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이제야 알겠다
수필이 있는 뜨락(10)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Nov 05 2025 05:12 PM
생노병사, 생자필멸이 죽음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이라면 ‘기운이 진하여 죽으니라’는 죽음에 대한 성경의 묘사이다. 진리는 긴 설명을 필요로하지 않는다. 예, 아니요가 진리를 가늠하는 잣대가 될 때도 많다. 팔순에 와서 알게 되었다. 인생의 년수는 칠십, 혹 강건하면 팔십이라는 것 말이다. 요즘은 신문 부고란에 눈이 자주 간다. 저분은 몇 세에 별세했을까. 칠십 대도 많고 팔십 대도 많다. 팔십 대에 별세했다는 것은 건강하게 살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지금은 백세시대라고 한다. 옛날에 비하면 평균수명이 많이 향상된 것 같다. 병실에 누워서 십 년, 십오 년을 살고 팔십을 넘겨서 죽는 이들도 있다. 그래도 건강하게 살다가 죽었다고 할 수 있을까.

Adobe Stock
약으로 연명한다. 보약이 아닌 약 말이다. 나이 들어서는 보약도 약발이 없는 것 같다. 온갖 약으로 수명을 연장한다. 어떤 사람은 건강보조식품까지 합쳐서 하루에 약을 40알을 먹는다고 한다. 가히 연명이다. 그래도 팔십만 넘겨 살면 장수했다고 해야 할까. 장수의 표준이 궁금하다.
나이와 함께 육신이라고 하는 기계는 낡아지지 않을 수가 없다. 여기도 고장이 나고 저기도 고장이 난다. 기름칠을 해도 별반 효험이 없다. 이제야 나는 기운이 진해지는 것을 몸으로 느낀다. 콕집어서 어느 부분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몸이 안다. 나이가 더 들면 오늘이 다르고 내일 다르다고 하던데 사실이겠지. 또 아픈 곳도 있다. 만성질환, 흔히 말하는 기저질환이다. 모두 그러한 병을 가지고 산다. 나이 들어서는 한 두 가지 병과 친구하고 살다가 죽어야 한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공평하게도 모두가 비슷하다.
영국의 모 간호사는 평생을 호스피스 병원에서 근무했다. 수많은 황혼의 삶을 보았다. 그는 작심했다. 자기는 75세까지만 살기로 했다. 그 이후의 삶은 부질없는 연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때까지 보아온 노인들의 삶에서 얻은 결론이었다. 75세가 되자 그는 남편과 함께 스위스 라인 강변의 근사한 식당에서 마지막 식사를 했다. 그리고는 안락사가 허용되는 스위스 바젤의 한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남편도 두 자녀도 그의 결심을 막지 못했다. 황혼 애가다. 그는 죽을 때 지병이 없는 쓸만한 육신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생을 스스로 마감하는 안락사, 그것이 옳은 일인지는 지금도 많은 논란거리이다. 아무튼 그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이제야 알겠다. 그녀가 굳이 그렇게 생을 마감한 이유 말이다. 팔순이 된 나이에 와서야 그녀의 뜻을 어느 정도 짐작할 것 같다. 나만 그럴까. 팔순을 넘겨 사는 거의 모든 이들이 같은 처지일 것이다. 기운이 진해지는 것 말이다. 육신의 부품 어느 것 하나 온전한 것이 없다. 낡고 지쳐있다. 마치 헌 옷처럼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어제라는 옛날과 이제라는 오늘이 한 줌 길이인 것도 이제야 알겠다.
늙음끼리 만나면 서로 장수를 축복하며 오늘도 건강히 지내라고 격려한다. 고맙고 안쓰럽다. 동병상련, 비슷한 처지 노인들의 공치사다. 때로는 묵언의 짧은 인사에서 언제 생을 하직할지 모른다는 아쉬움이 묻어 나온다. 모두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누가 먼저 떠날지 모르지만, 간발의 차이일 것이다. 그렇게 모두 가야 한다.

Adobe Stock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소용없는 일이다. 늙음을 막을 수도 없고, 죽음을 피할 수도 없는 것 말이다. 지금껏 수많은 사상가, 철학자, 종교인들이 머리를 싸매고 알기에 골몰했어도 얻은 결론은 하나다. 생노병사라는 것이다. 기운이 진하면 죽는다는 것이다.
재촉하거나 기다리지 않아도 곧 찾아올 삶 저편, 피안의 세계에 관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그 대신 나는 오늘도 나쁜 신호를 보내는 육신과 잘 지내기 위해 작은 노력을 기울일 뿐이다. 사는 동안에는 조금이라도 아프지 않고 살고 싶어서이다. 그것 뿐이다. 구십 세도 백 세도, 아니 내일조차도 내 영역이 아니다.
밤이 되고 아침이 되면 나락으로 떨어졌던 육신이 겨우 기동한다. 밤이 싫다. 단잠이 아니다. 남자들에게만 있는 밤톨만 하다는 조직하나가 잠을 깨운다. 그러기를 두세 차례, 숙면을 방해한 그를 나무란다. 소용없는 일인 줄 알면서 늘 하는 버릇대로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팔다리운동, 발 운동, 눈 운동, 목 운동 등으로 몸을 푼다. 오늘도 나를 괴롭히지 말고, 순순히 움직여 주기를 부탁한다. 얄밉지만 할 수 없다. 학대하면 할수록 덤벼들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렇게 세월이 가면 저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날이 오겠지. 그땐 나는 훨훨 날아 자유를 만끽할 것이다.

www.koreatimes.net/오피니언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