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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하지 않은 시간 속에서...
“우린 왜 ‘사랑’했을까”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Oct 13 2025 10:57 PM
올리버·클레어를 슬프게 하는 비가시적 빌런
뮤지컬에서 빌런은 감정의 깊이를 만들어 내는 중요한 장치다. 뮤지컬 ‘위키드’와 디즈니 애니메이션 ‘포카혼타스’ ‘노트르담의 꼽추’ ‘이집트의 왕자’ 등으로 사랑받은 미국 작곡가 스티븐 슈워츠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쓴 캐릭터 중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비열한 인간인 (’노트르담의 꼽추’의) 프롤로다. 현실에서라면 결코 허용하지 않을 어두운 영역을 파고드는 것이 정말 즐거웠다.” 그는 극적 갈등과 감정 폭발의 중심에 선 악역의 기능을 설명하며 “배우들이 빌런을 연기하고 싶어하는 이유를 알게 됐다” 고도 했다. 브로드웨이 거장 작사·작곡가 스티븐 손드하임(1930~2021) 역시 자신이 가사를 쓴 뮤지컬 ‘집시’의 로즈역에 대해 “관객이 감정을 폭발시키는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한다”고 했다. 로즈는 전통적 주인공이면서도 선택과 행동에 따라 악역의 인상을 주는 캐릭터다.
그러나 전형적인 빌런이 눈에 띄지 않는데도 대중적 성공과 예술적 완성도를 아우른 뮤지컬이 있다. 바로 미국 토니상 6관왕의 주인공 ‘어쩌면 해피엔딩’ 이다. 박천휴 작가와 미국 작곡가 윌 애런슨이 공동 창작한 이 작품은 2015년 트라이아웃을 거쳐 2016년 서울 대학로에서 초연됐다. 두 창작자가 직접 대본 작업부터 참여한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공연 ‘메이비 해피엔딩’은 지난해 11월 개막해 지난 6월 토니상 주요 부문을 휩쓴 데 이어 매 공연 매진 행렬을 이어가고 있다. 뮤지컬에는 올리버와 클레어라는 두 로봇이 등장한다. 이야기는 전통적인 악역과의 갈등 없이 평범한 현대인의 일상처럼 소소하게 흘러가지만 관객의 눈물을 자아낸다. 보이는 적이 없어도 현실의 제약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야 하는 우리 삶이 자연스레 겹쳐지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의 유한성, 보이지 않는 적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시간의 유한성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이자 인간을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드는 ‘적’이다. 로봇이라면 어떨까. 인간처럼 병들거나 죽지 않지만 ‘어쩌면 해피엔딩’의 두 주인공 올리버와 클레어는 다르다.
뮤지컬의 배경은 가까운 미래인 21세기 후반의 도시 서울 메트로폴리탄. 올리버와 클레어는 인간과 동일한 구조의 신체를 지닌 ‘헬퍼봇’이다. 올리버는 헬퍼봇5, 클레어는 헬퍼봇6으로 도시 외곽의 낡은 은퇴 로봇 전용 아파트에 산다. 초기 모델인 이들은 후속 모델에게 대체되고, 부품 생산마저 중단됐다. 클레어의 충전기까지 고장 나며 이들에게 남은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이야기는 “우린 왜 끝이 분명한 그 길을 함께 걷기 시작했을까”로 시작하는 첫 넘버 ‘우린 왜 사랑했을까’로 막을 올린다. 클레어는 넘버 ‘끝까지 끝은 아니야’에서 “끝이라 생각한 순간 / 항상 찾아왔던 시작 / 그러니 포긴 말아 / 끝까지 끝은 아니야”라고 노래한다. 작품 속 넘버들은 존재의 유한성과 순간의 소중함을 꾸준히 일깨운다.
