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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작가·개그맨 전유성 빈소에서 퍼포먼스 벌어진 이유
영원한 여행 : 고인 중심의 의례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Nov 02 2025 07:27 PM
‘문상객 접대’의 무대가 된 장례식 제대로 ‘작별’ 못했다는 공허함도 마지막 시간, 고인을 중심에 둬야
Q: 60대 여성 K다. 팔순을 훌쩍 넘긴 어머니가 지난달 낙상사고로 인한 뇌출혈로 눈을 감으셨다. 3일장 내내 조문객 맞이로 정작 상주인 나 자신의 감정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화장을 마치고 봉안당에 모시고 집에 돌아오니, 그제야 어머니 빈자리가 실감 났다. 많은 이가 귀한 시간을 내 조문하고 위로했지만, 정작 나는 어머니와 ‘제대로 된 이별’을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공허함이 컸다. 돌아보면 관례적 3일장이 아니라, 어머니를 중심에 둔 장례를 치렀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고인과 제대로 작별하는 절차는 없을까.

일러스트 = 이지원 기자
A: 요즘의 3일장은 유가족에게 애도 시간과 공간을 주기 어렵다. 빈소 준비, 조문객 응대, 기타 장례 행정 절차를 챙기다 보면 금세 시간이 흐르고, 가족끼리 서로 위로할 여유를 만들기 쉽지 않다. 장례식장이 ‘손님 접대를 위한 사회적 무대’로 바뀌면서 ‘진짜 애도’는 접견 뒤로 밀린다.
그래도 과거엔 상실을 집단적으로 가공하는 장치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상여를 메고 돌며 생전 이야기를 풀어내던 ‘빈상여놀이’, 울음과 노래가 뒤섞인 곡(哭)을 통해 슬픔을 분출·수용하며 승화시켰다. 그러나 오늘의 장례는 안전, 위생, 시간 등 효율을 앞세우면서 정서적 과정이 축소됐다. 그 결과 형식은 남았으나 작별의 깊이가 얕아졌다.
외국의 장례문화를 살펴보자. 미국은 장례식장 중심의 ‘접견 장례’다. 장례식장은 고인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기억을 정리하도록 설계돼 있다. 조문객은 정해진 시간에 찾아와 가족과 포옹하고, 추억이 담긴 이야기를 나누며, 짧은 추모 메시지를 전한다. 예배나 추모식에서는 종교 의식과 기도, 추도사를 통해 각자의 감정을 담아 명복을 기원한다. 고인이 좋아한 음악과 사진, 유품 등 개인화된 요소를 담아 “그 사람답게” 작별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예식 뒤에는 간단한 다과로 감사 인사를 나눈다. 핵심은 고인을 직면해 마지막 인사를 하고, 충분한 추모 시간을 통해 남은 이들의 회복을 돕는 애도로서의 기능이다.
2006년 뉴욕에서 열린 고 백남준 작가의 영결식은 ‘그답게 작별한’ 대표적 사례다. 조문객들은 미국식 접견(Viewing)으로 고인을 직접 마주한 뒤, 각자의 넥타이를 잘라 관 위에 올리는 퍼포먼스를 했다. 장례식장이 엄숙함보다 유머와 자유로운 기억의 장소가 됐다. 동료 예술가들이 함께한 이 자리는 백남준의 언어였던 유머와 퍼포먼스로 번역됐고, 얼마나 그답게 보냈는가로 옮겨졌다.
비슷한 맥락으로 얼마 전 한국에서도 ‘개인화된 의례’가 주목을 받았다. 연극배우 박정자씨가 해변에서 사전(생전) 장례식을 열었다. 웃음과 음악, 추억 낭독으로 지인들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영화의 마지막 장례신 촬영을 겸한 자리였지만 “꽃 대신 기억을 들고 오라”는 초대장처럼 슬픔을 ‘축제적 추모’로 전환한 시도였다. 박정자 배우는 상여 행렬을 스스로 이끌며 ‘나다운 마지막’을 보여주었다.
최근 고 전유성씨의 장례식에서도 후배 개그맨이 본인의 대표 퍼포먼스인 ‘숭구리당당’을 선보였고, 장례식장은 웃음과 울음이 뒤섞였다. 이 역시 장례의 중심을 고인의 방식, 즉 평생의 코미디와 웃음에 둔 결과다.

개그맨 김정렬이 9월 28일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된 개그맨 전유성의 영결식에서 '숭구리당당'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현대의 장례가 빚는 공허함을 줄이려면, 세 가지 구조를 바꿔야 한다. 첫째 시간 구조다. ‘3일장’이라는 프레임은 접견을 상시화해 정작 가족의 작별 시간을 맥없이 소진시킨다. 3일장은 선택이지 의무가 아니다. 상황과 이동거리, 종교의식에 맞춰 조문 시간을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조문 시간이나 응대보다 작별의식을 우선하는 것이 핵심이다.
둘째는 역할 구조다. 지금의 상주는 접견에 묶여 정작 작별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상주는 ‘작별의 큐레이터’가 돼야 한다. 미국에서는 조문을 가면 고인의 이야기가 담긴 엽서나 카드를 나눠준다. 또 생전에 좋아했던 음악을 틀거나 유품을 전시해 조문객이 기억을 나눌 접점을 만든다. 상주가 고인의 지인을 알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장치가 서로의 대화를 열고, 고인을 의례의 중심에 자연스럽게 위치시킨다. 요즘 결혼식이 ‘혼주 중심’에서 ‘부부 중심 이벤트’로 바뀌었듯, 장례도 ‘의전 중심’에서 ‘고인 중심’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뜻이다.
셋째, 평가 구조다. 장례의 성공이 조문객 수, 화환 개수, 완벽한 의전 등으로 평가되면서 애도의 깊이는 헤아려지지 않는다. 중요한 건 인원수가 아니라 의미의 밀도, 즉 고인의 삶과 의식이 얼마나 잘 맞물려서 제대로 작별했는지다. 그럴 때 장례는 ‘끝’이 아니라 남은 이들을 지탱하는 의미의 시작이 된다.
죽음의 승화는 단지 슬픔의 언어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사람마다 종결의 의미는 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신앙의 약속, 누군가에게는 자연으로의 귀환, 또 다른 이에게는 미완의 과업을 잇는 바통일 수도 있다. 그래서 장례를 설계할 때 먼저 물어야 한다. "그분을 우리는 무엇으로 기억할 것인가." 남은 자들의 기억에 어떤 표정과 문장을 남기고 싶은지, 그 답을 찾아 장례식에 담아낼 때, 죽음은 상실이 아니라 남은 삶을 다시 일으키는 약속이 될 것이다.
이정선 을지대 장례산업전공 교수·미국 장례지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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