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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은 존재하는가, 발생하는가
철학과 물리학이 교차하는 현실 개념의 경계
- 박해련 기자 (press3@koreatimes.net)
- Aug 28 2025 02:52 PM
현대 과학에서 현실에 대한 인식을 가장 깊이 뒤흔든 개념 중 하나는 '시공간(space-time)'이다. 비영리 미디어 네트워크 더 컨버세이션(The Conversation)에 따르면, 이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중심에 있는, 공간과 시간이 얽혀 있는 구조다. 시공간은 종종 '현실의 직물'로 묘사되며, 고정된 4차원의 '블록 우주(block universe)'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 경우 시공간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건이 하나의 완성된 지도로 존재하는 것이다. 또 다른 설명에서는 시공간이 중력에 따라 휘고 구부러지는 역동적인 장(field)으로 제시된다.
시공간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그것이 구조인지 물질인지 혹은 단지 은유에 불과한지를 묻는 문제는 단순한 철학적 논의에 그치지 않는다. 이러한 물음은 상대성 이론의 해석, 시간여행과 다중우주, 우주의 기원에 대한 이해까지 좌우한다. 최근에는 시공간 자체를 ‘우주의 기억’으로 해석하는 급진적인 제안도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시공간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언어는 종종 모호하고 은유적이며, 일관성도 부족하다.
오스트리아-영국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철학적 문제가 언어가 휴가를 떠날 때 발생한다고 말한 바 있다. 물리학은 이 경고에 부합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시간(time)’, ‘존재하다(exist)’, ‘시간이 없다(timeless)’ 같은 개념은 기술적 맥락에서 별다른 성찰 없이 사용되어 왔고, 그 결과 이러한 용어들의 의미는 광범위한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물리철학에서 특히 '영원주의(eternalism)'라는 관점은 시간의 흐름을 부정하며 '시간이 없다'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 영원주의는 우주의 모든 사건이 4차원 구조 속에서 동등하게 실제하며, 시간의 흐름은 환상일 뿐이라고 본다. 이 관점에서 '시간이 없다'라는 뜻은 우주 자체가 지속되지 않고 펼쳐지지도 않는다는 의미다. 변화도 생성도 없이, 영원 전체가 일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건이 이미 존재하고 동등하게 실제라고 전제할 때, ‘시공간이 존재한다’는 말은 그 의미가 불분명해진다. 존재와 발생은 구조적으로 구별된다. 하나는 존재의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일어남의 방식이다. 옆에 코끼리가 서 있다고 가정하면, 그것은 '존재하는' 3차원 객체다. 반면 한순간 번쩍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코끼리는 실제로 존재한다기보다, 단지 일어나거나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존재하는 코끼리는 시간 속에서 지속되며, 시공간은 그 존재의 모든 순간을 4차원 ‘세계선(world line)’으로 기록한다. 반면, 번쩍이는 코끼리는 그 세계선 중 하나의 3차원 단면에 불과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시공간의 존재 방식은 여전히 모호하다. 시공간이 진정으로 존재한다면, 그것 역시 지속되는 실체로 간주되어야 한다. 시공간이 ‘지금’이라는 순간들을 지니는 구조인지, 혹은 단지 사건들 사이의 관계를 기술하는 틀에 불과한지도 명확하지 않다.
영원주의는 이러한 구분을 흐리게 만든다. 이 관점은 전체 시공간을 이미 존재하는 고정된 구조로 간주하며, 시간의 흐름을 환상으로 본다. 그러나 모든 시공간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본다면, 시간의 흐름이라는 환상 자체도 성립하기 어려워진다. 이 환상을 회복하려면, 시공간은 현실에서 존재하는 코끼리처럼 4차원적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논의를 한 걸음 더 확장하면, 블록 우주에 포함된 모든 사건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 블록 우주 자체의 존재 시점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블록 우주는 변화하지 않으며, 펼쳐지지도 않는다. 이러한 특성은 그것이 시간 없이 존재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없다’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또 다른 시간 축을 도입하게 되면, 이는 시공간이라는 개념 안에 다시 시간의 개념을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는다. 이 같은 접근은 마치 ‘들리지도 않고, 연주되지도 않는 노래’를 설명하려는 시도와 유사하다.

시공간의 실재 여부와 존재 방식에 대한 철학적·물리학적 논의가 현대 과학과 시간 개념의 이해에 중요한 함의를 던진다. 언스플래쉬
물리학의 영역을 넘어, 대중문화도 이러한 개념적 혼란의 영향을 받고 있다. 제임스 카메론(James Cameron) 감독의 1984년 영화 『터미네이터(The Terminator)』는 모든 사건이 고정되어 있으며, 시간여행은 가능하지만 과거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설정한다. 반면 2019년 개봉한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Avengers: Endgame)』은 과거로 돌아가 사건을 바꾸는 시간이동이 가능하며, 시간선 자체를 변경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두 영화 모두 과거와 미래가 실재하고 접근 가능한 것으로 간주하지만, 그 실재가 어떤 성격의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시공간이 존재한다’는 표현을 사용할 때, 많은 물리학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존재’와 ‘발생’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경계의 모호함은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명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실에 대한 인식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 물론 이는 상대성 이론의 수학적 정합성이나 실험적 타당성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은 여전히 정확하게 작동한다. 그러나 이 방정식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이며, 그 해석 방식은 현실에 대한 언어뿐만 아니라, 물리학이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논의는 일반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을 통합하려는 현대 물리학의 과제와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철학자들과 대중 과학자들 모두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왔다. 시공간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일은 단순한 기술적 논쟁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를 묻는 철학적이자 물리학적인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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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련 기자 (press3@koreatim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