사랑의 방해꾼 된 기계의 운명

‘어쩌면 해피엔딩’의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공연 ‘메이비 해피엔딩’. ©Matthew Murphy and Evan Zimmerman
지난 6월 토니상 시상식에서 스타 뮤지컬 배우 레아 살롱가는 이 작품을 두고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마법 같은 여정”이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사랑’은 동시에 가장 잔인한 빌런이기도 하다. 감정을 느끼도록 설계되지 않은 로봇이 사랑을 경험하는 순간 혼란과 오작동은 필연적이다. 더욱이 두 구식 로봇의 수명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기에 이들의 사랑은 애초부터 비극을 품는다. 사랑의 시작이 곧 이별의 예고라는 사실이 관객의 가슴을 파고든다.
여기에 기억도 두 로봇을 괴롭힌다. 사랑을 경험한 로봇에게 남는 흔적은 언젠가 마주할 상실의 그림자다. 기억을 지울 것인지 고민하는 장면은 사랑의 아름다움과 상실의 고통을 동시에 부각시킨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는 “’사랑의 시작이 상실의 시작이라면, 기억을 지우거나 아예 그 여정을 피하는 편이 나을까’라는 질문을 통해 로봇만의 문제가 아닌 인간적인 물음을 던진다”고 평했다. 공연 매체 플레이빌 역시 “사랑과 세상의 경이로움을 처음 발견하는 캐릭터의 여정을 노화와 상실의 은유로 풀어냈다”고 분석했다.
적이자 성장 동력인 ‘사랑의 상실’
2012년 ‘번지점프를 하다’부터 협업해 ‘윌·휴’로 불리는 창작 듀오 박천휴와 윌 애런슨의 뮤지컬은 특징이 분명하다. 전형적 악역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사회적 제약과 개인의 한계로부터 오는 슬픔을 섬세한 가사와 배우들의 표현력으로 쌓아간다. 첫 작품 ‘번지점프를 하다’와 2023년 12월 초연한 ‘일 테노레’, 지난해 선보인 ‘고스트 베이커리’에서도 마찬가지다. 인물 간 사랑과 감정 갈등을 중심으로 극이 전개되며, 관객은 전통적 빌런 없이도 극적 긴장과 감정적 몰입을 경험한다.
30일부터 내년 1월 25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무대에 오르는 ‘어쩌면 해피엔딩’의 여섯 번째 시즌은 ‘윌·휴’ 듀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2015년 트라이아웃 이후 맞는 10주년 무대지만 단순한 기념을 넘어선다. 대학로 소극장에서 출발해 브로드웨이 무대와 토니상 6관왕을 거쳐 돌아온 금의환향의 무대이자, 초연 멤버와 새로운 배우들이 함께 만들어 내는 세대적 교차점이다. 2016년 초연 배우 전미도·최수진(클레어), 김재범(올리버), 고훈정(제임스)과 출연 경험이 있는 박지연·박진주(클레어), 전성우·신성민(올리버), 이시안(제임스) 외에 새로운 배우 정휘(올리버), 방민아(클레어), 박세훈(제임스) 이 합류했다. 350석에서 550석으로 극장 규모도 키웠다. 작은 무대에서 시작된 두 로봇의 이야기는 이제 세계가공감하는 서사가 됐고, 그 여정은 한국 창작 뮤지컬의 성취와 가능성을 증명한다.
올리버는 기억 삭제를 고민하면서 “슬픔을 몰랐어”라고 말한다. 사랑은 아름답지만 영원하지 않기에 결국 슬픔을 품는다. 전통적 빌런이 부재한 ‘어쩌면 해피엔딩’이 말하는 바는 명확하다. 사랑하고, 느끼고, 잃는 경험 자체가 가장 강력한 적이자 동시에 우리를성장시키는 힘이라는 것. 윌·휴 듀오는 “이렇게 오랫동안 공연이 계속된다는게 마치 작은 기적처럼 느껴진다”며 “새롭게 ‘어쩌면 해피엔딩’을 만나게 될 관객들도 이 이야기와 음악이 서로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문을 열어주게 하는자그마한 격려와 위로가 될 수 있길 바란다”고 10주년 공연을 앞둔 소회를 전했다.
김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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