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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만파식적(萬波息笛)'
권천학 | 시인·K-문화사랑방 대표
- 유희라 기자 (press1@koreatimes.net)
- Dec 08 2025 10:06 AM

사진 출처 권천학 작가
*뜬 마음: 헛되거나 들뜬 마음
*뜬 세상: 덧없는 세상
'만파식적(萬波息笛)'은 2022년에 쓴 시조 작품이다.
발표 후 얼마 되지 않아서 한국문학 신문(2023년 4월 12일)의 ‘현대시조의 맛과 멋’란에 이광녕 교수의 시조 평으로 거론되면서 명시조로 인정되었고, 한국시조문학(2023년 여름호)에 명시조로 수록되고, 이어서 한강문학(23년 가을호)을 비롯한 여러 지면에 명시조로 회자(膾炙)되었다. 2025년10월에는 AI기반의 멜로디로 작곡이 되어 시조노래로 선을 보이기도 했다.
https://youtu.be/PXN9Rh4_ANU?si=UXbr397pgmf60_Vr
한자표기의 ‘萬波息笛’을 풀어보면 ‘세상의 온갖 풍파를 다스려 잠재우는 피리소리’라는 뜻이다. 즉 세상의 환란을 잠재우는 피리소리를 말한다.
얽힌 설화가 사기(史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수록되어 있다.
신라(新羅)의 30대 문무왕(文武王)은 통일신라의 첫 군주로서 보다 굳건한 통치(統治)를 위한 왕권(王權)강화와 외적(外賊)을 물리쳐 국방을 튼튼히 하여 백성의 안전을 지키고자 애쓰는 왕이었다. 특히 동해바다를 통해 수시로 넘나드는 왜구(倭寇)를 막아내어 백성들의 안위를 지키고, 들끓는 여론을 잠재우고자 했다.
그런 염원으로 국교인 불교에 따라 절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절이 완공되기 전에 세상을 떠나게 되자. ‘죽어서 해룡(海龍)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을 남기며 뼛가루를 동해바다에 뿌려달라고 했다.
문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아들 신문왕(神文王)은 아버지의 유훈(遺訓)을 받들어 짓다만 절을 완공시키고 호국정신의 아버지에 대한 감사로, 감은사(感恩寺)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과정에서 금당(대웅전)의 뜰 아래 지하물길을 만들어 동해의 해룡이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죽어서 해룡(海龍)이 되었을 아버지의 유언을 믿는 마음에서였다. 682년의 일이다.
천오백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면서 건물은 사라지고 절터와 동서 2채의 3층 석탑만 남아있다.
사기(史記)의 기록 외에도 인근 민간에 떠도는 곳곳의 지역에 변형된 설화들도 전해져오고 있다.
종합하면,
어느 한 때,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고 대낮에도 천둥이 치고 하늘마저 컴컴하게 어둑한 날씨가 일주일이 넘게 지속되었다. 바다는 파도로 뒤척였고, 천지가 진동하였다. 사람들은 하루빨리 날씨가 좋아지기만을 바라며 민심이 흉흉해졌다.
신문왕의 꿈에 동해에서 거북머리를 닮은 바위섬이 떠밀려왔다. 그 섬의 꼭대기에 대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 대나무는 신기하게도 낮에는 둘로 갈라지고 밤이면 한그루로 합쳐졌다. 용이 나타나 그 대나무를 꺾어 피리를 만들어 불면 세상이 잠잠해지고 천하가 화평해질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꿈에서 깨어난 왕은 꿈에 본 장소를 찾아갔다. 꿈에서처럼 바위섬이 있었고, 그 봉우리에 대나무가 있었다. 그 대나무로 꺾어 피리를 만들어 불게 했다. 그러자 하늘이 밝아지면서 바람이 잦아들었다. 바다도 잠 들어서 천하가 잠잠해졌다.
신기한 그 피리를 국보로 삼아 월성(月城-경주시에 위치한 신라 왕궁터)의 천존고(天尊庫-궁중 보물창고)에 소중하게 보관했다.
그 후 역병(疫病)이 돌거나,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 가믐이 심할 때, 홍수가 날 때 등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그 피리를 꺼내어 불면 역병이 사라지고, 외적이 물러가고, 비가 내리고, 홍수가 다스려지는 등, 천하가 평안해졌다.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고 부르며 소중히 간직했다.
왕이 꿈에 용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하는 지점이 지금도 있다.
내가 감은사지(感恩寺址-사적(史跡)로 사적 제31호)를 찾아갔을 때는 1970년대 말쯤이었다. 국립박물관에서 1년 과정으로 운영한 ‘박물관대학’을 마친 후 몇몇 수강생들과 함께였다.
당시는 교통도 불편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유물유적들이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벗어나 있던 시절이라서 인적조차 없이 쓸쓸하였다.
마른 풀숲, 마을과 멀리 떨어진 자리에 건물구조를 증거 하는 돌무더기들이 버려진 듯이 보였고, 동ㆍ서 3층 석탑만이 덩그랗게 풀숲에 서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 매우 쓸쓸해보였다.
금당, 돌마루, 회랑, 등의 건물의 형태를 짐작케 하는 구조들 사이로 도랑형태의 물길이 이어져 금당 앞마당을 지나 앞문 쪽으로 해서 문밖으로 뻗어가고 있었다. 설명이 없으면 제대로 알아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 물길을 통하여 드나들었을 해룡을 상상했다.
석양을 등진 채 저만큼 떨어져 마주 보고 서있던 동서3층탑(국보 제112호)이 마냥 하염없고, 지나가는 바람조차도 석양빛으로 흔들리고 있음을 느끼게 했던 기억이 희미하게나마 새롭다.
지금은 국가유산청 관리하에 주변정리를 해놓고 팻말도 세우고... 사진으로 보았다.
그때의 기억과 사기의 기록을 품고 있으면서 시조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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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라 기자 (press1@koreatimes.net)
