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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가 없구나
수필이 있는 뜨락(11)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Nov 12 2025 05:14 PM
고국에 계신 엄마와 통화하고 나서 조용히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오늘 엄마는, 늙은이가 된 후로는 도 닦는 심정으로 산다고 하셨다. 느닷없는 말이었다. 엄마에게 늙은이란, 아흔 넘은 이를 지칭하는 말이다. 나이 드니 산다는 게 서운하고 섭섭한 일이더라만 그래도 어쩌겠느냐고도 했다. 힘들다, 서럽다, 외롭다, 쓸쓸하다 같은 익숙한 표현 대신에 왜 섭섭하다고 했을까. 그건 기대에 어그러져 실망스럽고 불만스러울 때 쓰는 단어다. 노년에 걸었던 기대와 바람이 헛되더라는 의미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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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은 물 마시러 방에서 식탁까지 가는 것도 천 리 길 같다는 엄마인데, 도우미 아주머니가 하루에 몇 시간씩 다녀가는데도 당신 빨래는 당신이 한다며 세탁기를 떠나지 못한다. 걱정하는 나에게 변명처럼 힘없이 내놓는 말에 나는 그만 할 말을 잃는다. “늙은이 냄새가 날까 봐 그래, 어느 옷엔들 그 냄새가 배지 않았겠느냐”하는 바람에, 엄마와 눈을 마주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말머리를 돌리고 만다.
얼마 전부터 집안에서도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하는 엄마가 빨래 바구니 옮기는 상상을 하면 마음이 저린다. 코비드 팬데믹 전에 엄마를 만났을 때 빨래 바구니가 무겁다고 가벼운 걸로 사다 달라고 하신 적이 있다. 몇 군데 들러 찾아보아도 집에 있는 것보다 더 가벼운 건 없었다. 결국 엄마는 아흔 넘은 나이가 무슨 죄라도 되는 양, 팔에 힘 빠질 때까지 오래 산 당신 탓을 했다. 내가 집으로 돌아올 때 엄마의 냄새, 그 세월의 냄새도 엄마의 서운한 눈빛과 함께 태평양을 건너왔다.
언젠가는 엄마 어깨 통증이 심해서 병원에 갔는데, 담당 의사가 적극적으로 치료할 생각도 별로 없는 것 같더라고 하셨다. 노환이라며 항생제와 진통제만 한 보따리 처방해 주더라고. 이만큼 산 늙은이를 고쳐서 더 살게 하면 뭘 하나 싶었던 거지, 엄마는 맥없이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가 체념이었는지 초연함이었는지 몰라도 듣는 내 가슴에는 서늘한 바람이 술렁거렸다.
항생제와 진통제라도 처방해주니 다행이라던 엄마 말에, 오래전에 읽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이 생각났다. 인간을 ‘생산성’있느냐를 기준으로 평가하는 사회에서 '쓸모'가 없어진 존재로 살아가는 노인들 이야기다. 인간 수명이 점점 길어지자 약이나 치료에 의존하는 노인 인구를 줄이기 위해 정부는 70세 이상 노인에게는 약값과 치료비 지급을 제한하는 법을 제정하여 발표한다. '생명의 한계를 존중한다’는 명분으로 사회 조직이 강제하는 무례한 법 앞에 노인들은 무력하다.
주인공 프레드 부부는 세상 모든 자식이 다 부모를 버려도 자기 아이들만큼은 절대 그러지 않을 거라 확신하며 사는 노인들이다. 어느 날, 우연히 바깥을 내다보다가 자식이 포기한 노인을 수용소로 실어 가는 닭장차가 자기 집 앞에 멈추는 광경을 목격한다. 돌봄이 필요한 늙은 부모는 자식의 결정을 따를 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우려가 현실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집행관들이 문을 뜯고 들어오자, 노부부는 이 층 창문에서 뛰어내려 도망친다. 그들은 다행히 쓰레기 더미에 떨어져서 다치지 않고 닭장차로 달려가, 그 차에 실려 있던 스무남은 노인과 산속 동굴로 피신하여 생사의 운명을 함께한다. <황혼의 반란>이라는 소설 제목처럼 생의 절벽 끝에 이른 노인들의 반란이 시작된 것이다.
프레드는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던 노인들이 자연에서 조화롭게 집단생활을 할 수 있도록 주도한다. 하나의 생명으로서 존재 이유를 깨우치게 하고 존엄한 사람으로 살아갈 용기를 주고 싶었을 것이다. 차츰 이 소식이 전국에 퍼졌고 수용소에서 무기력하게 죽음을 기다리던 노인들이 탈출하여 그들과 합류한다. 정부는 치명적인 독감 바이러스를 공중 살포하고 잉여 인간 취급하던 노인들에게 백신 공급을 차단하는 것으로 소설은 막을 내린다. 해피엔딩일 수 없는 결말, 달리 방법은 없는가.
“당신도 언젠가는 늙은이가 될 것이야!” 죽음의 주사를 놓으러 온 젊은 관료에게 노인이 말한 소설 속 마지막 문장이다. 그 말은 “너도 늙어 봐라!”라며, 엄마가 나에게 농담처럼 던지던 말과 닮아 있었다. 노인은 어쩌면 서운했을 것이다. 사회에, 운명에, 그리고 존엄하게 죽고 싶다는 일말의 기대와 그 바람마저 허망하게 흩어지는 현실에 대하여. 무엇보다도, 저항할 도리가 없이 무능해진 자기 자신에 대하여.
“늙으니까 어쩔 수가 없어.... 늙는 게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 요즘 들어 엄마에게 자주 듣는 말이다. 늙어서 어쩔 수 없다는 엄마의 말은 체념의 언어이고, 뱉아버리려 해도 찐득거리며 혀에 들러붙는 아픔이다. 나는 나이에 굴복해야 하는 엄마 삶의 무거움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유행어의 가벼움 사이에서 비애를 느낀다. 엄마의 내일은 오늘보다 더 어쩔 수 없고, 모레는 정말로 더 어쩔 수 없는 날들이 되겠지. 어쩔 도리가 없어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노년을 산다는 게 엄마는 ‘섭섭’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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