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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 (하)
소설가 김외숙
- 유희라 기자 (press1@koreatimes.net)
- Oct 10 2025 08:36 AM
나는 엄마가 정성 쏟아 키운 꽃봉오리였었다. 기꺼이 거름이 되고 울타리가 되던 엄마를 위해서라도 나는 더 곱고 탐스러운 꽃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 여름밤의 악몽 이후 나는 더 이상 꽃이 아니었다.
‘왜 하필이면 그 일이니?’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가면 엄마는 그렇게 물어놓고는 돌아서서 스스로 대답하듯 ‘내 탓이요.’라며 가슴을 쳤다. 화장장에서 하는 내 일이 못마땅하다는, 그것은 결국 그 여름날의 일 때문이었고, 그 일은 엄마의 역할 소홀로 비롯되었다는, 회한의 다른 표현이었다.
엄마는 아직도 내가 꽃일 수 있다고 기대하는지도 몰랐다, 엄마에게 딸은 그러함에도 꽃일 것이므로. 그러나 엄마가 돌아서서 가슴을 치면 내 마음은 엄마 가슴에서 다시 짓이겨져 더 처참할 뿐이었다.
엄마의 말처럼 하필이면 시신 태우는 일, 그러니까 화장로 작업 기사를 선택한 것은 전적으로 내 의지였다. 화장로 불길에다 무례한 폭행에 반응한 몸과 짓이겨진 마음을 던져버릴 참이었다. 1,000도의 불길은 누추한 것은 무엇이든 태울 수 있는 온도였다.
나보다 먼저 그 일을 하고 있던 사람이 선배였다. 곱상하게 생긴 선배의 삶 어느 한 부분이 나처럼 태워버리고 싶을 정도의 치욕이나 고통으로 채워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은 순전히 내 사사로운 경험과 결부한 상상이었다, 스물셋에 남자의 눈을 감기는 것도 결코 허다한 일은 아니므로.
“누구는 태어난 날인데, 넌 무슨 죄 있다고 하필 이날에...”
울던 선배가 다시 국화잎을 뿌리며 넋두리했다. 화장장 바깥세상은 그곳이 곧 죽음 없는 천국인 듯 ‘누구’의 탄생을 구실로 흥청대리라. 귀에 익은 캐럴은 거리를 휩쓸고 사람들은 그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와 상관없이 축제를 맞은 듯 흥분하리라.
나는 아기 시신 위에 떨어지는 국화잎을 바라보며 마구간에서의 예수와 화장실의 아기를 그려보고 있었다. 꼭 같이 누추한 곳이었어도 수천 년이 지나도 여전히 기리는 탄생과 태어나자마자 어미에 의해 버려진 가혹한 운명이란, 너무나 상반되는 탄생이었다. 선배 말에 의하면 죄가 없는 아기였다. 가혹한 운명을 생각하려니 문득 태어나기도 전에 버려진 생명이 또 마음에 맺혔다. 무자비한 방법이었다고 의사가 말했던가?
무자비한 방법이란 그 말이 갑자기 내 가슴에 무자비하게 내리꽂혔다. 통증이기도 하고 슬픔이기도 한, 전에 없던 증세를 동반했다.
‘네 잘못 아냐!’
기억 속 엄마의 말이 날렵하게 날 감쌌다. 그때나 지금이나 날 변명하고 감싸는 일에 엄마는 필사적이다. 엄마 말대로라면 악몽의 시작과 끝은 모두 엄마 탓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하던 엄마는 왜 그렇게 불안해 보였을까? 죄 없다는 아기에게 무자비한 방법으로 죄를 물었기 때문일까? 마치 손에 피를 묻힌 사람 같았다.
죄 없다고 하면서도 당당하지 못하던 엄마와, 아기에게는 죄 없다며 국화잎을 뿌리며 흐느끼는 선배. 두 사람의 행동이 나부끼는 눈처럼 내 눈앞에서 어지럽다. 이 작은 아기, 누군가의 몸에서 내쳐져 죽음으로 방치된 이 아기가 늘 제자리인 듯 잠재해 있던 내 피해의식에다 태어나기도 전에 내쳐진 그 생명도 피해자였다는 충동질을 하는 것 같다.
‘그 생명도 피해자?’
마치 주체와 객체를 뒤바꾸는 것 같은, 난데없는 충동질이었다. 도대체 누가 피해자인가?
결론도 얻지 못한 채 선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선배는 여태 국화꽃 이파리를 뿌리고 있다. 붉은 눈을 하고 이미 몇 송이째의 꽃 이파리를 따 아기의 시신 위에다 뿌리고 있는 선배의 표정이 내게 말없이 반문하는 것 같다, 죽음보다 더 큰 피해가 무엇이냐고.
