에 항거한 팔룡산의 호랑이 던칸 M. 맥레 일본 탄압에 맞서고 신사참배 강력 반대 -- 28 Jul 2025
조선인보다 조선을 더 사랑했던 파란 눈의 이방인 제임스 스카스 게일 광복 80주년 특집...'애국지사들의 이야기 9' 시리즈(2) -- 24 Jul 2025
조선선교와 독립운동의 밀알이 된 윌리엄 존 맥켄지 광복 80주년 특집...'애국지사들의 이야기 9' 시리즈(1) -- 17 Jul 2025
조선을 사랑했던 캐나다 선교사들 교육·의료 발전 기여하고 독립운동 지원도 -- 21 Jul 2025

카테고리 기사

90666210-73d1-40a7-9f97-d239581d5d06.jpg
F

“자신이 원하는 마지막 인사, 생전에 정해두세요”

30 Jul 2026    0    0    0
6f995405-8912-4acd-ac74-6104876b1820.png
F

“천국에는 짐 크로가 없다”

30 Jul 2026    0    0    0
8919d472-8538-4626-aadc-5c4ce19c91f8.jpg
F

파라오에 구애 편지·선물...

31 Jul 2026    0    0    0
스크린샷 2026-07-26 143633.png
F

오븐으로 100㎏ 밥 짓고 매주 수천 끼

26 Jul 2026    0    0    0
db803135-eb43-481f-819d-8233315b07fd.jpg
F

애국 매수에 '돈쭐난' 모나미

26 Jul 2026    1    0    0
524b9a39-4447-4d67-b7cc-46aa9a867958.jpg
F

‘축제’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

23 Jul 2026    0    0    0


Video AD



오늘의 트윗

adobestock_1985654809 (1).jpeg
Opinion
재정보고서 강좌
04 Aug 2026
1



  • 인기 기사
  • 많이 본 기사

dan-gold-e6hjqab7uea-unsplash.jpg
HotNews

캐나다인 덜 먹고 덜 쓰고 허리띠 졸라맨다

13 Jul 2026
0
20251121-13110199.jpg
HotNews

먹고 살기 힘든데 새차는 큰 부담

14 Jul 2026
0
장관.jpeg
HotNews

조성훈 장관 숙박비용 논란

14 Jul 2026
2
leeanne-berry-3bajoe_fww0-unsplash.jpg
CultureSports

안 쓰는 물건, 어디서 팔까

13 Jul 2026
2
1defdd4b-54c2-4358-afd9-9f8913af1d93.jpg
WeeklyKorea

최상위 포식자 늑대 돌아오자

23 Jul 2026
0
사진.jpg
HotNews

한화오션은 잠수함 대신 잠수정 만들면?

10 Jul 2026
0
스크린샷 2026-07-10 094914.png
HotNews

국세청 오류로 받은 2만5천 불 환급 반환했더니...

10 Jul 2026
0
54kweeiot5alvnv2fepj2z6igu.jpg
HotNews

어머니날 선물로 복권 구입했더니 7천만 불 당첨

22 Jul 2026
0


The Korea Times Daily
500 Sheppard Ave. E. Unit 206 & 305A, North York, ON M2N 6H7
대표메일/기사제보
Email : public@koreatimes.net
광고문의(Advertising) : ad@koreatimes.net

캐나다 한국일보

  • Masthead
  • 온라인지면 보기
  • 핫뉴스
  • 이민·유학
  • 부동산·재정
  • 주간한국
  • 업소록
  • 찾아오시는 길

한인 문화예술 연합

  • 한인문인협회
  • 한인교향악단
  • 한국학교연합회
  • 토론토한인회
  • 한인여성회
  • 한인미술가협회
  • 온주한인실협인협회

한인 공익 네트워크

  • 홍푹정신건강협회
  • 생명의전화
  • 생태희망연대

공공 정부기관

  • 토론토총영사관
  • 몬트리올총영사관
  • 벤쿠버총영사관
  • 캐나다한국대사관
  • KOTRA
  • 민주평통토론토
  • 재외통포협력센터

캐나다한국일보의 모든 기사(content)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으며, 무단 복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

Copyright © 2026 The Korea Times Dairy. All rights reserved.

이메일 구독하기

주요뉴스를 이메일로 받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