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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어야만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는 ‘여행의 맛’

황현수의 들은 풍월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Aug 14 2025 09:42 AM


나는 지금 손녀들이 살고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 산호세에 와 있다. 8월 초이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할 정도로 기온이 낮다. 오늘 아침 기온이 영상 12도, 뉴스에서는 61년 만에 찾아온 ‘추운 여름’으로 태평양에서 넘어온 구름이 하늘 가득해, 낮은 기온 현상이 나타났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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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의 5번 고속도로를 따라 LA로 가노라니 이런 특이한 야산의 풍경을 자주 보게 된다. photograph by Wes Golomb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산호세까지 약 1시간 정도 오는 동안, 도심을 지나 바다를 건넌 뒤에는 누런 작은 야산들이 계속 이어져 있고 그 사이로 주택 단지들이 보인다. 마중 나온 딸에게 “여기는 왜 산에 나무가 없지?” 했더니, 이곳은 가물어서 들풀 밖에 안나, 그래도 겨울이 되면 저 산들이 얼마나 푸르게 변해 예쁜지 몰라”한다. “겨울엔 왜 푸르지?” “겨울엔 비가 와서…” 

우리 부부가 이곳에 오고 며칠 뒤에 한국에서 딸의 친구 가족이 온다고 해서, 우리는 자리도 비켜 줄 겸해서 사촌형이 살고 있는 LA로 일주일간 짤막한 여행을 떠났다. 캘리포니아의 5번 고속도로를 따라 LA로 가며 이런 특이한 동산의 풍경을 자주 보게 된다.

 이 동산들은 마치 고국 제주도의 ‘오름’ 같다. ‘오름’은 제주도 방언으로 산봉우리가 여인의 젖가슴처럼 둥근 야산을 말한다. 이곳의 오름들은 누런색으로 덮여 있다. ‘누런색’은 통통하게 익어 고개를 떨군 벼들이 펼쳐 보이는 누런 파도 같기도 하다. 한국의 색인 황토색도 보이고, 어떤 지역은 갈색으로도 비친다. 계곡 사이를 지나면 이것저것 다 섞은 듯한 황갈색도 보이고, 방바닥 장판 색 같기도 하다. 해가 지는 오후가 되면 가마솥에 눌어붙은 누룽지 색과도 비슷하다.

이번 여행은 사실 아무런 계획 없이 오고 가는 일정만 잡혀 있다. 길을 잃어야만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으로 말이다. 45일간 동안의 일정 가운데 어디를 가거나, 누구를 만날 계획도 없다. 산호세에서 LA 까지는 약 6시간이 소요된다고 해서, 아침 7시부터 서둘러 떠났다. 하지만, 중간에 솔뱅(Solvang)이라는 덴마크인 들이 모여 살고 있는 도시에서 브런치도 먹고, 경치 좋은 곳에 세워 사진도 찍다 보니, LA 북쪽 근처에서 러시 아워에 걸렸다. 도심에서 3시간 30분 정도를 헤매다가 저녁 7시가 되어서 겨우 사촌형 집에 도착했다.

 엘 에이는 여러 번 가 봤지만, 이번처럼 별도의 스케줄이 없는 여유 있는 여행은 처음이었다. 그림을 그릴 때 러프(rough)하게 밑그림을 그리다가 윤곽을 잡듯이 시간 날 때마다 즉흥적으로 갈 곳을 정했다. 그래도 일주일 동안 하루도 지루할 틈 없이 빽빽한 일정을 소화했다. 잠 잘 곳만 미리 준비하면 ‘다음엔 어딜 갈까?’하는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동안 너무 촘촘한 여행 계획을 세웠지 싶다.

 ‘남들이 다 가 본다’는 다운타운의 명소들은 예전에 가 보았기에, 이번에는 도시 외곽에 있는 곳들을 주로 찾았다. 샌디에이고와 산타모니카 부두, 롱비치 해변, 헌팅턴 비치 등을 다녀왔다. 저 바다가 태평양이라니… 오랜만에 듣는 파도 소리와 바다 바람, 바다 비린내와 어울려 떠도는 해초들을 보며 가슴속에 눌려 있던 그리움의 물결이 밀려나는 듯했다. ‘저 바다의 또 다른 끝에 나의 고국이 있는데…’ 하는 ‘쌍팔년도’ 감상에 젖어 말이다.

햇빛은 따갑지만, 적당한 선선함이 불어오는 해변을 아내와 함께 걸으며 청아한 바다 내음에 흠뻑 취한 뒤, 노을을 보며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13불짜리 설렁탕 1인분을 픽업해 둘이 나눠 먹었다. 과연 ‘LA의 한식당은 고국의 음식보다 맛있다’는 말이 허세가 아니었다.

 LA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는 <게티 센터(Getty Center)>다. 석유왕 존 폴 게티(John Paul Getty)가 세운 미술관이다. 규모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어마어마해, 주차장에서 미술관까지 무료 트랩이 운영된다. 미술관은 지대가 높은 곳에 있어 이곳에 LA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가 있다. 이 거대한 문화 단지는 약 3만 평 규모로 하루에 전 작품을 보는 것은 무리다. 그래서 나도 어차피 다 둘러볼 수 없으니, 좋아하는 작품 위주로 살펴보았다. 

 건물 외곽은 하얀 대리석으로 지었는데,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 신전 같기도 해서 그리스 신들이 어슬렁거릴 것 같은 분위기다. 14년에 걸쳐 1997년에 완공된 이 센터는 1조 원이라는 공사비가 투입됐다고 한다. 전시장은 4개 동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입구에서 받은 안내 책자를 보며 원하는 작품을 찾아가는 것이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 안 하는 방법이다. 

 

 

화면 캡처 2025-08-13 124813_.jpg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아이리스(Irises). 1889년 유화. 게티 센터 소장 

 

 나는 빈센트 반고흐의 작품 <아이리스>와 클라우드 모네의 <아침 햇살 받은 루앙 대성당>이 있는 방을 찾았다.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이 방만 보아도 충분하지 싶다. 교과서에서 보았던 렘브란트, 르누아르, 세잔, 뭉크 등 유명 화가들의 작품이 이 방에 모여 있다. 게티 센터는 영구적으로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각 방마다 시대별 장르별로 구분되어 전시되어 있다. 그중 19~20세기 미국, 유럽, 아시아 및 근대, 현대 조각, 회화들이 있다. 미리 ‘점’ 찍은 작품만 보아도 반나절이 금세 지나갔다.

 수많은 작품들을 구경하고 난 뒤에는 센터 중심부 <센트럴 가든>에 심어져 있는 500여 개 이상의 식물들을 보면서 휴식을 취하면 좋다. 너무 많은 작품들을 한 순간에 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문화적 충격이 있게 마련이다. 아마 한숨 돌리고 사진도 찍고 담소를 나눈 뒤에 머리를 식히고 나가도록 게티 센터가 설계한 듯하다. 

여기서 엘에이 시내 야경도 보고 여유 있게 게으름을 피고 싶었지만, 근처에 있는 UCLA 캠퍼스에서 아내의 친구를 만나기로 해서 서둘러 나왔다. 이 멋진 미술관이 무료라니, 아니 주차료 20불은 받는다. 누군가 LA를 방문한다고 하면 꼭 추천하고 싶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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