‘죽음보다 더 큰 피해’
마치 저 어휘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개를 세웠다.
이제 선배의 손에서 뿌려지는 흰 꽃잎은 흡사 소담스럽게 내리는 눈 같다. 향이 있는 눈이다. 눈 오는 성탄일이 될까? 온천지가 향으로 은은해지리라. 나는 의도적으로 눈앞에다 대학로를 그린다. 펑펑 쏟아지는 흰 눈을 맞으며 캐럴이 흥겨울 마로니에 공원을 걸으리라. 나는 아직 그럴 나이가 아닌가?
“인사해라, 너도. 우리 밖에 누가 있니?”
마음은 이미 마로니에 공원에 가 있는데 꿈 깨라는 듯 선배가 국화 한 송이를 건넸다. 결정적인 순간에 찬물을 끼얹는 건 선배가 가진, 그리 호감이 가지 않는 습관 중의 하나이다.
원망스럽게 올려다보는데 선배의 눈동자는 여태 붉다. 참 눈물이 많은 눈이다. 저 눈물 많은 눈으로 어떻게 울 일 많은 이 일을 하겠다고 나선 것인지 그것도 의문이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선배가 말했다. 화장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아기 요람은 금방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할, 선배의 말처럼 그 불길은 금방 이 작은 요람을 태울 것이다, 흡사 하얀 국화잎이 든 선물상자 같은 아기 요람을.
‘무슨 죄 있다고...’
선배의 말이 다시 청신경을 건드린다. 선배는 분명 죄 없다고 했는데, 아기는 곧 불꽃 속으로 사라져야 한다.
‘왜?’
분명 아기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결국 속죄다, 이천 년 전 오늘 태어났다는 ‘그 누구’처럼. 죄 없이 불꽃 속으로 사라져야 하므로 억울하고 애통한 죽음이다. 욕정과 그 욕정에 반응한 누추한 자들을 대신한 죽음.
‘죽음’과 ‘피해의식’, ‘피해의식’과 ‘죽음’
이젠 어느 쪽이 주체이고, 어느 쪽이 객체인지조차도 헷갈린다. 자명한 사실은 그 죽음에 나는, 관계없다고 반박할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어이없고 민망한 관계를 나는 어떻게 변명해야 할까?
“아가야.”
주저하며 내가 불렀다. 살아있대도 들을 수 없는 아주 작은 소리였다. 아기는 들을 수도 없을 아주 작은 소리가 엉뚱하게도 내 눈물샘에 가 닿은 것일까? 은은하게 코에 스미던 국화 향이 문득 눈시울에서 아릿하다. 마치 빗물 흐르는 유리창 너머의 정경인 듯 국화잎으로 채워진 눈앞의 요람이 내 눈에 아른거린다. 이윽고 눈시울에서 무게를 이기지 못한 아릿한 국화 향이 방울이 되어 후루루 아기 요람 속으로 떨어진다. 내가‘흡’하고 숨을 모아 쉬었다. 그러나 한 번 터진 눈물샘을 나는 감당할 수가 없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아가야!”
이제는 달리 방법이 없어 요람을 잡은 채 엎어지듯 주저앉아 가슴을 끌어안았다. 왜 미안하다는 말조차 할 수 없었던지 구차한 변명도 할 수 없음이 더 미안하다. 어린 동생의 주검을 안은 채 엄마가 왜 그렇게 데굴데굴 마루를 굴러야 했었던지도 이제는 아주 조금 알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선배는 말없이 내 등을 쓸고 있다.
이윽고 허물어진 자세를 고치고 나는 손에 쥔 국화 송이를 아기의 요람에다 놓았다. 요람 속의 국화는, 이제 막 잠을 깬 눈길을 엄마의 눈과 맞추며 방시레 웃는 아기 얼굴이다.
‘그래도 넌 웃는구나.’
방시레 웃는 모습이 뜻밖에도 늘 중심인 듯 버티고 있던 내 속의 모난 것을 살며시 감싸는 것 같았다. 그 다감한 느낌에 완강한 모서리가 물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녹아내리더니 이내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언제 그런 것이 있기나 했니, 하는 것처럼. 더운 불길도 범접하지 못하던 견고한 응어리였다.
이제는 보내야 한다. 내 가슴에 갇혀 나보다 더 고통스러웠을 영혼을 저 불길에 실어 훨훨 떠나보내야 한다.
“잘 가라, 아가야.”
마주 보며 이윽고 나도 방시레 웃는다. 그리고 두 손으로 요람의 뚜껑을 덮었다.
캠프파이어의 그 밤에 온 생명을 나는 이제야 내 가슴에서 떠나보냈다.
아주 늦은 장례였다.

소설가 김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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